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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리 Oct 16. 2023

두 배로 빛나는 피부과

아무튼, 의사

비 오는 날이 되면 벌레가 지나갈 때 털이 바짝 서는 느낌으로 피부 표면이 가렵다. 매번 그런 것은 아니고 물기를 가득 머금어 일정 수준 이상의 습도가 될 때 그런 간지럼증이 시작된다.

얕은 강도로 살살 긁으며 십여 년 전 여름날을 떠올린다. 무덥던 여름밤, 대구에서 놀러 온 친척동생과 함께 밤산책을 나갔던 그날 멋진 턱시도를 차려입은 듯 검은색과 흰색털이 조화로운 아기 고양이를 발견한 날을.


집 근처 편의점에 들러 간식거리를 사고 집으로 돌아가려는 길, 눈앞에서 빠르게 지나가더니 트럭 밑 잔뜩 웅크린 자세로 우릴 지켜보는 그 녀석을 지나가는 동네 주민은 이렇게 소개했다.

"어미가 죽은 거 같어. 매일 같이 둘이 댕겼는데 며칠 동안 혼자 다니는데 살이 엄청 빠졌어. 잘 못 먹나벼."

땅에 몸을 바짝 엎드려 고개를 꺾고 두 눈을 마주하고 자세히 보니 앙상하게 마른 뼈와 끈적이는 무언가에 털이 엉겨 붙은 채로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같이 밤산책을 나섰던 친동생에게 집에 가서 수건 하나 가져오라고 하고, 나와 친척동생은 다시 편의점으로 들어가 "츄르(고양이간식)"을 사고 그 녀석을 유인하기로 했다.

마당에서 기르거나, 키워줄 사람을 구해보거나 그도 안되면 배부르게 먹이고 개운하게 씻겨서 그 근처 어딘가에 풀어줄 생각이었다. 살아나갈 수 있는 힘을 조금 보태주고 싶었던 마음, 그뿐이었다.

양 쪽에서 살금살금 다가가 녀석이 튀어나오는 순간 수건으로 붙잡을 때 나는 녀석이 세운 날카롭지만 여린 발톱에 긁혀 팔에 상처가 났고 집에 데려와 씻기는 동안에도 녀석은 동생의 손가락을 할퀴었다.


뽀송뽀송해진 녀석은 하악 거리며 잔뜩 성난 몸으로 우리를 경계하다 사료를 배부르게 먹고 무언가 결심한 듯 곁을 내주더니 길에서의 험난했던 삶의 휴식을 온전히 즐기려는 듯 몸을 길게 늘어뜨리고 단잠에 빠져들었다.

얼마 뒤 나와 동생은 몸에 이상한 두드러기 같은 것이 특정 부위에 생기기 시작했다. 할퀴어진 곳들이었다.

도돌거리는 수포가 올라오기 시작하니 덜컥 겁이 났다. 어릴 때부터 미간 사이에 생긴 수두 흉터자국이 콤플렉스여서 그것 때문에 피부과를 가볼까 하다 발길을 돌린 적이 있는데 피부에 뭔가 징그러운 것이 나서 방문하게 되다니 인생은 정말 한 치 앞을 모른다는 말이 맞다.

동생과 나란히 진료대기실에서 기다리며 피부과 기계광고배너와 화장품 홍보물을 보고 있다 내 이름이 불려 안내에 따라 진료실에 들어갔다.

맙소사. 바로크 시대 궁정음악가를 연상시키는 파마머리를 하고 안경을 쓴, 하얗고 반짝거리는 고운결의 피부에 넋이 빠져 내 상황을 설명해야 하는데 눈으로 계속 힐끔힐끔 의사 선생님만 쳐다보다 정말 민망하게도

"환자분?"

이 한마디에 정신을 다시 차리고 진료를 보러 오게 된 이유를 말했다.

살면서 내가 만난 탐이 날 정도로 좋은 피부를 가진 사람은 대학교 때 만난 러시아 교환학생 "갈리나"와 지금 떠올리는 이 사람, 바로 두 배로 빛나는 피부과 원장님 단 둘 뿐이다.

고양이와 있었던 일을 말하고 상처 부위를 돋보기로 유심히 살피던 그는 피부 표면을 살짝 긁어서 더 자세히 보겠다며 따끔할 거라고 말하고는 생긋 웃으며 의료 장갑을 꼈다.

생긋? 생긋! 너무 해맑게 웃어서 속으로 ' 일하는 게 즐거운가? 웃음이 날 포인트가 아닌데, 좀 이상하네?'라고 생각하던 찰나 " 좋은 일을 했는데 상은 없고 속상하네요~. 다 되었습니다. 곰팡이균이네요. 수건 다른 분들과 같이 쓰지 마시고 약 먹고 연고 바르면 일주일 정도 지나며 나을 거예요. 진료비는 안 받을게요."라고 말한 후 옅은 미소를 짓는 그를 보며 원래 잘 웃는 사람인가 보다 하고 인사하고 집으로 향했다.


나쁜 의미의 이상하다 보다 조금 새로운 유형의 의사, 그와의 첫 만남은 그렇게 마무리되고 이후에 결혼 준비를 하면서 "신부피부관리"라는 것을 받으러 다시 피부과를 찾아갔다.

그는 나를 기억한다고, 축하한다며 안부를 물어왔고 , 그 기억이 지금도 따스하게 느껴진다.

"피부 재생은 쉽지 않고 그냥 피부결과 안색 개선 정도로만 받아요. 사실 환자분이 엄청난 부자에 시간이 여유로운 사람이면 그분들은 관리받는 게 일과니까 막 내가 권하기도 하지만.. 너무 큰돈 들이지 말고 컨실러 바르고 다녀요~신경 쓰는 부위만 잘 가리고 다녀도 되고 또 뭐 그렇게 심각한 수준의 색소침착도 아닌데요 뭘~."

열심히 알아본 자료와 비용을 그 앞에서 말했지만 돌아온 대답이 생각지도 못한 것이라 살짝 당황했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 그가 권하는 대로 시술을 받기로 하고 혼자 중얼거렸다.

"역시 좀 이상해.. 흐흐."

'브이빔'이라는 레이저 치료를 할 때도, 트러블이 난 부위를 짜거나 뭔가를 바를 때도 콧노래를 부르고 발을 구르며 빠르게 손을 움직이는 그가 신기하면서도 싫지 않았다. 진짜 즐거워서 하는 일인가 보다 했다.

사마귀병변 치료를 받던 동생도, 산나무 알레르기 때문에 진료받았던 아빠도, 비립종으로 고생했던 엄마도 나와 같은 느낌을 그에게서 받았으니 그가 독특한 사람인 건 맞지 않을까?

언제나 반듯한 자세로 늘 같은 헤어스타일, 여전히 잡티 없이 매끈하고 화사한 피부의 밝은 미소를 지닌 그가, 화상 환자의 드레싱 부위를 얼마나 정성스럽게 진료하는지 밖에서 들어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친절하고 다정한 그가 계속 변치 않고 즐겁게 의사로서 살아갈 수 있길 바라는 환자들이 많을 거라 생각한다.

타고난 것도 있겠지만 그의 성실함이 곳곳에 보이는 그 공간에서 그가 오늘도 신나고 즐거웠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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