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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리 Oct 17. 2023

동네내과의원

아무튼, 의사

일정 나이가 되면서부터 몸이 순차적으로 아프기 시작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앞서 본 글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나는 태어날 때부터 허약체질이라 특별히 활력이 넘친다거나 기운이 솟는 등의 경험이 많지 않다. 사실 통상적인 건강함의 기준에 내가 미치치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더 지배적이다.

그런 탓에 어렸을 때부터 현기증, 빈혈, 두통, 근육통에 초경이 시작된 이후로는 생리통, 관절통, 안구통과 이명, 소화불량 등등 큰 중병 없이 살아온 게 기적이다 여기며 살고 있는데 약골인 내가 제일 자주 갔던 곳은 아마도 동네내과의원일 것이다. 그래서 그곳의 의사 선생님, 조 할아버지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가벼운 감기가 걸리면 약국에서 사 온 약과 엄마가 타준 홍삼꿀물로 2~3일을 버티곤 했었다.

누런 콧물이 나오고 뭔가에 눌린 듯 기운이 빠진 시간이 지나고 나면 몸은 다시 회복되었다. 1500원 12 캡슐의 알약으로.

하지만 온몸이 두드려 맞은 것 같이 아프고 귀가 얼얼해지고 눈앞이 뿌옇게 흐려질 정도로 열이 오를 때는 내과를 방문해야 했고 어떤 특정 시기에는 병원비도 부담이 될 정도였지만 아프니 별 수 없었다.

그렇게 병원문을 열고 들어가면 정돈되고 차분한 그곳만의 분위기가 나는 좋았다.

20년 전,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그에게서는 나이 든 의사들이 줄 수 있는 안정감이 있었고 내가 겪었던 일부 나이가 많은 의사들에게서 볼 수 있는 고압적인 태도 없이 부드럽기만 했다.


시간이 흐른 지금도 그 모습은 여전하여 어른으로서 공경하는 마음이 생긴다.

내가 가지기 힘든 마음 중 하나인데도 말이다. 간호사 두 분도 오래 근무했던 터라 세월의 흔적을 같이 공유하니 그 친밀감에 가벼운 일상의 이야기들을 나누며 엉덩이에 주사를 맞을 때도, 수액을 맞기 위해 혈관을 찾을 때도 편안할 수 있음에 기뻤다.

왜 기뻤냐 하면 이제는 집에서 멀어진 그 내과에 자주 갈 수 없어 상황에 맞게 찾아간 다른 곳에서 혈관을 여러 번 찔리거나, 시간을 맞추지 못해 피가 역류한다거나 하는 불편함을 겪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 할 아버지 내과는 한 번도 주사를 맞고 피멍이 든다거나 혈관통을 겪지 않았고 치료의 순간 마주해야 할 아픔에 대한 불안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그래서 불안한 마음이 들지 않았다.

진료실 반대편 쪽에 마련된 안정실에서 수액을 맞고 있다 보면 의사 선생님의 사적인 전화통화 내용도 듣게 되는데 주로 아는 동료로부터, 또 오래된 친구로부터 걸려오는 점심약속이나 안부전화 같은 것들이다.


한 번은 다른 의원의 진료방식에 대한 의견을 나누다 아직도 배우고 싶은 욕구가 있다는 말을 동료의사에게 이야기하는 통화를 들은 적이 있는데 끊임없이 알고자 하는 그의 에너지가 신기하면서도 부러웠다.

그래서 나도 그의 태도를 본받아 타성에 젖지 않고 내가 속해있는 분야에서 계속 배우고 나의 좁은 사고의 틀을 확장해 가야겠다 다짐하기도 했다.팔을 내어놓고 수액줄을 타고 흐르는 비타민영양제가 섞인 액체를 바라보며.

감기뿐 아니라 가벼운 체기가 있다거나 컨디션이 좋지 않아 좀처럼 기력이 돌아오지 않을 때도 조 할아버지 내과를 방문하고는 했는데 그 시기에 나는 원인을 알 수 없는 피부트러블로 의기소침해졌었다.

이 때는 두배로 빛나는 피부과를 알기 전이었고 생리일이 다가오는 날에 턱 쪽에 몇 개 여드름이 나거나 하는 게 전부였는데 오돌토돌한 작은 알갱이들이 올라오고 가라앉질 않으니 도무지 나을 방법을 몰라 답답해하던 때였다.

그런데 다른 증상으로 찾은 조 할아버지 내과에서 의사 선생님은 내 얼굴을 한 번 보시고는,

-속상하겠어. 간지럽거나 따갑진 않아요?

를 시작으로 몇 가지 질문을 하시고는 호르몬 문제 때문일 수도 있다고 주사 맞고, 얼굴에 자꾸 손대지 말라고 주의를 주시고는 효과 봤다고 자주 맞으면 좋지 않다는 당부까지 잊지 않으셨다.

병원에서 돌아온 다음 날 저녁부터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피부가 원상 복귀된 것을 보고 명의셨어!! 를 속으로 외치며 며칠간 이어지던 소화불량도 해결되어 히죽이며 김치찌개에 밥을 비벼먹던 그날이 아직도 선명하다.


아직까지도 친정엄마는 조금 먼 거리이긴 하지만 그곳에서 진료를 받고 가끔 기운이 없어 수액을 맞으러 가게 되면 항상 본인의 여린 손목과 손등을 세심하고 조심스러운 손길로 다뤄주는 간호사분들과 주의 깊게 살피고 환자에게 적합한 약과 치료(엄마는 당뇨위험군으로 오래 식단관리를 하고 계신다.)를 진단하는 의사 선생님의 한결같은 정성을 내게 전해오면 나는 생각한다.

'그대로시구나. 한결같다는 게 얼마나 품이 많이 드는 일인지 알고 있는데 참 대단하시다.'라고.


얼마 전 명절을 앞두고 심적으로 과중한 스트레스가 몰려와 그것이 몸을 아프게 했고 기운을 차리려 수액을 맞기 위해 먼 거리지만 이 병원을 찾았다. 간호사분들은 여전했고 진료를 보러 들어간 원장실에 조 할아버지는 체크남방에 청바지를 입고 계셨다. 의사 가운의 단추를 잠그지 않고 계셔서 볼 수 있었다.

"멋지세요! 그리고 너무 잘 어울리세요."라는 나의 말에 "무슨~."이라고 대답하며 눈웃음을 지으셨다.

그 모습이 얼마간 계속 떠올랐다. 간호사 분들도 여전히 친절하시고 원장님 우리가 끝까지 모신다며 훌륭한 어른이시라고 말씀하실 때 오랜 시간 그분들이 함께 보낸 시간을 응축한 말인 것 같아 뭉클했다.

올해 82세가 된 조 할 아버지가 진료일과 진료시간을 단축하신 걸 보면 몇 년 안에 은퇴를 하고 병원은 문을 닫게 되겠지. 늦지 않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러 가야겠다.

물론 그 사이 여러 번 들르게 되겠지만 입버릇처럼 말하시다 진짜로 그만두시게 되는 그날이 오면 좋아하시는 건강한 음식을 들고 수줍지만 용기 내어 말해야겠다.

“감사해요, 의사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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