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가 한국에서 온 의료봉사 단체의 캄보디아어 통역을 맡게 되어 프놈펜(Phnom Penh)으로 출장을 갔다. 그녀가 없는 동안 나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닥터 후와 점심을 먹었다.
닥터 후는 바탐방대학교 앞에 있는 현지식 전문점인 ‘테레사(Teresa)’라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는다. 한국으로 치면 백반집 정도 된다고 할 수 있다. 이곳은 바탐방대학교의 교수들이 장부를 달아 놓고 식사를 하는 곳인데 닥터 후도 강의를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이곳에서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80달러를 내고 60끼의 식사를 할 수 있다고 하니 가격은 저렴했다. 엄밀히 말하면 60가지의 메뉴를 먹을 수 있는데, 먹성이 좋은 그는 보통 한 끼에 두 가지 메뉴를 먹는다고 하여 결국 30끼를 먹는 셈이었다.
음식은 닥터 후가 즐겨 먹는 메뉴들로 주문했다. 갈비탕과 뭇국의 중간 맛이 나는 국과 똠양꿍처럼 새콤한 맛이 나는 국, 달짝지근한 파인애플 소고기볶음, 간장소스를 발라 구운 돼지고기였다. 닥터 후는 고수가 싫다며 국에 들어있는 고수를 모두 건져냈지만, 나는 고수도 즐겨 먹기 때문에 거슬리지 않았다. 음식은 전체적으로 조금 달았지만 다진 땡고추를 곁들여 먹으니 균형이 맞았다. 밥은 따로 주문하지 않아도 커다란 냄비에 흰쌀밥을 담아서 줬다. 먹을 만큼 덜어서 먹으라는 건데, 그 양이 엄청나서 한 번도 다 비우지 못했다.
「저기 길 건너에 핑크색 옷을 입은 아줌마 보이니?」
식사를 마친 그가 담배를 꺼내 물었다.
「네. 그런데요?」
「내가 저 아줌마랑 딸 때문에 고생을 좀 했지.」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
닥터 후가 처음 테레사에서 밥을 먹기 시작했을 때, ‘쏙’이라는 이름의 여자 아이가 식당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닥터 후는 평소 어린 나이에도 성실하게 일하는 쏙이 기특했지만 늘 어두운 낯빛을 하고 있는 것이 신경 쓰였다. 하루는 멜빈과 함께 점심 식사를 하면서 쏙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털어놓았다. 멜빈은 쏙이 영어를 배울 수 있게 도와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쏙이 영어를 배우면 더 나은 직업을 구할 수 있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쏙, 혹시 영어 배워볼 생각 있니?」
쏙은 평소에 자신이 공부하던 영어 책을 들고 나오더니 간절한 눈빛으로 영어를 배우고 싶다고 말했다. 그동안 닥터 후가 본 쏙의 얼굴 중에 가장 생기 넘치는 얼굴이었다.
이때부터 쏙은 오후에 한 시간씩 짬을 내 영어 학원에 다녔고 닥터 후는 쏙의 후견인이라도 된 듯 매달 학원비와 책값으로 50달러씩 줬다. 영어를 배우면서 쏙의 얼굴도 조금씩 밝아졌고, 그런 쏙을 보며 닥터 후도 보람을 느꼈다.
얼마 후 닥터 후가 식사를 하는데 쏙의 어머니가 찾아와 감사의 인사를 했다. 그는 예상치 못한 인사에 당황했지만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나고 그녀가 또다시 닥터 후를 찾아왔다. 이번에는 감사의 인사를 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뜬금없게도 자신의 개인사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얼마 전에 이혼을 했고, 아이들과 살 집을 구해야 하는데 돈이 없어 길거리에 나 앉게 생겼다고. 그리고는 원한다면 쏙과의 결혼을 허락할 테니(결혼이 싫다면 그냥 데리고 살아도 된다며) 집을 구할 돈을 줄 수 있냐고 물었다. 이 말을 들은 닥터 후는 매우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쏙의 어머니에게 화를 내며 그런 부도덕한 의도로 쏙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뜻을 오해한 것이 괘씸해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고 돌려보냈다. 하지만 쏙을 볼 때마다 그녀가 한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결국 그는 그들의 사정을 딱하게 여기고 쏙의 어머니가 말한 집을 보러 갔다. 깔끔한 외관의 2층 집이었다. 보증금 없이 월세 50달러였다. 그때부터 그는 매달 쏙에게 학원비에 월세를 더한 금액인 100달러를 주기 시작했다.
