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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원 Aug 09. 2021

다시 쓰는_눈의 여왕_2021_브런치×저작권위원회


 이 이야기는 외딴 시골의 작은 마을에서 시작된다. 마을은 동쪽에서 흐르는 차가운 강과 서쪽에서 흐르는 따뜻한 강이 만나 섞이는 곳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동쪽과 서쪽의 물이 뒤엉켜 마을을 가로질렀다. 마을 사람들은 기름진 땅에 농사를 짓고 살았다. 강은 온화하고 풍요로워 마을은 외부 세상과 교류할 필요를 몰랐다. 이 마을 사람들은 모두가 강에 의지하여 소박하게 살았다.


 강가에 쌓은 둑 너머로 나지막하게 하얗고 노란 집들이 서 있고 한 블록 안쪽으로 들어서면 대천사 미카엘의 이름을 딴 보육원의 지붕이 보였다. 보육원의 정원에는 장미 나무가 가득했다. 새빨간 장미는 덩굴을 이루고 거대한 아치를 이루어 짙은 그늘을 만들었다. 멀리서 보면 거대한 붉은 섬처럼 보였다  


 보육원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천장까지 쌓인 책들이 방문객들을 반겼다. 누구라도 이곳은 도서관이 아닌가 생각할 만큼 보육원에는 많은 책이 쌓여 있었다. 원장이 무슨 생각으로 어디에서 그 많은 책들을 가지고 오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 독특한 보육원에 카이와 게르다가 살고 있었다. 두 명의 가난하고 작은 아이들은 남매는 아니었지만 남매처럼 서로를 아꼈다. 둘은 마치 한 몸처럼 늘 붙어 다녔다. 어린아이들은 뛰어노느라 책을 거들떠도 보지 않았지만 카이는 책을 유난히 좋아했다. 카이는 겨우 아홉 살이었지만 아침이 올 때까지 책을 읽곤 했다. 카이 말로는 책 속에는 영원한 것들이 들어있다고 했다. 게르다는 영원이 무엇인지 몰랐지만 그저 카이의 곁에 있고 싶었기 때문에 곁에 있었다. 게르다는 책을 보는 카이의 옆모습을 좋아했다. “카이는 확실히 똑똑해, 책을 많이 봐서 그런지 모르는 게 없단 말이야.”사람들은 말했다.




 이듬해에는 큰 홍수가 났다. 비는 일주일이 넘도록 내렸다. 마을을 가로지르는 강은 순식간에 몸집이 불어났고 사납게 마을을 덮쳤다. 그 해에 마을의 집들은 대부분 쓰러졌고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책을 모으던 원장과 보육원의 아이들, 마을의 선량한 사람들 절반 이상이 물에 휩쓸려 사라졌다. 흙탕물 속에서 카이와 게르다는 서로를 붙잡고 무작정 땅을 향해 걸었다. 다행히 두 아이는 살아남았지만 이후로는 모든 것이 달라졌다. 아이들은 새로운 보육원에서 살게 되었지만 그곳은 삭막했다. 원장은 폭력적이었고 건물 안에 책 같은 건 한 권도 없었다. 카이는 몹시 실망했다. 더 이상 카이는 예전의 친절하고 상냥한 아이가 아니었다. 그렇게 아끼던 게르다에게도 차갑게 대했다.


 게르다는 성가 하나를 배웠는데 거기에 미카엘 보육원의 아름다운 정원을 떠오르게 하는 가사가 한 줄 있었다. 게르다는 카이에게 그 노래를 불러 주었다. “장미꽃이 달콤한 계곡에, 틀림없이 예수의 아이가 있을지니… “ 그러자 카이는 쌀쌀맞게 말했다. “정신 차려, 장미꽃 같은 건 이제 우리한테 없어.”






