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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린 Mar 15. 2019

누런벽지; 여성과 광기

소설 '누런벽지(The yellow wallpaper)'에 대한 분석

1. 서론

 이 순간까지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점들이 있다. 남편 John이 죽은(혹은 기절한) 이유와 매번 그를 넘어 외부와의 소통을 하는 주인공의 모습들이 그러하다. 이 두 개의 문제에 대해서는 아래에 기술할 본문에서 내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리겠지만 확실한 것은 아직 ‘답’을 찾지 못했다는 점이다.

 첫 번째 시선은 페미니즘, 특히 래디컬페미니즘으로 내용을 다룰 것이며, 두 번째는 탈식민주의로써 다룰 것이다. 결정한 두 시선은 어쩌면 동일한 주제라 할 수도 있다. 그만큼 페미니즘과 탈식민주의는 흡사한 면모와 양상을 보이기에, 1892년이라는 상당히 오래 전 작품인 The Yellow Paper에서 이 두 가지의 주제를 동시에 찾아낼 수 있다는 점이 놀라웠다. 이후 페미니스트들이 자신의 이론을 확립하고 주장하기 위해 발견해내고 활용했던 작품인 만큼, 작가의 소설은 현 시대에도 비슷한 상황과 감정의 흐름을 발견할 수 있다. 독자, 특히 여성의 경우 혼란스러운 방식의 서술에도 불구하고 작품의 흐름과 주인공의 심정을 파악해낸다. 과연 이 작품을 당시 시대적 배경에 맞는 시선으로 볼 것인가? 현대적 시선으로 바라보아도 괜찮은 것인가? 나는 이에 대한 것에서 현대의 시선으로 볼 것을 선택했으며, 이 작품이후 등장한 두 관점으로 작품을 분석할 것이다.