몇 달 후 닥터 후와 함께 점심을 먹던 멜빈이 쏙의 영어 실력을 보자며 말을 걸었다. 하지만 쏙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영어를 배우기 시작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다는 ‘How are you? I am fine, Thank you.’조차도 말이다.
「이런 식이라면 계속 영어 학원에 가는 게 의미가 없겠어. 차라리 다니다 그만둔 중학교나 졸업시키는 게 낫지 않겠어?」
멜빈의 말을 들은 닥터 후가 쏙을 불러 물었다.
「쏙, 혹시 다시 학교에 가고 싶니?」
「네!」
이렇게 해서 닥터 후는 쏙을 중학교에 보내기로 한다. 하지만그날 저녁 쏙은 눈물을 흘리며 닥터 후를 찾아왔다. 쏙이 테레사 주인에게 학교에 다니면서 일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지만 주인은 염치가 없다며 쏙을 해고한 것이다. 테레사 주인은 일을 하면서 영어 학원에 가는 것까지는 봐줬지만 학교에 다니는 것까지 봐줄 수는 없다고 했다. 닥터 후는 혼란에 빠졌다. 자신으로 인해 쏙의 인생이 (좋든 나쁘든) 바뀌고 있다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테레사로 가서 복직을 부탁하겠다고 했지만 쏙이 만류했다. 테레사에서 일하는 동안 하대 받았고 일도 힘들기 때문에 미련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시 학교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닥터 후는 혼란스러웠지만 쏙의 생각을 존중하고 학교에 보내기로 결정했다.
닥터 후는 쏙이 다닐 학교를 찾고 쏙이 입을 교복까지 사줬다. 하지만 쏙은 돌연 마음을 바꿔 중학교 입학을 취소했다. 자신은 머리가 나쁘고, 몇 년을 공부해 대학까지 나온다고 해도 많은 돈을 벌 수 없을 것 같다는 것이다. 쏙은 차라리 장사를 해서 돈을 벌고 싶으니 밑천을 대 달라고 부탁했다. 닥터 후는 장사를 하겠다는 쏙의 말이 뜬금없었다. 그건 분명 쏙이 원하는 게 아니었다. 그는 불현듯 누군가 쏙을 통해 이익을 취하려 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게 누군지는 생각해 볼 필요도 없었다. 닥터 후는 쏙을 추궁해 장사 밑천을 얻어 오라고 시킨 게 그녀의 어머니라는 걸 알아냈다. 닥터 후는 배신감을 느끼고 쏙에게 선물한 교복을 뺐었다(이 교복은 여전히 닥터 후의 방 한쪽에 걸려있다).
하지만 쏙은 결국 장사를 시작했다. 그 일이 있은 후 며칠이 안 돼 닥터 후가 그들을 돕기로 마음을 먹었기 때문이다. 닥터 후는 쏙과 그녀의 어머니에게 어떤 장사를 할 것인지, 무엇을 도와주면 되는지 물었다. 그들은 새로 이사한 집 앞에 노점을 차려 음료와 생필품 같은 걸 팔 계획이라고 말했다(캄보디아에는 구멍가게인지 가정집인지 헷갈릴 정도로 자신의 집 앞에서 생활 잡화를 파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닥터 후는 이들을 데리고 시장으로 가 아이스박스, 테이블, 파라솔, 진열대 등 장사에 필요한 물건을 사주고(이 와중에 쏙의 어머니는 파라솔을 두 개나 사려고 시도했지만 닥터 후가 저지해 실패했다), 장사 밑천을 하라며 500달러도 줬다. 그 후로 닥터 후와 멜빈은 뭔가 필요한 게 있으면 일부러 그곳에 가서 물건을 팔아줬다.
그렇게 한동안 조용한 나날이 지속됐다. 쏙도 매달 100달러(쏙이 죽어도 영어는 배우고 싶다고 해서 계속 학원을 다녔다)를 받으러 오는 것 말고는 닥터 후에게 더 이상 뭔가를 부탁하지 않았다. 모든 게 안정된 듯 보였고 닥터 후도 자신의 책임을 다했다고 생각했다.