 카이와 게르다는 열아홉 살이 되어 보육원을 떠나게 되었다. 빈털터리로 쫓겨난 것과 다름없었지만 그곳에 정 붙일 곳이 없었기에 게르다는 기분이 홀가분했다. 게르다와 카이는 보육원에서 멀리 떨어진 작은 마을에 정착했다. 그곳에도 작은 강이 있었다. 서쪽 강에서 흘러나온 지류였다. 게르다는 강물에 두 발을 담그는 걸 좋아했다. 그러면 어릴 때 강물에서 놀던 행복한 기억이 떠올랐다.


  게르다는 마을에 취직했다. 말수가 적고 성실한 게르다는 곧 마을 사람들의 호감을 얻었다. 카이는 주로 집에서 골똘한 생각에 빠져서 지냈다. 사람들은 카이와 게르다를 부부로 생각했다. 게르다는 카이와 둘이서 사는 것이 좋았다. 그해 겨울 카이가 떠나기 전까지, 게르다는 모든 것이 좋았다.





 카이가 떠난 날에는 눈폭풍이 내렸다. 게르다는 이른 아침부터 깨어나 창밖을 보는 카이가 불안했다. "정말 이상한 날씨야 그렇지?"

 카이는 대답 대신 이렇게 말했다.  "게르다, 나 눈의 여왕을 만난 적 있어. 그때 우리 마을이 물에 잠기기 전에 말이야." 게르다는 눈의 여왕에 대해 들어서 알고 있었다. 눈의 여왕을 만난 특별한 아이들은 자라면 그녀의 썰매를 타고 여행을 떠난다고 했다. 사람들은 그것을 일컬어 시간 여행이라고도, 세상의 끝으로 떠나는 여행이라고도 했는데 어쨌거나 여행에서 다시 돌아온 사람은 없다고 했다. 게르다는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게르다는 저주라고 생각했다. 카이가 책을 너무 많이 봐서 눈의 여왕에게 저주를 받은 거야.






 냉장고에서 얼음을 꺼내어 뒤를 돌았을 때.. 게르다의 코 앞에 카이가 서 있었다. "카이, 돌아왔구나." 카이는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방금 나갔다 들어온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식탁 의자에 앉았다.


 "게르다! 내가 조금 전에 뭘 봤는지 알아? 우주의 시작을 봤어! 상상할 수 있겠어? 말도 안 돼,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엄청났어, 너무 두렵고 아름다워서 계속 눈물이 났어. 진짜 끝내줬어 게르다, 내 꿈이 이루어진 것 같아!”  


 게르다는 떠들어 대는 카이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카이의 얼굴은 헤어질 때 모습 그대로였다. 검은 폴라티에 청바지, 입고 있는 옷까지도 게르다의 기억 속 그대로였다.

"카이, 정말 시간여행이라도 하고 있는 거야?" 게르다가 묻자 카이는 환하게 웃었다. 이건 기억과 달랐다. 게르다와 함께 살던 시절의 카이는 늘 찌푸리고 어두운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자랑스럽게 끄덕이는 카이의 눈이 반짝거렸다. 게르다는 시간여행이란 건 시간이 멈추는 것 같은 걸까? 생각했다. 그렇다면 바로 지금인데.


 "시간여행을 끝없이 하진 않을 테고,, 어때?"

"사실 대부분은 책을 봐. 도서관에 떨어지거든. 공간적으로 과거나 미래 사이의 쉬는 시간 같은 거지." 카이는 도서관에 있거나, 아니면 과거나 미래에 있다. 게르다는 노트에 그 문장을 적었고 후에도 여러 번 소리 내어 었다. 그리고 나는 현재에 있다. 나는 현재에......


"시간이 많이 흘렀어."게르다가 말했다.

"그래? 나는 모르겠어. 여행을 시작한 게 어제처럼 느껴져, 너는 그대로인걸? 나는 시간의 흐름에서 자유로워. 잠도 자지 않아. 이런 일이 가능하다는 게 정말 신기해! 눈의 여왕은 나에게 시간 속에서 '영원'을 찾으라고 했어."


