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단히 말해서, 음악이 없는 삶은
잘못된 삶이며, 피곤한 삶이며, 유배당한 삶이기도 하다."
-프리드리히 니체
음악 듣기를 좋아한다. 보통 운전할 때 KBS 클래식 FM 93.1을 틀어 놓는다. 산책하거나, 운동할 때에는 상황에 따라 '때껄룩'의 유튜브 팝송모음곡을 듣는다. 이따금씩 남편과 술 한잔을 기울일 때면 남편이 트는 음악을 듣는다. 90년대 추억의 발라드가 주를 이룬다. 그의 취향이다. 하지만 몇 달 전부터 음악 듣는 시간이 확연하게 줄었다. 내가 듣는 음악 장르가 바뀐 탓이다.
내가 요즘 주의 깊게 듣는 음악은 '사람의 목소리에서 흘러나오는 말'이라는 장르다. 그런데 이 장르는 참으로 간사하다. 내 마음만큼이나 간사하다.
남편과 연애할 때 나는 그의 목소리에 푹 빠졌었다. 상냥하기 그지없는 그의 목소리에서 마음의 안식을 찾았고, 자연스레 애교가 묻어 나왔다. 나의 목소리 또한 그의 목소리에 맞추어 자유롭게 변주하였다. 하지만 내 몸이 힘들고, 짜증스러우면 한참이나 전에 변성기가 끝난 그의 목소리가 다르게 들린다. 나에게 날을 세우는 듯하다.
푹 자고 일어난 아침, 아이들 목소리가 듣기 좋다. 큰 소리 낼 일이 별로 없다. 오늘 하루도 잘 지내보자며 즐겁게 식사한다. 하지만 저녁 즈음이 되면 내가 듣는 아이들 목소리에는 짜증이 묻어나 있다. 시도 때도 없이 서로 이야기하겠다는 아이들의 말은 전혀 화음을 이루지 못한다. 하나의 곡이 끝나기도 전에 다음 곡이 연주되면서 어떤 곡부터 들어야 하는지 갈팡질팡이다. 음악이 아니라 소음이다.
지극히 주관적인 이 음악해석법이 언제부터인가 문제가 있다 생각했다. 그저 나의 몸과 마음 상태에 따라 마음대로 변주하기 시작하면서 통제력을 잃었다. 이 음악의 지휘자는 누구인가. 무엇을 나는 어떻게 들을 것인가. 제대로 듣고 있는가. 그저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 이 듣는 능력은 그저 모든 소리를 들었다는 것으로 그 의무를 다하고 있다 말할 수 있는가.
영어에서는 이러한 듣기를 hearing과 listening이라는 두 단어로 구분해서 말한다. Hearing은 비자발적이며, 생리적이고, 비선택적인 반면, Listening은 자발적이며, 인지적이고, 선택적으로 듣는 능력이다. 이 두 가지 듣기 능력을 나는 아직 더 유연하게 사용하지 못한다. 들리는 모든 소리에 귀를 열어 둠으로 스스로를 피곤하게 만들고, 또한 내가 듣고자 하는 소리만 들으려 하는 까닭에 상대방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오해를 낳는다. 하나의 방식이 아닌, 두 가지 방식을 조금 더 자유롭게 운용하면서 내 삶에 음악 소리가 넘치게 하고 싶다.
그 시작은 내 마음속에 지휘봉을 잡는 것부터다. 오케스트라 지휘자에게 주어진 그 지휘봉이 내 손에도 있다 상상한다. 그저 열심히 연주하도록 밀어붙이기보다 쉼표를 허락하기도 한다. 소리를 줄이게 할 수도 있고, 하나의 악기가 더 돋보이게 연주하도록 장을 마련해 줄 수도 있다. 잔잔한 배경음악처럼 들을 수도 있고, 마음을 다해 들어줄 수도 있다. 부드러우면서도 힘 있는 지휘봉의 섬세한 움직임에 주목한다. 이제 소음이 아닌 음악이 연주되는 날들이 차곡차곡 쌓인다. 듣고 싶은 음악이 된다. 내 손에 지휘봉을 잡게 됨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