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보다 먼저 사람을 생각한다는 것에 대하여.
직장에 출근하기 위해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가던 중, 건너편에서 한 할머니가 막 출발하려는 버스를 잡기 위해 우산을 들고 달려가는 모습을 보았다. 분명 버스 바로 앞까지 다다르셨는데, 버스는 마치 그 할머니를 보지 못한 것처럼 쌩 하고 가버렸다. 마치 한 번 문을 닫았으니 두 번은 불가능하다는 규칙이라도 있는 것처럼 말이다.
버스를 눈앞에서 놓친 할머니는 우산을 접고 건너편 정류장 의자에 앉아 거친 숨을 고르며 한동안 멍하니 계셨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나는 버스기사가 너무 매정하다고 느꼈다. 사이드미러로 분명 할머니가 버스를 향해 거의 다 달려오시는 걸 봤을 텐데, 뭐가 그렇게 급했는지 궁금하고 안타까웠다. 숨을 고르고 계신 할머니를 향해 쨍하게 내리쬐는 태양빛이 그날따라 유독 야속하게 느껴졌다.
한편으로는 ‘내가 지금 버스기사를 정말 악랄하고 비열한 사람이라고까지 생각하는 걸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스스로에게 조용히 물어보니,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어쩌면 그는 지금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서 가장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가장 깊은 피로감을 느끼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사실 알고 있었다. 그가 할머니를 보고도 어쩔 수 없이 가버려야 했던, 내면의 탈진과 번거로움에 대한 염증 같은 감정을 말이다. (물론, 아주 잠깐 있었던 해프닝을 과잉 해석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사람은 일을 하다 보면, 일보다 사람이 먼저라는 사실을 참 쉽게 잊는다. 특히 사람을 직접 대하는 일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사람과 점점 멀어지는 경우도 종종 본다. 이해가 간다. 요즘은 상생의 소중함을 배우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오히려 상생을 추구하다가 내가 생존하지 못할 것 같은 불안은 점점 더 커져간다. 용기를 내어 손을 내밀었는데, 따뜻한 반응보다는 냉소적이고 실망스러운 반응이 돌아오는 경우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물론 이를 구조적인 문제라고 거창하게 말하고 싶지는 않다.) 이 세상에서 잘 살아가기 위한 노하우는 점점 편향되어 가고, 나 중심으로 철저히 왜곡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라고 자유로운가. 사람들, 특히 학생들을 만나는 직업을 가진 나 역시 사람을 대하며 돈을 벌고 있지만, 어떤 날은 그 누구도 나에게 아는 척하지 않았으면 하는, 사람 자체에 대한 피로감이 고개를 들곤 한다. 매일같이 밀려오는 육체적·정신적 피로 속에서, 주변에서 나에게 손을 잡아달라는 요청을 애써 외면하게 된다. 그리고 그 외면을 정당화하기 위한 스스로의 당위를 만들어 자위하곤 한다.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리며, 찝찝하고 민망했던 그날의 이기심을 세월 속에 묻어두려 한다. 그렇게 비열하게 내 자아를 유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바꿀 수 없는 것일까? 용기와 체력이 많이 필요한 일이긴 하지만, 스스로를 조금은 특별한 존재라고 믿고 타인에게 손을 내밀어보는 일도 분명 가능하지 않을까. 모두가 쉽게 할 수 없는 일이라면, 내가 먼저 나서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 끝에, 이 삭막한 세상에 아주 작은 균열 하나라도 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생겼다.
버스기사도 가엾었고, 건너편에서 멍하니 앉아 계시던 할머니는 그보다 훨씬 더 안쓰러웠다. 그렇게 마음이 허해진 채로 건너편 할머니를 바라보던 그 순간, 내 옆으로 한 할머니가 다가오셨다. 그리고 치과 가는 길을 물으셨다. 나는 건너편 할머니를 보며 느낀 속상함과 헛헛함을 달래고 싶은 마음으로, 그 어느 때보다도 친절하게 길을 설명해 드렸다. 내가 착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내가 살아가는 이유에 커다란 구멍이 생길 것 같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