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것도 버릴 수 없는 자는
아무 것도 느낄 수 없다."
-프리드리히 니체
사탕이 가득 든 병 안에
손을 집어 넣는다.
사탕을 한 움큼 욕심껏 집어든다.
하지만 손은 빠져나올 생각이 없다.
그릇을 바꾸기에는 이미 늦었고,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사탕을 내려놓는다.
나는 워킹맘이다.
다행인 건 일하는 시간을 조절할 수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첫 아이가 태어나고 서른이 시작되었을 때
나는 일을 줄일 수 없었다.
아이와 더 오랜 시간을 함께하고 싶었지만
기존에 가르치던 학생들도 많았고
또한 가정을 일군 초반이었기에
안정적인 기반이 더 절실했다.
남편, 시댁 부모님, 베이비시터까지 동원해 가며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치의 일을 했다.
학생들과의 수업은 즐거웠고, 수익은 좋았지만
나의 시선은 언제나 아이들에게로 향했다.
나에게 주어진 하루를 어떻게 쪼개야지만
내 아이들을 잠시라도 더 볼 수 있을지
마음이 분주했다.
일은 일대로, 육아는 육아대로 최선을 다한다고
하고 있었지만 뭐 하나 버릴 줄은 몰랐다.
바로 그 욕심 때문에 괜한 곳에 돈이 새어나갔다.
다 읽히지도 못할 전집을 사들이고,
고작 일주일에 한 번 하는 수업을 위해
거금의 교구를 앞뒤 안재고 집에 들였다.
수업은 한 번이지만, 부모가 그 교구를 가지고
충분히 더 오래 놀아주어야
효과가 있는 법인데 말이다.
방법은 많았지만, 충분히 숙고하지 못했고
더 넓은 안목이 부족했다.
그렇게 꼭 쥐고 가기를 10년, 내가 집중하고 싶은
가치에 집중해 보기로 했다.
수업 시간을 조절하고,
아이들과의 저녁 시간을 확보했다.
특별히 더 대단한 무언가를 아이들에게
주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이들과의 시간 속에 푹 빠져서
아이들 커가는 모습을 온전히 느끼게 되었다.
'집'이라는 공간이 이제야 그 조감도가
보일 정도다.
구석구석 내 손길이 닿아야 하는 곳들이
얼마나 방치가 되었는지 이제야 느끼기 시작했다.
그저 일하고, 자고, 씻고 내 할 일에 집중하느라
집안 구석구석 작은 것들에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속도를 줄여가며, 온전히 느끼기 시작하면서
버리고 비워내기도 수월해졌다.
아이들에 대한 미래도 불안으로 점철되어
온갖 일정으로 빼곡히 채우기보다
조이고 풀기를 조금은 리듬 타며 하게 되었다.
괜한 아이들 눈치를 보며
허용적이었다가 엄했다가 하는 기준도 이제는
일관성이 붙었다.
딸아이가 쪼르르 달려와서 이른다.
"나는 오빠 물건 실수로 떨어뜨린 건데,
오빠가 내 핸드폰 갑자기 떨어뜨렸어."
예전 같았으면 똑같이 응수하던 아들만 혼냈겠다.
양쪽 입장을 모두 본다.
"오빠에게 미안하다고 사과는 했어?"
딸아이는 말이 없다.
"아들은 동생에게 사과할 기회는 준거야?"
아들도 말이 없다.
모든 일은 순식간에 일어난다.
상황 판단 또한 대게 본능적이다.
그리하여 보통 즉각적인 행동으로 대응하는
큰 아이가 혼나는 일이 다반사였다.
하지만 이제는
나에게 가장 소중한 '시간'을 내어줌으로
아이들 커가는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보니
오해가 쌓이기 전에 풀어주게 된다.
일방적이지 않고 두루 살핀다.
또한 내 자신에게도 '시간'을 내어줌으로
나를 가까이서 온전히 느끼고 있다.
'시간'을 온전히 내어줌으로
세상이 날로 풍부하고 밀도 있어진다.
꼭 쥐고 있던 손을 펴니,
되려 그 손으로 할 수 있는 것이 많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