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 주부가 되려면

by 엘샤랄라

"나의 친애하는 그림자여,

내가 너를 얼마나 무례하게 대했는지

이제야 깨달았다."

-프리드리히 니체


어제는 '청소 관련' 책을 읽고

'청소 바람'이 들었다.

나름 꾸준하게 비워내고, 정리하고,

쓸고, 닦고 한다고 생각했는데

책을 보고 집을 둘러보니 손댈 곳이 가관이다.


보이는 곳에만 집중한 결과다.


평소에 의식하지 않았던 부분을 의식했다.

우선 부엌으로 들어가 설거지를 시작했다.

건조대에 그릇을 올려놓으려는데,

건조대의 위생 상태가 보였다.

건조대를 이루는 알루미늄 구조대의 위가 아닌

아래를 보니, 좀 닦아야겠다.

레인지후드 안쪽을 살펴봤다.

닦은 지 엊그제 같은데, 금세 기름때가 끼었다.

후드 주변으로도 찌든 때가 보인다.

후드는 담가서 불리고, 주변은 수세미로 문질러 본다.

에어프라이어기도 분해하여 세척한다.

음식을 조리한 후 바로 닦는다고 닦았는데

영 어설펐나 보다.

세탁실로 시선을 돌려 본다.

세탁기만 돌릴 줄 알았지, 주변을 챙기지 못했다.

세탁세제를 보관했던 보관대를 모두 분리해

모두 세척하고, 바닥은 솔로 문질러 윤을 낸다.

그동안 열심히 일해왔던 세탁기도 닦아 준다.

세탁기 내부까지 뜯고 세척하는 건 시간상

내일 하기로 한다.

안방베란다로 동선을 옮긴다.

빨래를 널기만 했지 주변을 챙기지 못했다.

어쩌다 고사한 나무도 몇 날 며칠 그대로 두었다.

화분부터 비워낸다.

어찌나 뿌리가 화분을 가득 채우고 있었던지

흙이 빠져나올 생각을 안 한다.

가까스로 화분이 흙을 토해냈다.

나는 아직도 보이지 않는 너머에서 얼마나 많은 것들을

이 뿌리처럼 부여잡고 있을지,

이제는 털어내고

편히 가라는 마음으로 뒷정리를 한다.

구석에 주먹 두 개를 합친 돌도 있다.

아들이 예쁘다며 주워 온 돌이다.

수석 전문가도 아닌데,

이제는 자연으로 돌려줘야 한다.

바지런하게 움직인다고 움직였는데,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내가 매일 하는 집안일 외에도

'그림자' 같이 여겨지는 집안일이 수두룩했다.

이 또한 월초에 해야 하는 일, 요일별로 해야 하는 일,

시시각각 해야 하는 일로 나누어 지속적으로

챙겨 나가야 한다.

고개를 들어 시선을 향하지 않는다면

굳이 건드리지 않아도 될 일은

문득 돌아보면 그 또한 나의 실체임을 깨닫게 된다.

다른 사람 눈에는 안 보여도 나는 보고 챙겨야 하는 일,

티가 나지 않아도 얼룩 하나까지 꼼꼼하게 닦아냈을 때

나는 알 수 있는 그 쾌청함 때문에

구석구석 더 뜯어보고 돌아보고 닦게 된다.


보이지 않는 '그림자'까지 닦아내야

프로주부가 되는가 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산은 오를 때마다 힘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