 카이는 말을 이었다.

"내가 알고 싶던 모든 걸 직접 볼 수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아. 게르다, 그런데 내가 그것들을 다 이해할 수 있을까? 내가 보는 것들의 의미를 내가 다…"

 

 그 말을 끝으로 카이는 사라졌다. 무지개가 사라지는 것처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게르다는 놀랐지만 침착하게 상황을 이해했다. 환영을 본 것이라기엔 빵에는 카이가 베어 문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카이는 정말로 시간 여행자가 된 건가 봐. 게르다는 빵에 찍힌 자국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그때 누군가 게르다의 옷자락을 잡았다. 미아였다.


 게르다는 카이에게 딸이 태어났다는 얘기를 하지 못했다. 자신에게도 아빠가 있다는 것을 알면 미아는 좋아할까? 아빠는 시간 여행자이고 그래서 언제 어떻게 만날 수 있는지 알 수 없다고 하면 미아는 울까? '카이, 스무 살에 네가 떠났는데 나는 지금 스물아홉이 되었어.'





 카이의 시간은 멈추었지만 게르다의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사업차 마을에 들렀던 부유한 남자가 게르다의 가게에 자주 나타났다. 남자는 게르다를 마음에 들어 했다. 게르다는 별 말이 없었지만 남자가 싫지는 않았다. 몇 년 뒤 남자는 황금색의 마차에 게르다와 미아를 태우고 마을을 떠났다.


 게르다는 마을을 떠나면서 노래를 불렀다. "“장미꽃이 달콤한 계곡에, 틀림없이 예수의 아이가 있을지니… “ 남자는 "아름다운 노래로군"이라고 말했다.

 황금마차에서 미아가 귓속말로 물었다. "엄마, 저 남자가 아빠예요?" "아빠 이름은 카이야. 너를 낳기 전에 여행을 떠났는데 아직 돌아오지 못하셨단다."


 또 몇 년이 지나서 게르다는 미아와 둘이서 카이와 살던 마을로 돌아왔다. 마을 사람들이 남자는 어떻게 되었냐고 묻자 게르다는 "떠났어요"라고 간단히 말했다.

 게르다는 마을 도서관에 일자리를 얻었다. 그곳에서 게르다는 어렸을 때 카이가 읽던 책들의 제목을 찾아보았다. 카이가 읽을 것 같은 책을 골라 읽기 시작했다.  


 어느 날 게르다는 책에서 시간 여행자들에 대한 글을 었다. 책에 의하면 시간 여행자들은 눈의 여왕이 낸 문제를 풀어야 놓여진다고 쓰여 있었다. 그 문제를 풀면 비로소 자기 삶의 주인공이 되고, 세상을 가질 수 있게 된다고 했다. 게르다는 카이를 데려간 눈의 여왕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게르다는 카이가 자꾸만 도서관으로 돌아온다고 한 말을 기억했다. 게르다는 언젠가는 자신이 있는 도서관에도 카이가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로부터 게르다는 카이가 읽을 만한 책에 작은 표시를 하기 시작했다. 첫 장에 눈에 잘 띄지 않을 정도의 작은 장미를 그려 넣었다. 


 



 게르다가 마흔다섯 살이 되던 봄에 다시 카이가 찾아왔다. 게르다는 젖은 앞치마를 재빨리 벗고 카이를 안아 주었다. "...방금 어린 시절의 너를 만났어." 카이가 말했다.

게르다는 문득 기억이 났다. 무서운 원장에게 맨발로 쫓겨나서 숨어있던 날, 나를 도와준 젊은 남자가 카이, 너였구나. "알아, 그날 신발도 담요도 너무 고마웠어." 카이는 게르다의 얼굴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았다. 카이는 이제 말이 별로 없었다. 게르다는 카이가 보는 시간의 두께에 대해서 생각했다. 앳된 카이의 얼굴과 주름진 자신의 얼굴을 생각다. 그러자 부끄러운 기분과 자랑스러운 기분이 동시에 들었다.  




