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혜원 Nov 14. 2022

보송이의 손

어젯밤엔 6시 좀 넘어서 보송이가 벌떡 일어났다. 엄마. 나 바지에 쉬를 했어.

평소랑 다르게 조금 낮고 침착한 목소리. 그렇지만 울음이 터질 것처럼 가는 떨림이 느껴진다. 나 바지 갈아입을게. 내려가서 옷을 벗는다. 침대를 더듬어 보니 이불은 멀쩡하다.




아무렇지 않은 척해야겠다, 그런 생각이 먼저 들었다. 보송이 목소리에 깨기 직전에 그런 꿈을 꾸고 있었다. 외할머니와 엄마와 함께 있는 꿈. 나는 학교 수련회를 왔는데 짐도 못 찾겠고 세수도 못했는데 벌써 날이 밝았었다. 수련회를 온 건데 어쩌다 친구들이 아닌 할머니 옆에서 잠이 들었나 난감했다. 버스 타고 돌아가야 하는데 어떡하지? 울상이 된 나에게 그냥 가족들이랑 간다고 해, 뭐 어때?라고 엄마인지 할머니인지가 말했다. 하긴 뭐, 어때? 싶던 순간에 보송이 목소리가 들렸던 거다. 엄마. 나 바지에 쉬를 했어.


아무렇지 않은 척해야겠다 생각이 들었던 아주 짧은 찰나에 떠올린 건, 꿈속에서 뭐 어때?라는 말이 참 위안이 되었다는 기억이다. 현실이었다면 등짝을 때리면서 얼른 쫒아가라고 했을 텐데 뭐 어때? 라니. 당황했을 보송이한테 바로 그렇게 해야지. 어쩌면 그렇게 하라고 할머니가 서둘러 일러준 건지도 모르지. 네 살에 기저귀 뗀 후로 단 한 번도 실수한 적이 없었던 일곱 살 언니의 작은 실수 앞에 뭐 어때? 하고 넘겨 보이라고 할머니가 말한 것 같다.



욕실 불이 탁 켜졌다. 눈부시다 흐 보송이도 나도 눈을 가늘게 뜨고 웃음이 터진다. 작은 아이의 몸이 더 작게 보였다. 자다가 어 나를 보는 새카만 눈동자가 귀여워서 이마에 쪽 뽀뽀를 해주었다. “오빠한테는 비밀로 해줘.” 보송이가 말한다. 응? 그럼 비밀로 하지. 보송이는 또 이렇게 말했다. “굳이 말할 만한 일은 아니니까.” 아주 복잡한 심경이 느껴지는 목소리다. 응 알지. 걱정 마.  


한 시간 더 자자, 이불을 덮어주니 보송이가 나에게로 굴러온다. 엄마 옆에 착 달라붙어서 금방 새근새근 잠이 들었다.



아침 등원 길을 보송이랑 걸었다. 손을 꼭 잡고 낙엽을 밟으면서 걸었다. 가는 길에 철없이 핀 철쭉 한송이를 보송이가 찾았다. 얘는 겨울에 피는 철쭉인가 봐! 보송이가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러고는 이제 겨울인데 너 어떡하려고 피었니? 하고 물었다. 어젯밤 일은 꿈처럼 지나갔을까? 보송이의 작은 손을 잡고 사진을 찍어 두었다.  이 손이 매번 우물에 빠진 나를 길어 올린다.


매거진의 이전글 실내화 가방 던지기 마스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