2. 본론

2-1. 여성상위, 가부장제 전복의 시선.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이름이 없다. 비슷한 시기에 써졌던 Kate Chopin의 작품에서 주인공을 지칭하는 이름, 또는 성이 존재하는 것과는 대비되는 모습을 보인다. 작중 내내 주인공은 자신의 행동, 심정을 표현할 때에는 I라는 지시대명사를 사용하고, 관찰자적인 시점이나 자신이 처한 상황을 표현할 때에는 one이라는 단어를 주로 쓰는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one이 사용될 때는 남성등장인물들이 자신을 평가하고 규정짓는 상황을 보여주며 “내가 뭘 할 수 있겠어요!”라는 반복된 어조로 무력하고 억압받는 자신을 표현한다. 이 점에서 발견할 수 있는 두 가지 요소는, 첫 번째는 그녀가 단순히 자신만의 이야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Collective one으로써 하나의 사례를 고발하는 것이고, 그 하나의 사례가 자신의 이야기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남편과 남자형제가 의사이자 사회적으로 이름 있는 사람임을 밝히며 가장 가까운 가족들마저도, 남성과 여성 간에 계급이 존재하는 한 남과 다를 것이 없음이 드러난다. 여기서 주인공은 You라는 표현을 쓰며 독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행동을 고발하면서 앞서 서술했던 one이라는 표현을 쓰며 이러한 상황에 처했을 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할 수 있는 여성이 존재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심어준다. 독자가 여성이라면, 이 대사를 보며 수긍하면서도 왜 그래야할까에 대한 고민이 생겨날 것이고, 남성이라면 왜? 라는 의문을 가지면서도 그 상황이 가지는 오류에 대해 생각할 것이다. 그들은 겪어보지 않았기에 공감할 수 없고, 공감할 수 없기에 생각을 거쳐야만 한다. 두 번째는 아직 그녀에게 자아와 자기 스스로의 결정능력이 남아 있다는 것이고, 남성에 의해 박탈당하고 있음을 고발하는 요소로써 존재하고 있다. 마치 타인의 이야기를 하듯 무미건조하게 자신을 one이라고 칭하고 있으며, 이것이 등장할 때에 주인공이 처한 상황이 수동적 포지션임을 볼 수 있다. 결국 그녀는 남성에 의해 자신의 자아와 자기결정권을 빼앗기게 되었고, 그 결과 자아를 잃어버린 여성이 남성의 소유물로써 대체 스스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남성의 소유물로써 주인공에게 내려진 처방은 ‘글쓰기를 금지하는 것’이다. 둘만의 대화에서도 자신의 의견을 묵살당하고 결정권을 빼앗긴 주인공에게 창조와 자아분출의 욕구마저 앗아간다. 그 뒤에 이어지는 말로 ‘......until I am well again.’(24p)이라는 문장을 쓰며 과연 누구의 입장에서 well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여성으로 하여금 목소리와 글쓰기를 빼앗아 가는 것이 다시 건강해지기 위한 처방책인 것이다. 이 처방책은 남편에게서만 나온 것이 아니다. 혈육인 남자형제 역시 동일한 처방을 해주었고, 이 둘은 모두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은 ‘내과의사’이다. 동시에 그들은 주인공이 아프다(sick)는 것을 믿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내과의사’이자 남성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빼앗긴 주인공은 결국 그들의 처방에 따르게 되고 시간이 지날수록 악화되는 모습을 보이지만 남성이자 내과의사인 그들은 가부장적 관습을 따르는 주인공을 향해 ‘나아지고 있다’는 평가를 내린다. 작품 초반의 well again은 정말로 그녀가 나아지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따르고 순응하길 바라던 것이다. 이 장면에서 Kate Chopin의 The Story of an Hour의 내용이 오버랩되었다. 남자의사에 의해 자신의 죽음마저 오역되어야 했던 Louise Mallard처럼, 주인공이 가진 정신적, 심리적 문제를 남성내과의들이 아프지 않다며 주인공의 고통을 자신들의 방식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인공이 자신의 자아를 획득하고 목소리를 내기위해선 용기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여성인 주인공을 저지하고 억압하는 남성존재를 무너뜨리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남편 John이 죽은 이유에 대한 첫 번째 추측은 주인공의 자아 획득을 위한 선행조건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반증하듯 작품의 끝에서, 많고 많은 경우의 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억압하던 존재인 남편의 등을 밟고 넘어서며, 그것도 매번 그 행위를 반복하며 자신이 갇혀있던 방(소유물로써의 존재)에서 바깥(사회)으로 스스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사건의 기폭제가 된 것이 제목인 누런 벽지이다. 