 다음번에 카이가 찾아왔을 때 게르다는 미아와 함께 있었다. 미아는 엄마와 함께 있는 젊은 남자를 수상한 눈으로 훑어보았다. 게르다는 카이에게 미아를 소개했다. "딸이야. 미아는 다음 달에 결혼해. 벌써 서른 살이 되었거든. 남편은 이 마을에서 자란 사람이야.. 아주 착한 친구야." 그때 카이가 갑자기 울기 시작하자 미아는 몹시 놀랐다.

 게르다의 시간처럼 미아의 시간도 빠르게 흘렀다.






  "카이, 내 어린 친구, 어서와." 게르다가 말했다. 게르다는 이제 침대에 누워 있었다. 카이는 하얗게 센 게르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게르다는 카이가 시을 잘 맞추어 왔다고 생각했다. 방금 가족들이 다녀간 후였가 지 이었다.

이번에는 카이가 좀 더 오래 머물렀기 때문에 카이와 게르다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들은 시간이 너무 빠르게 흘 너무 많은 일이 한꺼번에 일어났다고도 했고, 시간은 언제나 천천히 흘렀다고도 했고, 이제는 궁금한 것이 없다고도 했고, 언제나 당신이 어디에 있는지 궁금했다도 했다.


"르다, 돌아오는 방법을 모르겠어. 내가 보는 것들이 무서워. 너를 다시 볼 수 없을까봐 두려..." 카이가 말했다.

"너는 언제든지 나를 볼 수 있잖아." 게르다는 웃었다.

"젠가 눈의 여왕이 말한 영원을 찾으면 우리에게 돌아와, 함께 살면서 너는 시간을 여행하는 법을 알려주고 나는 살아가는 법을 알려주는거야."


 헝클어진 머리를 감싸 쥐고 우는 카이의 손 위에 게르다는 가만히 자신의 손을 얹었다. 게르다는 노래를 불렀다.  "장미꽃이 달콤한 계곡에, 틀림없이 예수의 아이가 있을지니… “ 번에는 드디어 게르다가 먼저 사라질 차례였다.







 어느 해에 게르다가 사는 마을로부터 18,000km 떨어진 곳, 그러니까 거의 지구 반대편 한 마을 도서관의 사서는 책을 정리하던 중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바로 책 첫 장에 작은 장미 문양이 그려진 책들이었다. '누가 이 많은 책들을 다 읽었을까?' 사서는 도서관 계정에 장미 그림 사진을 올렸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사진이 퍼져 나가며 그런 책을 봤다는 사람들이 속속 나타난 것이다. 장미 그림은 거의 전 세계에 흩어져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겼을까요? 누군가의 장난일까요? 무슨 의미일까요? 사람들은 한동안 이 미스터리 한 사건에 흥분했다가 곧 잊고 말았다.



  릴리는 장미꽃이 만발한 정원에 앉아 있었다. 붉은 아치를 이룬 장미꽃 그늘은 서늘했다. 릴리는 이 정원을 가꾼 게르다를 생각하고 있었다.

 게르다가 세상을 떠나던 날 릴리는 꿈을 꾸었다. 릴리는 우주가 시작되는 장면을 보고, 바다의 밑바닥을 걷고, 하얗게 피어나는 눈꽃의 회오리 속에 서 있었다. 자신의 떨리는 손 위에 누군가가 가만히 손을 포개었다. 온몸에 퍼지는 따스한 온기를 느끼며 눈을 떴을 때 릴리는 베개가 눈물로 흠뻑 젖어있는 것을 알았다.

 "사내아이입니다" 의사는 말했다. 릴리는 새로운 아이의 이름을 카이라고 짓기로 했다. 릴리아직 납작한 배를 어루만지며 할머니와 어머니가 부르던 노래를 불렀다. “장미꽃이 달콤한 계곡에, 틀림없이 예수의 아이가 있을지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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