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14번지 집은 부모님 가게와는 전보다 더 멀어져서 아쉬웠지만, 그 아쉬움을 달랠만한 좋은 점이 있었다면 도서관과 한층 더 가까워졌다는 점이다. 공원과 나란히 붙은 도서관에 어떻게 처음 발을 붙였는지 아무리 생각해 보려 해도 기억은 없다. 부모님은 언제나 가게 일로 바쁘셨기에 내 두 손을 잡고 여기가 도서관이라며 친절하게 안내해 주실 여유가 없었다. 그 말은 그곳에 도서관이 있는 줄 내가 알고 내 두 발로 찾아갔다는 뜻인데, 두 발로 찾아가게 된 건 분명한 목적이 있어서였다.
도서관에 가야 했던 첫 번째 목적은 방학 때마다 주어지는 탐구생활 숙제 때문이었다. 여름방학이 끝나면 방학 동안 친구들이 해온 탐구생활이나 관련 미술작품들이 복도에 쫙 전시를 해둔다. 나는 열심히 한다고 해갔는데, 전시된 친구들의 과제를 보면 내가 따라잡을 수가 없는 수준이었다. 책의 두께며 정성 가득한 미술작품이며. 나는 그 과제들이 모두 친구들 본연의 능력인 줄만 알았다. 철석같이 믿었다. 그리고 자책했다. 내가 더 노력했었어야 했다며. 하지만 그건 결코 친구들만의 능력이 아니었다. 우유갑 수십 개를 이어 붙여서 책상 두 개 크기의 큰 배를 만들어 온 친구는 우유갑을 모아 준 건 엄마였고, 그걸 이어 붙여 준 건 아빠란다.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니 만들기는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었는지 나는 방학 때마다 받는 탐구생활에 집착했다. 돋보이고 싶었다. 두께로 승부를 봐야 했다. 친구들이 어떻게 해오는지 유심히 살펴봤다. 하나의 주제에 답만 적은 것이 아니라, 그 주제와 관련된 온갖 정보를 복사해서 예쁘게 붙이고 또 붙였다. 그랬더니 본디 책의 두께보다 대여섯 배는 부풀게 되는 것이었다. 나도 따라 해 보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발을 들여놓게 된 곳이 북구 도서관이었다. 처음에는 어린이라는 신분에 걸맞게 어린이 자료실에서 책을 찾고 자료를 찾았다. 하지만 딱히 복사할 내용이 많다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도둑고양이가 먹이를 구하기 위해 남의 집 담장을 살금살금 넘어가듯 나는 성인자료실을 찾았다. 두리번두리번 자료를 찾는데 어린이가 들어왔다고 뭐라 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괜찮은 줄 알고 더 뒤적거렸다. 찾아야 할 내용과 관련한 책을 검색해서 그 책을 찾고 그 책으로 안되면 관련 있는 책을 여러 권 더 줄줄이 뒤적거리다가 이건 관련이 있는 내용인 것 같으면 가차 없이 복사했다. 복사는 당연히 무료가 아니었고, 지하 1층 매점에서 복사카드를 구매해야 했다. 어쩌다가 내 용돈으로 간식을 사 먹으면 그 돈은 그렇게 아깝던데, 그 돈으로 복사카드 사는 건 전혀 아깝지 않았다. 그저 마음껏 책을 복사할 수 있으니, 나중에는 점점 더 고액권으로 복사카드를 구매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처음에는 어떤 자료부터 찾아야 할지 몰랐다. 그러다 혼자 깨우치길 핵심 주제와 관련한 단어의 속뜻부터 제대로 알아보기로 했다. 가령, '탄성력'이라 하면 그 내용이 가장 잘 나와있는 백과사전을 찾는다. 복사한다. 공부한 내용을 바탕으로 이 내용이 과학 분야라는 것을 알게 되면 그쪽으로 가서 관련 서적을 검색한다. 그렇게 뒤적거리다 보면 탄성을 활용한 다양한 실생활 속 쓰임을 알려주는 놀이라든지 예시가 나오고, 그 예시를 바탕으로 내 삶에 어떻게 적용해 볼 수 있는지 사진을 찍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물건을 만들면 그 장은 금세 두꺼워지는 것이다. 책을 두툼하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기에 지식을 확장하는 방법을 자연스레 터득했다.
그러다가 이건 복사한다고 해서 될 분량이 아니겠다는 판단이 서거나, 혹은 다른 내용도 너무 흥미로워 보여서 더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책을 한 권, 두 권 빌리기 시작했다. 도서관 회원증은 아마 필요한 서류를 알아보고 부모님을 내가 달달 볶아서 만들었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필요한 것이 있으면 바쁜 부모님을 언제나 들들 볶아야 했다. 그게 귀찮아서 입을 다물어 버리면 나는 그만큼 얻을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것이 없어졌고, 그래서 혼자 의기소침해졌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매번 해달라 해야 하는 상황들이 귀찮아지기 시작했고, 바로 그 때문에 내가 스스로 해나갈 수 있는 일들이 늘어났나 보다.
아침에 나가 저녁이 한참 지나서야 귀가하시는 부모님을 대신해 주말마다 나는 대청소를 한다. 언제나 시작은 창문을 활짝 열어 놓는 일부터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거실 쪽으로 창문이 크게 나 있었고, 바로 건너편 끝 부엌 쪽으로도 창문이 크게 나 있었기에 양쪽을 다 열면 맞바람이 쳤다. 아침이면 거실 창으로 해가 바짝 들어서 하루를 시작하고, 저녁이면 부엌 창으로 뉘엿뉘엿 노을이 철마다 색을 달리하니 나에게는 이곳이 휴양지였다. 물건을 정리하고, 청소기를 밀고, 무릎을 꿇고 두 손에 걸레를 집어 들고 열심히 닦는다. 방안 장판은 밋밋했는데, 거실 장판은 올록볼록해서 더 신경 써서 닦았다. 그 올록볼록한 틈새에 때가 끼면 안 되니까. 초등학생 여자아이가 할 수 있는 집안일을 해놓고, 다음으로 해야 하는 일이 있다면 실내화 빨기다. 친구의 실내화는 새하얗던데, 내 실내화는 아무리 박박 문 지러도 그렇게 새하얗다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 엄마가 솔질해 준 실내화가 아니라서 그런 줄만 알았다.
노래를 신나게 틀어 놓고 청소를 마치면 나른한 오후가 다 가있다. 그래도 아직 부모님이 오실 시간은 한참이나 남았다. 샤워를 하고 도서관에서 빌려 온 책을 꺼내 소파에 눕는다.어느 새 몸이 쩍쩍 붙는듯 하면 이따금씩 돌려 준다. 이제 소파 등받이에 다리를 올려놓고, 책을 편다. 사방에서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오면 책을 읽다 말고 스르르 눈이 감긴다. 심심했던 하루가 그렇게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