하지만 그 벽지를 마주하기도 전에 ‘어떠한 사건’을 맞이하게 될 것임을 암시한다. 23페이지에서 집에 대한 묘사와 자신들의 형편으론 이런 집을 구하기 힘들 것임을 말하면서 필시 이곳에 Something queer한 존재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데, 이러한 예상에 걸맞게 주인공은 점점 미쳐가며 끝에는 벽지 속에 존재하는 ‘이상한 존재(something queer)’들과 하나가 된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 이상한 존재들과 하나가 되어 미쳐버리고 나서야, 자신의 목소리를 되찾고 자기결정권을 손에 넣었다는 점이다. 여기서 현대의 시선보다 당시 시대적 배경의 시선을 빌려와야한다. 이 글의 작가인 Charlotte Gilman을 비롯한 1세대 페미니스트들은 결혼 못한 노처녀, 열등감에 시달리는 존재, 자신들의 추함을 참정권을 통해 해소하고자 하는 여자정도로 치부되었다. 현대의 극단적 페미니스트들, 특히 한국에서 메갈이라고 불리는 페미니즘 열풍과 똑같은 모습을 보인다. 작품이 써진 1892년에도, 2017년인 현재에도 여성 스스로 자아를 주장하고 목소리를 내는 행위를 보며 남성들은 페미니스트들에게 괴이한 것, 추한 것, 괴물, 악녀, 창녀라는 라벨링을 하고 여성으로 하여금 남성들의 요구에 자신들을 끼워 맞추도록 사회적 코르셋을 강조하며 그것이 옳고 바른 것이라고 주장한다. 한국여성이 하는 페미니즘은 진정한 페미니즘이 아니라는 헛소리가 여기서 기인된다. 현대에서의 사회적 코르셋이 작품에서는 ‘치료’로 바뀐다. 주인공은 이 처방에 따라 가부장제에 대한 의문을 제거하고 오염된 생각을 ‘치료’ 해야 한다. 결국 그것을 거부하고 혼란을 느낀 주인공은 ‘남성의 시선’으로 보았을 때 미친 사람이 된다. 괴이한 행동을 하며 벽지를 뜯고, 종국엔 사지 멀쩡한 남편을 기절하게까지 만든다. 통상적으로는 이 부분이 작가 자신의 치료 경험담을 쓴 것이지만, 상징적인 의미를 더하면 차별주의자 남성들이 보았을 때 자아를 추구하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여성, 특히 페미니스트들은 Something queer한 존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주인공이 벽지를 뜯고 바닥을 기는 행동을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스스로 선택하고 글을 쓰는 것으로 치환해보자. 그 당시 남성들이 페미니스트들을 비난했던 것과 동일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여성인 주인공이 가진 문제는 내면적이고 정신적이다. 자신이 가진 의문을 해소하고 분노를 해결해야한다. 그러나 남성이 보고 이해하는 것은 육체이며 겉모습일 뿐이다. 달을 가리켰더니 손끝을 본다는 말처럼 남편으로 대변되는 차별주의자 남성들은 페미니스트들이 주장하는 것이 무엇이며, 그들이 가진 문제가 무엇인지를 이해하고자 노력하지 않는다. 42페이지에서 문을 가지고 서로 씨름하는 장면에서 갈등이 극에 달한다. 주인공은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key)을 명확하게 알려주고 그것을 찾아오라 말한다. 허나 남성이 행동하는 것은 도끼로 문을 부수고자 시도하는 것(violence)이다. 문은 마음을 상징한다. 작중 내내 여성의 의견을 들어보지도, 선택권을 주지도 않고 강압적으로 행동하며 ‘내가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한 것이다’라고 합리화하는 남편에 대해 직접적으로 고발하는 부분이다. 처음에도, 그리고 마지막에도 남편은 아내의 마음을 들어보려 하지 않았고, 종국엔 닫힌 마음을 열기 위해 아내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폭력적인 방법을 시도한다.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한 남편이 울부짖자 주인공은 다시 한 번 방법을 알려준다. 아내의 말을 따르나 싶었던 남편은 겨우 열린 문에다 뭐가 문제냐며 욕설 섞인 불만을 토해낸다. 이러한 남편을 본 여성들, 주인공과 벽지 속에 갇혔던 one들은 더 이상 타협이 아닌 심판을 한다. 기절한 남편의 등을 밟고 넘어서며 ‘네가 막았어도 내 스스로 나왔어!’라며 남성의 위에 군림하는 주체적 존재로서의 여성이 된다.


