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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셉 Mar 11. 2024

받는 사람 없는 편지

요즘은 작업하기 전에 이니셔티브 레터를 쓰고 있다.


납품 대상이 되는 글은 아닌데, 본격적인 작업을 시작하기 앞서 의뢰인이 보내주신 자료와 따로 조사한 것들을 쭉 훑어보며 떠오른 문장을 먼저 정돈해서 늘어놓는 과정이다. 의뢰인에게 쓰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고, 나 자신에게 쓰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작업을 하다가 막힐 때에도 이니셔티브 레터를 보면 어떤 점에 착안해서 문장을 만들려고 했는지 되새길 수 있어서 좋더라.

납품한 작업물에 긍정적인 피드백을 받는 건 언제나 좋은 경험이지만, 요 근래에는 좋은 의뢰인분들과 작업을 진행할 수 있어 일이 더욱 재미있다.


아래는 최근에 납품했던 작업물들의 이니셔티브 레터 중 일부.





편지 01.


생태를 말하는 단어 중 천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지역의 식물들이 아주 길고 느린 시간의 흐름에 따라 천천히, 조금씩 변해가는 모습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숲을, 자연을 영원히 변함없는 것처럼 생각하곤 하는데, 실은 그렇지 않은 겁니다.


제주에 직접 방문할 수 없어 구글 지도와 검색 포털의 힘을 빌려 작업을 진행하게 될 장소를 상상으로 방문해보았습니다. 화면 너머 그곳은 나무와 숲, 돌들이 정성과 섭리로 자리잡은 숲의 모습을 해치지 않도록 투박하고, 간료한 생김새를 띠고 있었습니다. 

회색빛의 건물을 처음 본 순간 도회적인 이미지가 압도할 것이 조금 걱정되었는데, 외벽의 거친 마감이 숲과 어우러진 모습은 무척 포근하고, 편안했습니다. 머릿속으로 카페 공간에 앉아 밖을 내다보는 상상을 해봤어요. 숲속에서 눈에 띄는 모습으로 자신을 뽐내지도, 주변의 잔디와 푸나무를 억누르도록 자리를 차지하지도 않는 공간에 흙 냄새를 닮은 커피 향이 잔잔히 차오릅니다. 통창 밖으로는 짙고 여린 녹음과 찬란한 햇볕이 향연을 펼치고 있고요.  


높다란 건물과 촘촘하게 놓인 포장도로, 빼곡한 구조물로 가득찬 도시의 하늘은 좁고 갑갑합니다. 그나마 볼 수 있는 녹색이라면 가로수인데, 이 나무들은 안타깝게도 포장도로 곁을 조금 파놓고 흙을 채워둔 곳에 꽁꽁 갇혀있습니다. 도시에도 하많은 정원이 있고, 나름의 녹지로 가로수와 녹화'사업'을 통해 만들어진 공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가로수가 아름드리 크게 자라 우거진다고 해서 가로수에게 애착이 생기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눈앞의 이 공백은 조경사님이 '비워둔' 공간이라는 것을, 그 여백이 자연과 사람에게 필요한 유격이라고 조심스럽게 짐작해봅니다. 그리고 세한지우歲寒之友라는 동백과 한여름 장마철을 알리는 수국이 흐드러지게 핀 모습을 그 위에 덧그려봅니다.  


잠시 눈을 감고 저곳에 간 제 모습을 상상해봅니다. 


저는 어떤 이유로 저기까지 가게 되었을까요? 육지에서 온 제가 제주의 바다와 유명 관광지를 뒤로하고 이곳을 찾아왔다면, 그 여정에는 어떤 까닭이 있었을까요. 무엇보다 숲을 만나고 싶어서일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우리가 숲을 왜 찾아가는가를 생각하며 써야겠다. 

이곳의 언어 작업은 이 마음가짐으로 시작했습니다.




편지 02.


테일(tale)은 순서대로 일어난 일을 말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조금 더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헤아리다', '계산하다'는 의미로 tale이 사용된 흔적이 있지요. 

우리 삶 역시 늘 일정한 속도로, 순서대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옛날 사람의 시간은 낮과 밤 정도로 뭉툭하게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사람은 하루, 낮과 밤, 시, 분 단위를 넘어 초 단위의 삶을 헤아리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삶도 이토록 촘촘하게 갈라진 시간처럼 복잡하고, 다양한 모습으로 갈라졌습니다.  

누구나 그렇게 산다는 이야기에 이제는 누구도 쉽게 고개를 끄덕이지 않습니다.  

그 삶은 그의 삶이고, 이 삶은 나의 삶이라는 뚜렷한 구분법이 익숙해진 이야기에 얹혔습니다.  


그 동안 우리가 접했던 수많은 테라피와 명상, 헬스 케어 서비스는 마인드 세팅을 돕거나, 수면시간, 호흡/심박수와 혈압 등 신체에 관련된 물리적인 세팅을 도와주는 형태로 사람들의 건강을 보조해왔습니다. 트렌드에 따라 사람들은 몸보다 마음의 건강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기도 하고, 건강한 몸에 건강한 마음이 깃든다며 피지컬한 헬스 케어에 집중하기도 합니다. 


마음챙김이거나, 몸챙김이거나. 


우리를 보듬고 다스리는 방법은 두 가지 중 하나를 택하거나, 순서를 정해 하나를 나중에 고민하도록 권해왔습니다. 명상으로 챙기는 마음 건강과 몸 건강은 그래서, 별로 접점이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정말 이 두 가지를 별개로 생각해야 할까요?



편지 03.


상경하고 가장 먼저 가본 곳은 삼청동과 서교동(소위 홍대), 성북동입니다. 

이 동네에는 이른바 ‘그 동네’의 색깔이 있습니다. ‘서촌 느낌’, ‘홍대 감성’, ‘성북동 스멜’이라고 하는 특유의 분위기입니다. 팬데믹 이후 많은 질곡이 있었지만 여전히 그 동네만의 특색은 긴 설명 없이도 동네 이름만으로 전달됩니다.


중화민국 본적의 화교들이 많이 사는 인천의 차이나타운과 높다란 아파트와 독특한 외장의 비즈니스 호텔이 즐비한 반포역에서 한 블록만 더 가면 펼쳐지는 프랑스 마을, ‘서래마을’은 당시 저에게는 별세계였습니다. 

한편 두서 없이 되는 대로 들러붙은 낡은 간판의 향연. 인쇄기 철컥거리는 소리 틈으로 열을 받아 비릿하게 뜬 잉크 냄새가 물씬 피어오릅니다. 커다란 소음 때문에 사장님과 손님의 모든 대화가 고함소리로만 이루어지는 충무로 거리는 제가 좋아하는 ‘길’중 하나입니다.  


이 동네, 그 길에 놓인 많은 사연들은 길고 복잡한 설명이 없어도 “그래, 그랬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합니다.


<봄이 오면 대가야로 간다>, <홀로 마감하는 박물관 직원>, <눈이 내린다. 밤의 끝이 하얘졌다>. 

유튜브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플레이리스트들의 제목입니다. 소위 ‘과몰입’을 돕는 제목들이 눈에 띕니다.  

댓글은 더 재미있습니다.  

‘그냥 자소서 쓰는 중인데도 내가 대단한 일 하는 느낌’, ‘내가 고독을 이겨내는 문학가가 된 것 같다’, ‘현실이 힘든데도 이 음악이 흐르는 댓글창은 너무나도 따뜻하다’……. 


이제 설명은 끝난 것 같습니다. 

잠깐 ‘과몰입’해보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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