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일을 겪어도 삶은 계속되니까
데버라 리비, <살림 비용>
내 친구 A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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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삶은 정말 이게 다일까? 하는 생각을 종종 했어. 적당한 시기에 결혼하고 적당한 때에 아이 둘을 낳고 4인 가족의 아내이자 엄마라는 안정적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하루하루를 정신없이 살면서.
지금의 삶을 미워하는 건 아니지만 다른 삶이 있을 것 같단 갈증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더라. 이렇게나 기진하게 삶을 소진하면서도 어딘가 허전한 느낌이 들다니. 자꾸만 나를 어디에 두고 온 것 같은 불안증이 나다니. 내 인생에 내가 주인공이 아니라는 불길한 기분을, 혹시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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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를 시작한 지 일주일이 채 못되었지만 벌써 난관이야. 몇 번이나 원고를 쓰레기통에 넣었어. 뭔가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그 무엇이 보일 듯 말듯한 이 미묘한 시간. 기한이 끝나가지만 조금만 더 깊이 생각을 하고 싶었어. 큰아이가 하원하기까지 주어진 시간은 한 시간, 지금 승부를 볼 수 있을까. 작은 아이는 인형놀이에 빠져있으니까 할 수 있을 거야, 생각하는 찰나 작은 아이가 오뇨뇨뇨를 찾아달라고 대성통곡 하기 시작하더라.
아이가 아끼는 작은 토끼 인형인 오뇨뇨뇨를 찾으려 온 집을 뒤졌어. 인형이 없다고 저렇게까지 우는 아이는 귀엽고 사랑스럽지만 온 집안을 뒤지느라 너무 더웠어. 화가 났지. 토끼를 찾느라 내게 있던 시간 절반이 날아가버렸으니까. 그거라도 건져야 할까, 아 저녁 준비를 아직 못했다. 오늘은 저녁을 뭘... 이럴 때 말이야.
내 커리어에, 내 자아에, 내 삶에 정말 너무 중요한 생각이나 결정조차도 없어진 토끼 인형이나 저녁밥보다는 중요하지 않아.
그게 내가 느끼는 불길함이야. 아이를 방치하는 엄마라는 죄책감을 피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주인공 자리를 내놓지만 그것에 또 죄책감을 느끼는 나라는 인간에게 애도를 표하는 바야. 그럴 때 필요한 책이 있다면, 바로 이 책일 거야.
"주역들을 그보다 비중이 작은 배역으로 격하시키지 않으면서도 끝끝내 지속하는 사랑에 대한 오랜 내 갈망, 이 갈망의 상실을 나는 평생 애도할 거다." (1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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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 봐. 중년을 넘긴 여자가 20년간의 결혼 생활을 정리했어. 그는 자신의 결혼 생활을 가라앉고 있는 보트라고 표현하더라. 돌아가면 익사할 것이 명백하기에 돌아갈 수 없다고.
아이 둘을 데리고 살던 집을 떠나 언덕 위의 작은 아파트를 거쳐 이웃의 헛간에 얹혀살면서 그가 무엇을 한 줄 알아? 자기 자신에 대한 글을 썼어. 그래 그는 쓰는 사람이었던 거야. 이 책은 그렇게 헛간에서 쓰인 생활 자서전 3부작 중 두 번째 책이야 그리고....
"밤중에 외투를 입고 작은 발코니에 나가 글을 쓰다 보면 먼 별들이 아주 가까이 있다는 착각이 들기도 했다. 지난 삶에서 누렸던, 책으로 빼곡한 서재를 별빛 총총한 겨울 밤하늘과 맞바꾼 셈이었다. 그해 나는 영국의 겨울을 처음으로 만끽했다." (2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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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20년을 살던 사람과 헤어지는 건 어떤 기분일까. 그 삶은 어떻게 달라질까. 지난 10년간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생각은 아니기에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어.
이혼 후의 이야기에 대해서 사실 우리들(=여전히 결혼 중인)은 잘 모르지. 언젠가 "이혼이 볼드모트도 아니고"라는 책의 제목을 본 적 있는데, 그 말이 정말 맞지 않니? '어떤 여성의 이혼'이란 입에 올려서는 안 될, 알아도 아는 척해서는 안 될, 사연을 물어서는 안 될, 상처가 가득한, 어둡고 비극적인 슬픈 일생일대의 사건이라는 생각을 우리는 모두 은연중에 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통쾌하고 위대해. 그게 무슨 모르는 소리?라고 일갈하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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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찾기 위해 자기 이름을 지워버린 사회의 서사와 결별할 때, 그가 맹렬한 자기혐오에, 미칠 것만 같은 고통에, 눈물이 멎지 않는 회한에 빠지리라는 게 사회 통념이다. 이런 것이 여자를 위해 마련된, 그저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 손에 쥘 수 있는 가부장제의 왕관에 박힌 보석들이다. 눈물지을 순간이 넘치는 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아무런 가치도 없는 그 보석들에 손을 뻗느니 검고 푸르스름한 어둠을 두 발로 통과해 지나는 편이 낫다." (161p)
이 책을 한 네 번쯤 읽었어. 줄을 치지 않은 페이지가 없을 만큼 좋은 문장이 빼곡하지만 그중에서도 마음에 콱 박히는 글귀가 하나 있었어.