2-2. 가스라이팅과 전통적 관습 탈피의 시선

 2-2에서 다루는 시선은 지극히 현대적이다. 그럼에도 이것을 택한 것은 마치 이 두 개의 것들이 이 소설로 인해 발견되고 이론으로 정립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작품 내내 발견할 수 있었다. 가스라이팅은 「연극 가스등에서 시작된 것으로 상황을 조작하여 상대방으로 하여금 판단력을 흐려지게 해 상대방의 자아를 혼란스럽게 하고 자신의 영향력을 강화하는 행위이다.」(출처 위키백과) 연극에서는 불빛의 밝기를 가지고 아내를 타박하는 장면이 나왔고, 비난적인 요소가 강하지만 The Yellow Wallpaper에서는 ‘아내를 향한 자신의 사랑과 헌신’을 강조하며 그 노력을 무시하고 몰라준다며 아내를 세뇌한다. 연극이 폭력, 혐오적 여성혐오라면 소설은 숭배적 여성혐오의 모습을 보여준다. 주인공은 소설 내내, 심지어 작품 후반에서는 명확하게 소통의 의사를 보여줌에도 불구하고 남편이 내뱉는 말은 ‘What is the matter?'일 뿐이다.

 작품에서 많이 등장하는 표현은 당연 love이다. 남편은 나를 사랑한다, 보살펴준다 부터 남편의 입에서 나오는 사랑의 표현까지. 그럼에도 독자들은 이를 보며 이질감을 느끼게 된다. 남편의 행동을 보며 의문을 느끼지만 그 의문을 잠재우려 남편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주인공의 모습 때문이다. 남편의 사랑을 받기만 하고 그것을 의심하는 것은 그들의 관점에서 ‘악녀’다. 그들이 주장하는 ‘성녀’는 남편의 사랑과 마음에 신경 쓰지 않고 남편을 숭배하며 모시고 사랑하는 것이 여성의 역할이다. 그러나 주인공은 다르다. 일방적이나 남편의 사랑을 받고 있으며 그것을 의심한다. 또한 남편의 결정과 처방을 ‘아마도, 아마도.’라며 몇 번이나 의구심을 가진다. 직설적이진 못하지만 자신이 가진 문제가 정신적임을 말하기 위해 남편이 내과의사이기 때문에 자신이 빨리 낫질 못할 것이라고 밝히기까지 한다. 이어서 주인공은 남편과 시누이의 감시와 처방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금지시켰던 ‘글쓰기’를 멈추지 않는다. 명백한 남성주의사회에 대한 저항이다. 그런 주인공을 남편은 little girl, darling 정도로 부르며 자신의 아래에 존재한다고 여긴다.

 주인공이 철저하게 남성사회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서 이들이 요구하는 남성중심사회의 일원으로서의 여성이 과연 올바른 것인가? 여성에게 있어 이것이 행복이라 말할 수 있는가?에 대해 자신의 주장을 던진다. 그 요구를 수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남성들이 주장하는 ‘다시 나아질 거야.’가 아닌, 더더욱 미쳐가고 종국엔 환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여성을 보며 이것이 단순하게 한 여성만의 일이 맞는지에 대한 의구심을 심어준다. 또한 여성의 각성과 동시에 전통적 관습에서의 여성적 행동과 남성적 행동이 뒤바뀐다. 황당한 상황을 보며 ‘남자씩이나 되어서는 기절이나 해버리는’ 남편과 ‘괴이한 행동과 거침없이 자신의 주장을 펼쳐내는’ 주인공. 기절을 여성의 미덕이라 치부했던 서양 가부장제를 비꼬며 전통적 고정관념을 무너뜨린다. 서구관념의 토대라 할 수 있는 성경에서 그렇게나 비난하는 여성상위(여성우월)가 등장하며 의도적으로 남성의 위에 올라서는 모습으로 글을 마무리한다. 매번 남편이 그랬던 것처럼 주인공 또한 매번 남편을 넘어 자아를 갈망한다.


3. 결론

 작품을 통해 작가가 고발하는 것은 소통의 부재이다. 남편이 단 한번이라도 주인공과 소통을 하였더라면, 주인공의 의견을 존중했다면 결말은 달라졌을 것이다. 작가 자신의 자전적인 내용을 토대로 쓴 것인 만큼, 그들은 다른 존재였고 결코 타협할 수 없었다. 남편의 선택은 주인공으로 하여금 2-2의 문제를 겪게 하였고 결국 주인공이 2-1의 행동을 통해 자아를 찾는 행동을 초래하였다. 이때까지 한 것 중, 주인공이 자기 자신의 의지에 의해 스스로 이루어 낸 것이 얼마나 되는가? 벽지를 뜯는 행위와 숨어서라도 글을 쓰는 것, 겨우 그것뿐이다. 그리고 그 두 가지가 주인공으로 하여금 자아를 쟁취하고 자유를 얻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 작가는 작품을 통해 독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목소리를 잃지 말 것(글쓰기)과 남들이 보았을 때 괴이하다 비난받는 행동(벽지를 뜯는 행위)을 두려워하지 말 것을 주장한다.


#누런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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