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오전 다섯 시 십분. 바깥 기온은 영하 9도.
원피스에 무스탕, 머플러와 손난로를 챙기면 충분할 날씨다. (경기 북부로 넘어가자마자 후회했다.)
가방에는 포장을 뜯지 않은 핫팩 두 개와 충전식 손난로, 기자수첩, 볼펜, 여분의 일회용 렌즈와 보조배터리, 운전면허증을 챙겨두었다.
오늘의 목적지는 도라산역이다.
도라산역은 작년 11월 경부터 줄곧 가보고 싶어 눈독을 들이던 곳이다.
강원도 고성의 통일전망대는 2015년~2016년 사이 두 번 방문해보았고, 철로라는 소재가 주는 특유의 낭만적이고 묘한 정서가 있어 열차로 가볼만한 곳을 기다리고 있었다. 개통 연기 기사를 보고 또 얼마나 기다려야하려나 막막했는데, 다행히 작년 12월에 무사히 개통되었다.
본래는 백마고지역을 가보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언제든 갈 수 있겠지 생각하고 무작정 미루어두다가 코로나19 이후로 DMZ 열차 운행이 중단되어서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었다.
공덕 역에서 경의중앙선으로 환승해 종착역인 문산역으로 향한다. 아침 이른 시간인데도 승차하는 사람들이 많다. 문쪽에 앉아있다가 발목이 얼어붙을 것 같아 가운데 좌석으로 옮겼다. 시간대 때문인지 갓 서울에 올라왔을 때 생각이 났다.
2012년 상경하고 가장 먼저 해본 것은 서울 도시철도 1호선 첫 차를 타는 것과, 시내버스 첫 차를 타보는 것이었다. 90년대 후반 아버지와 손을 잡고 <지하철 1호선>이라는 뮤지컬을 보러 서울에 올라온 적이 있었는데, 마침 당시에 자리잡은 곳도 대학로였기 때문에 더욱 애뜻한 감상이 있었다.
십사오 년 전의 추억을 다시 되새기며 열차를 타는 동안 여러 가지 삶을 사는 사람들을 보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동대문역에서부터 수원까지, 나이도 성별도, 차림새도 저렇게나 다른 사람들이 한 방향으로 가는 열차에 올라 어디론가 간다. 다들 어디로들 가실까. 해도 안 뜬 이 시간에, 이 도시의 익명들이 이렇게 열심히 살고 있다.
다시 오늘로 돌아오면, 문산역 대합실은 옛날 터미널 느낌이 물씬 풍긴다. 온풍기 앞에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앉아있고, 가끔 나처럼 “제일 빠른 거 언제예요.”를 묻는 어르신들이 역무원실과 매표소 창을 두드리기도 한다. 파주시 답게 아침부터 군인들도 많이 오간다.
평일은 아예 없어요. 딱 토, 일, 공휴일에만. 이거 하나예요. 시간이 없는데 최대한 더 보셔야지요.
도라산역으로 갈 이름모를 일행들 중에는 아이를 데리고 온 부모님들이 좀 보였다. 친구들끼리 온 사람들도 있고, 나처럼 혼자 온 사람도 있다. 전쟁 났을 때 이야기를 나누시는 어르신들과 이 고생해서 왔는데 볼 거 많았으면 좋겠다는 학생들이 나란히 앉아있는 모습이 묘한 기분을 들게 한다.
한 아이는 노트에 손으로 뭘 부지런히 적던데 옆에서 기자수첩에 이것저것 메모를 하고 있자니 어떤 글을 쓰나 궁금해서 묻고 싶더라.
문산역에서 임진강역까지는 7~8분, 임진강역에서 도라산역까지는 단 5분밖에 걸리지 않는다. 요금은 2,500원. 문산역-임진강-도라산 모두 딱 한 정거장 거리인데 저기를 가려면 신분증을 들고 신분 확인을 거친 뒤 명찰을 교부받고 여러 가지 주의사항을 듣게 된다.
꼭두새벽에 나서 도라산역으로 출발한 것은 오전 열한 시가 되어서다. 열차 출발 10분 전 역무원님과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너무 짧아요. 말이 한 시간이지 사십 분이나 될까……. 정말 금방이에요. 편 수도 좀 늘어야죠.” 웃으면서 말씀하시는 목소리가 묘하게 썼다.
도라산역에서는 철길을 오래 내려다보았다. 어렸을 때 아버지와 자주 놀러가던 곳은 대구 경부선의 간이역 고모역이다. 역이 하도 작아 열차가 거의 서지 않지만 열차들이 그 역 앞을 지나갈 때면 속력을 줄여주어서, 아버지와 나는 철조망 건너에서 간혹 열차 뒤로 나와 있는 승무원과 손을 흔들어 인사하곤 했다.
도라산으로 오는 길에도 철조망이 있었다. 기억 속의 고모역을 둘러싼 그 철조망 모양새도 아니고(좀 더 거리감이 느껴지는 생김새다.), 레일 가장자리에는 동맹국 깃발이 나란히 늘어서있다.
도라산역은 인솔자의 가이드에 따라 관람해야 하고, 역무원님 말마따나 정말 도라산역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은 40분 남짓이다. 옆에서는 내가 물어볼 것들을 아이들이 대신 물어봐주어서 감사히 엿들었다.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구간이 정해져있어서 카메라를 댔을 때 저지하면 지시에 따르는 것이 좋다.
각 구역을 볼 시간은 약 15분에 불과하고, 사진을 찍을 수 없는 구간이 있어 괜스레 야릇하고 서글픈 감상이 들게 한다.
도라산역의 다음 정차역은 개성역이다. 임진강역에서 도라산역도 그랬지만, 정말 한 정거장이 고작인 거리인데 이렇게 멀리 돌아서 가야한다.
한낮에도 영점하를 벗어나지 않는 무시무시한 파주의 날씨 덕분에(?) 온몸이 아렸지만 덕분에 새하얗게 얼어붙은 임진강을 볼 수 있었다. 임진강 위로는 끊어진 다리가 있고, 사람들이 끊어진 다리 위에서 건너편을 내다보고 있다.
서울로 들어오는 경의선을 곧장 탔는데도 시내로 돌아왔을 때는 어느 새 오후 2시가 다 되어있었다. 단 40분을 위해 이 기나긴 시간을 들여 파주를 왕복했지만 아쉬우면 아쉬웠지 허탈하진 않더라.
가는 길 사람 구경을 충분히 해서일까. 봄이 되면 한 번 더 가고 싶다.
역무원님께 여쭈어보니 그날(23일) 방문신청자는 총 40명으로, 의외로 경의선 도라산역이 개통된 이후 입장 제한인원인 50명을 모두 채워본 적은 없다고 한다. 방문자 수가 가장 많았을 때는 48명으로, 민・군・관 관계 없이 오로지 주말과 공휴일, 하루 한 번씩만 운행한다.
문산역에서는 오전 9시 10분~15분(안내자에 따라 상이한 듯하다.) 쯤 신분증과 백신접종완료 확인을 거친 뒤 신청서를 교부하고, 문산역에서 출발하는 인원을 한 번 확인한다.
문산역에 8시 30~40분쯤 도착했는데, 이미 대합실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