"엄마가 된 여성들이 배우는 "치명적인 인내심"이 그들 스스로를 해치는 길임을 보부아르가 앞서 바르게 짚어 내기도 했지만 (...) 그가 무슨 뜻으로 그리 말한 건지 나는 안다. 우리의 욕망을 주장하기란 너무나 어렵고, 차라리 그런 욕망들을 조롱하는 게 더 마음 편하기 마련이니까." (90p)
찔렸어. 나도 이 치명적인 인내심을 학습했었거든. 사랑받는 아내가 되기 위해,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 주인공 자리를 내놓고 나의 욕망을 인내하고 또 인내해. 배웠던 대로 그 희생정신이 또 대단한 사랑인 줄 알았지 뭐야. 심지어 그러다 보면 남편의, 아이의 삶이 곧 나 자신의 것처럼 느껴지는 때가 있어. 글은 취미 정도로만 쓰지 뭐. 가족이 더 중요하니까 이 정도면 되지 뭐, 싶어 져. 글쓰기가 내가 나를 인지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한 게 방금 전인데도. 그러고는 또 잠시 후엔 물음표가 미친 듯이 치솟아. 나는 어디에 있지? 나는 어디에 있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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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초반에 강렬하게 등장하는 한 에피소드가 있었어. 저자는 여행지에서 합석하게 된 남녀의 대화를 관찰해. 낯선 여자로 인해 재밋고 싶은 남자와 내키지 않은 젊은 여자를. 여자의 세상에선 자신이 주인공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상상하지 못하는 나이든 남자(빅 실버)와 이것을 바라보는 젊은 여자를. 그러다 남자에게 있던 이야기의 주도권을 여자가 집어오는 순간을. 상대를 위해 기꺼이 입을 다물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여자를. 그러자 원래 말이 많은 편인가 봐요? 라며 불쾌해하는 남자를. 데버라 리비는 그 여자를 보면서 그 여자라면 자신의 독자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대. 왜냐하면.
"이이는 빅 실버가 당연하게 여기는 자유를 동등하게 누리기는커녕, 자유를 누릴 '자기'부터 확보하려 고군분투해야 하는 처지였으니까. 반면에 빅 실버는 자기 자신에 대해 추호의 의심도 거리낌도 품지 않은 사람이지 않은가." (1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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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내가 아는 여자들이 꼭 읽었으면 바라게 되는 책이야. (내 책 다음으로 말이야.) 결혼과 이혼에 대한 통찰뿐이 아니라, 여성으로서의 삶을 생각할 때 사용할 하나의 기준을 제시해 주거든. 우리가 치르고 있는 비용에 대한 거야. The cost of living. 이 책의 원제인데, 살림 비용이라는 생활비나 가계부를 연상시키는 제목보다는 이쪽이 훨씬 나아 보이는 것 같네.
"머릿속이 맑고 명쾌해졌다. (....) 근골이 점차 약해지기 시작한다는 50대에 들어 나는 체력적으로 강해졌다. 기운 없이 지내는 건 선택지가 아니었으므로 늘 기운이 넘쳤다. 아이들을 부양하려면 글을 써야 했고, 힘쓰는 일도 도맡아 해야 했다. 자유는 결코 공짜가 아니다. 자유를 쟁취하고자 분투한 사람 치고 그에 수반하는 비용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2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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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는 비용을 치러야 한다며 성실하고 담담하게 매일의 할 일을 할 뿐인 그를 보는 게 좋았어. 그가 겪는 경제적인 어려움이 누추해 보이지 않았고, 그가 쓸 자유를 얻어 작가로서 얻은 명성이 황금빛으로 보이지도 않았어. 그건 어떤 불행이나 행운으로 해석할 필요 없는 그냥 삶이었거든. 정말이지 삶은 해석 같은 게 중요한 게 아니었어. 우리들은 그야말로 가차 없이 살아내는 거야. 그는 그가 치르는 비용을 정확히 알아냈어. 그리고 도저히 지불할 수 없는, 그럴 수 없는 비용이 있기에 다른 방법을 택한 거지. 그건 볼드모트도 아니고 비극도 아니고 그냥, 삶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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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마지막 문장은 이래.
"당신이 지금 읽고 있는 이 글은 삶의 비용으로 만든 글이며 디지털 잉크로 만들어졌다." (161p)
코가 떨어져 버릴 것 같이 추운 헛간에서 쓴 이 삶 그 자체인 책을 이것보다 적절하게 설명할 문장이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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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지.
우리는 지금 무엇으로 삶의 비용을 치르고 있는 걸까?
나는 생각해 보고 싶어.
그걸 명확히 정리하고 나면 불길한 기분이나 불안증 같은 건 조금 가라앉을 거야. 그러려면 내가 비용으로 도저히 내줄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순서를 정해보는 건 어떨까. 아, 또 할 일을 만드네 내가. 그러고 보면 10년 차인 나도 줄타기를 하며 아주 가차 없이 살아내고 있어. 물론 너도 그렇지. 우리는 가차 없는 여자들이야. 그건 좋은 일이지.
이만 줄일게. 안녕.
* 이 기묘한 당당함에 대해서는 은유 작가의 <다가오는 말들>에서도 본 적이 있지. 53페이지였어. 괴팍함 무뚝뚝함 거침없음이 남성다움의 전유물로 여겨지고, 친절함과 수용성이 여성다움의 책무로 여겨지는 사회에서 자주 보이는 무례함에 은유 작가는 일침을 놓았지.
*이 책은 작고 얇지만 내용은 방대해. 저자는 과거와 현재를 섞는 데 선수거든. 스토리를 따라가는 게 아니라 삶을 따라가서 생활 자서전이라고 부르는걸까? 삶이 뒤죽박죽이듯이 이 책도 그랬어. 그래서 매력이 넘쳐. 외관은 작고 얇아서 귀엽기까지 한데 그 내용은 방대해. 이 책으로 편지 열 통은 거뜬히 쓸 수 있을 정도야. 문맥상 담을 수 없어서 넣어둔 엄청나게 자극적이고 치명적이고 아름다운 문장들이 많으니까 꼭 읽어봐. 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