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했던 어린 시절을 여전히 소소하게 위로하며 사는 삶.
삼겹살, 짜장면, 피자
이 세 가지 음식의 특징은 무엇일까?
중학교 1학년때까지 나는 이 세 가지 음식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1) 교회에서 달란트시장을 할 때 먹을 수 있는 음식, 집에서는 절대 먹을 수 없는 음식.
2) 3개월에 한 번 먹으면 많이 먹는 음식.
3) 생일이나 졸업식 같은 성대한 행사가 있는 날에만 먹을 수 있는 음식.
맛 좋은 음식들이 넘치다 못해 차고 흐르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저 음식들을 저렇게 정의하는 삶이 과연 존재하기나 할까 싶겠지만 이것은 거짓말을 조금도 보태지 않은 백 프로 사실이다.
어린 시절은 가난해서 불편했던 기억이 지배적이다. 불편하다는 단어를 사용한 이유는 그 당시 가난이 나를 불행하게 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상대적 박탈감을 가속화시키는 소셜미디어의 발달이 지금처럼 활달하지 않았고, 과분할 만 큼 주변 사람들의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았기에 나는 크게 모나지 않게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가난한 나의 형편이 불행하다고 느낄 때가 딱 한 순간(그 한순간은 모든 순간일지도) 있었는데, 바로 먹고 싶은 음식을 마음껏 먹지 못할 때였다.
학교에서 주변 친구들은 심심치 않게 자신이 먹은 맛있는 음식을 자랑하곤 했다.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내 머릿속에 입력되어 본 적 없는 메뉴도 있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참 신기하고 부러웠다. 어느 날에는 내가 듣고 있는 말이 내 현실과 너무 괴리가 커서 혼자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진심으로 망상에 빠진 적도 있었다. 그만큼 먹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먹지 못하는 일이 어린 나에게는 매우 중대한 사항이었다.
그 밖에
1) 초등학교 선배가 전교회장에 출마하면 제발 당선 공약으로 피자나 짜장면이 나오기를 진심으로 빌었다.
2)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양계장이 있었는데 양계장에서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곳에 있는 닭을 모조리 튀겨 먹으면 매일 치킨을 먹을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3) 친구들이 먹보라고 놀려서 한동안 치킨을 별로 안 좋아하는 척을 하던 중 우연히 찾아온 치킨 파티 때 자존심을 굽히지 않고 결국 치킨을 먹지 못했는데, 이후 집에 돌아가는 길에 혼자 펑펑 울었다.
이런 스토리들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하지만 현실은 무척이나 나에게 퍽퍽했다. 당시 아버지는 매일 술에 찌들어 있었고 어머니는 두 아들을 길러야 하는 무거운 삶의 무게를 매일 감당하기 불가능할 수준으로 짊어지고 있었다. 이런 삶은 어린 나를 일찍 철들게 했다. 위태로운 형편을 스스로 타개하기엔 나는 어리고 무능했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 무엇일까 생각하던 중 엄마의 짐을 덜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두부가 좋다고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엄마가 오늘 무엇을 먹고 싶냐고 물어볼 때마다
두부가 먹고 싶다고 말했다.
엄마는 내가 성장기에 단백질을 많이 섭취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걱정이 많았다(커서 들었다). 형편이 어려웠지만 가능한 대로 최대한 나의 성장기를 위해 힘쓰셔야 했던 엄마는 내가 두부를 좋아한다는 것을 무척 반가워하셨다. 콩에는 양질의 단백질이 있었고, 무엇보다 가격이 매우 저렴했기 때문이다. 아니구나. 커서 다시 생각해 보니 그게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사달라고 할 때마다 사줄 수 있는 것이라 그랬던 것 같다. 아무튼 정확한 시기는 기억나지 않지만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집에서 두부를 정말 많이 먹기 시작했다. 아마 내가 먹고 싶다고 말하기 시작했을 때부터였을 것이다..
2일이나 3일 단위로 오후 5시쯤이 되면 동네 어딘가에서 두부를 파는 트럭 소리가 들렸다. 학교를 마치고 청소일을 끝내고 퇴근하는 엄마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다 보면 어떤 날에는 집에서 한참 떨어져 있는 동네에서 두부장수 아저씨가 동네 아주머니와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다. 또 어떤 날에는 집 바로 옆 도로에서 큰 확성기로 두부 팝니다, 두부 팔아요 음성을 틀어놓고 계셨다. 두부장수 아저씨는 단골손님인 우리 집 근처를 항상 지나가주셨고 시간이 어긋나 트럭이 길 건너편에 있는 날에는 엄마와 함께 두 손을 번쩍 들고 집 앞으로 와달라고 소리치며 두부장수 아저씨를 맞이하기도 했다.
트럭 뒤편에 실려있는 두부는 김이 모락모락 나고 통통해 보였다. 정말 희미한 기억이지만 두부장수 아저씨는 원래 양보다 항상 더 많이 두부를 잘라주셨다. 어린 나를 생각해 주셨던 것 같다. 처음에는 별 생각이 없었지만 반가운 두부장수 아저씨와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두부, 두부를 사들고 집에 돌아가는 길이 좋아져서 점점 두부를 좋아하게 되었다.
1년에 몇 번 먹을까 말까 한 짜장면, 피자, 치킨을 먹지 못해도 불행하지 않을 만큼 말이다.
오늘은 된장찌개를 먹을지 두부구이를 먹을지 두부조림을 먹을지 엄마와 함께 고민하며 키득거리던 순간도 좋았다. 비록 내 선택의 열에 아홉은 두부조림이었다. 짭조름한 간장베이스에 졸여진 두부, 그 위에 얹혀있는 양파와 고춧가루는 완전히 나의 밥도둑이었다. 두부조림이 나오는 날에는 항상 밥을 두 그릇씩 먹었다.
신기한 것은 한 가지 음식을 자주 먹으면 질리거나 물리기 마련인데, 두부는 이상하게 물리지 않았다. 매일 먹어도 진심으로 괜찮았고, 처음에는 두부가 좋다고 고의적으로 말했으나 금세 두부 자체가 너무너무 좋아졌다. 나는 어쩌면 정말 가성비 좋은 아들이 아니었을까...?(아닙니다)
30대가 되었다. 먹고 싶은 음식이 정말 많고, 먹고 싶을 때마다 언제든 먹을 수 있는 형편이 되었다. 음식 자체가 나한테 어떠한 간절함이나 절박함을 주지 않는다는 의미다. 그러나 여전히 그 어떤 음식보다 엄마의 두부조림이 제일 좋다. 진심으로. 결혼 후 아직도 종종 집에 들러서 엄마의 두부조림을 먹고 있노라면 비록 맛은 많이 변했지만 아들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엄마의 손길과 엄마의 짐을 조금이라도 덜을 수 있어서 속으로 안심했던 어린 시절의 내 모습이 한데 겹친다. 희미한 기억과 기억나지 않는 모든 지난날들이 한테 모여 몸 한쪽을 저릿저릿하게 한다. 비록 불편하고 힘들었지만 그 모든 기억들은 찬란하게 내 머릿속을 헤집는다. 그렇게 나의 시간은 잠시 멈춘 채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휩쓸려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