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를 읽었다. 운동하러 나간 40대 여자가 집에 돌아오지 않아 실종신고가 접수되었다. 그녀는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살해자는 사기를 당하고 돈을 날려 그 분함을 풀길이 없어 일면식도 없는 사람을 무참히 찔러 죽였다.
조금 더 잘 살아보겠다고 선택했던 일들이 알고 보면 껍데기인 경우가 생각보다 비일비재하다. 하루하루 성실하게 모은 돈을 믿고 맡겼는데, 하루아침에 거지가 되는 꼴을 못 면한다. 사기꾼이 판을 치고, 그렇게 사람들 등쳐먹고 번 돈으로 떵떵거리며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미디어를 통해 수시로 듣는다. 은행과 회삿돈을 횡령하고 그 돈으로 자신의 사리사욕을 채운다. 전세자금이 마치 자기들 돈인 양 마음대로 쓰고도 당당하다. 이 모두 피해자들의 삶의 의지를 꺾어 버리는 악질 중에 악질이다. 정말 잘 살아보겠다 생각해서 한 선택이 생각지도 못한 최악의 결과를 가져왔다. 분노가 치밀고 소송이 난무하지만, 해결할 길이 딱히 보이지 않는다. 어떻게든 붙잡고 싸워 보지만, 시간이 갈수록 지칠 뿐이다. 재수 없게 괴물을 만나 나 또한 괴물이 되어간다.
억울함이라는 괴로움이 내 몸 안에 똬리를 틀기 시작하면서 괴물이 되는 건 순식간이다. 그렇다고 모두가 괴물이 되지 않는다. 선악의 프레임으로 설명되지 않는 이 억울하고 부당한 일 때문에 이를 바득바득 갈아보지만 곧 알게 된다.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결국 괴로움에 몸부림치다가 시간이 흐르며 현실을 인정한다. 툴툴 완전히 털어 낼 수는 없어도 털어 내야만 조금은 가볍게 내가 일어설 수 있다. 무거운 몸을 일으켜 세우면서 '나 하나'가 아닌 나와 나로 연결된 '우리'가 눈에 들어온다. 나의 부모, 나의 자식, 내가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들이 눈에 밟힌다. 그들의 눈에 비친 괴물 같은 나의 모습을 볼 수 있다면 우리는 다시 괴물이 되지 않는 길을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이미 괴물이 되어버린 자들은 실체가 없다. 거울 속에도, 물 위에도, 상대방의 눈동자 속에도 그 어느 곳에서도 자신을 비추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행여나 비쳤다 하더라도 볼 수 없는 자들이다. 눈먼 자들이다. 살아 있어도 비치지 않는 바로 그 실체, 스스로 비추지 못하는 실체, 나에겐 그런 사람들이 괴물이다.
혹여 내 인생에서 다시 괴물을 만나게 된다면, 괴물 속에서 나를 꺼낼 것이다. 거울에 비추고, 그의 눈동자 속에 비추고, 아이들 눈동자 속에 비춤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