얼마 후(나는 이번이 제발 마지막이 되길 바라며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멜빈이 뭔가 살 게 있어 쏙의 집에 갔지만 웬일인지 장사를 하고 있지 않았다. 닥터 후가 쏙을 찾아가 자초지종을 묻자 주변 잡화점들에 밀려 장사가 잘 안 됐고, 물건을 팔아도 수입을 모두 엄마가 가져가 새로 팔 물건을 채울 수 없었다고 했다. 닥터 후는 한동안 말없이 한숨만 쉬었다. 이젠 무엇을 어떻게 도와줘야 좋을지도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때 쏙의 집에서 처음 보는 남자아이가 뛰어나왔다. 그 아이는 쏙의 엄마가 최근에 입양한 아이였다. 닥터 후는 집세도 내기 빠듯한 집에서 아이를 입양해서 어떻게 키우겠다는 것인지 의아했다. 그리고 쏙은 사실 자신도 입양아라는 충격적인 사실을 밝혔다. 닥터 후는 언젠가 캄보디아에서는 노동력을 착취할 목적으로 아이를 입양하기도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는데, 아마 쏙과 이 남자아이도 그런 목적으로 입양된 것이 아닌가 의심했다. 닥터 후는 왜 쏙이 다른 두 언니들과 외모가 다르고 늘 어머니와 언니들에게 자신의 것을 빼앗겼는지, 왜 쏙의 어머니가 갑자기 찾아와 대뜸 쏙과의 결혼을 허락한다며 돈을 요구했는지, 모두 이해가 갔다.
「이젠 어떻게 할 것이냐?」 닥터 후는 정말 묻기 싫었지만 또다시 쏙에게 물었다.
「착즙기를 구입해 사탕수수 주스를 팔고 싶어요.」
하지만 닥터 후에게는 ‘엄마가 당신에게 착즙기를 사달라고 해서 사탕수수 주스를 팔고 돈을 벌어서 가져오래요’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닥터 후는 또다시 고민에 빠졌다.
다음날 닥터 후는 학과장에게 사탕수수 주스를 팔면 먹고 살만 한지 물었다. 학과장은 사탕수수 주스를 팔아서 돈 못 벌었다는 얘기는 못 들어봤다고 말했다. 닥터 후는 결자해지하는 심정으로 착즙기를 사주기로 했다. 하지만 쏙은 어찌 된 일인지 착즙기를 사주겠다는 그의 말에도 기뻐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대신에 개미 같은 목소리로 미용술을 배우고 싶다고 말했다. 장사가 아닌 미용술을 배워서 돈을 벌고 싶다는 것이다. 이 일은 자신과 잘 맞을 것 같다고. 그리고 자신이 몸으로 습득한 기술은 엄마도 언니들도 빼앗아 갈 수 없을 것 같다고. 닥터 후는 쏙의 말을 듣고 미소를 지었다. 쏙이 처음으로 그의 권유나 엄마의 바람이 아닌 스스로 하고 싶은 일을 말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닥터 후는 쏙이 미용술을 배울 수 있도록 도와줬다. 정말로 이번이 마지막이어야 한다고 다짐하며 말이다.
그 후로 쏙은 남동생과 언니들의 머리와 얼굴에 그날 배운 것을 연습하며 즐겁게 미용술을 배우고 있다. 그리고 매달 말 집세와 학원비를 받아갈 때 빼고는 닥터 후를 찾지 않는다고 했다. 닥터 후는 쏙에게 미용술을 배우러 다닐 때 타고 다니라며 혼다 드림(Honda Dream) 오토바이를 중고로 사줬다. 쏙과 잘 어울리는 오토바이였다. 그 후 그녀는 매일같이 이 오토바이에 메이크업 박스를 싣고 미용술을 배우러 다니고 있다.
「이제 조금 있으면 시장 한쪽에 미용실을 차리게 밑천을 대 달라며 찾아오겠는데요?」 내가 장난조로 말했다.
「하하하. 정말 그럴지도 모르지.」
「그때도 미용실을 열라고 밑천을 대주실 거예요?」
「아이고, 하하하. 도와줘야지. 그렇게라도 돼서 찾아오면 다행이지.」
스물아홉 나의 캄보디아 STAY, NOT ST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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