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저녁에 강변을 걸었다. 낮에는 독서를 하거나 글을 썼고, 오후에는 사진을 찍었다. 누구 말처럼 참 팔자가 좋았다. 생각은 많았다. 미래에 대한 고민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나는 강변을 걸으면서 이것들을 정리했다. 어떤 고민은 쉽게 결론에 이르렀고, 어떤 고민은 결론을 낼 수 없어 흐르는 강물에 띄어서 보냈다. 이렇게 하나둘씩 정리하다 보면 결국 강변을 걷고 있는 나만 남았다.
이곳에서는 하릴없이 강변을 거닐며 생각에 잠겨도 전혀 무의미한 시간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여행이 주는 여유였다. 이전까지 나는 현재나 미래에 대해서만 생각했지 과거를 돌아보는 일은 잘 하지 않았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기도 했지만 어쩌면 돌아볼 만큼의 과거가 없었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제는 돌아보고 한 번 정리를 할 만큼 과거가 쌓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10대를 태권도 겨루기 선수로 보냈다. 초등학교 6학년이 끝나갈 즈음이었다. 여러 대회에서 입상을 했고, 한 중학교 태권도부 감독님이 부모님을 찾아왔다. 어른들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부모님은 곧장 점을 보러 가셨고, 점술가는 내 가슴에서 태극 마크가 보인다고 말했다. 그렇게 나는 태권도 선수의 길로 들어섰다.
하루 종일 운동을 했다. 중학교 때까지는 그럭저럭 학교 수업에 참석했지만,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아침부터 저녁까지 운동만 하는 생활이었다. 한때 좋은 스승님을 만나 잠시 빛났던 때도 있었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부상이 잦았고, 특별한 재능도 없던 나는 정체됐다. 그러던 어느 날 대학을 결정지을지도 모르는 중요한 대회를 앞두고 또 부상을 당했다. 고등학교 내내 나를 괴롭혔던 골반 부상이었다.
1학년 때 왼쪽 골반이 부러졌다. 병원에서는 성장기가 완전히 지날 때까지 조심해야 한다고 했는데 이 부상이 도진 것이다. 발을 들어 올리는 것조차 힘들었다. 마음이 약해질 대로 약해졌다. 그러던 중 대진표를 받았다. 이전 대회에서 나를 가볍게 이긴 상대와 다시 만나는 대진이었다. 나는 아주 커다란 벽을 느꼈다. 도저히 넘을 수 없는 벽이 앞에 있는 것 같았다. 처음으로 도망치고 싶다고 생각했다. 결국 대회를 기권했다. 이유는 부상이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전부는 아니었던 것 같다.
사실 승부의 세계는 나와 맞지 않았다. 어느 날 훈련이 끝나고 시퍼렇게 멍든 몸을 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다 그만두고 싶었다. 팔이 욱신거리고 아팠다. 중학교 때 팔이 부러져 철심을 박았다 제거한 자리였다. 다리에 멍이 들었고, 발바닥은 물집이 까져서 피가 났다. 내가 아픈 것도 싫었지만 남을 발로 차서 아프게 하는 것도 싫었다. 운동이고, 경기일 뿐인데 납득하지 못했다.
태권도를 그만두기로 결심한 후 나는 학교를 중퇴했다. 그곳이 싫었다. 운동만 하던 그곳이. 땀 냄새와 파스 냄새로 범벅된 라커룸도. 이듬해 나는 검정고시를 준비했고 그렇게 20대가 시작됐다.
검정고시를 보고 나서 얼마 후 나는 어머니를 모시고 건강검진차 병원에 갔다. 어머니가 수면 내시경 검사를 하는 동안 복도 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그곳에 ‘씨네21’이라는 영화 잡지가 있었다. 씨네21을 읽다가 눈에 띈 건 어느 대학의 영화과 신입생 모집 공고였다. 학생들이 커다란 카메라, 긴 봉에 달린 마이크를 들었고, 남녀 배우가 그 앞에서 연기를 하고 있었다. 이 장면을 보자 가슴이 두근댔다. 생뚱맞게 나도 영화를 한번 찍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운명이야 하는 찌릿함도 있었다.
학교에 입학한 후 단편영화 두 편을 연출했다. 그때까지 해본 일 중에서 가장 힘들었고 또 가장 재미있었다. 기획을 하고, 시나리오를 쓰고, 배우를 캐스팅하고, 촬영을 하고, 편집을 하고, 학기말에 상영도 했다. 나는 그렇게 계속 영화감독을 꿈꾸며 20대를 보낼 줄 알았다.
2학년 1학기를 마치고 군대에 가야했는데, 이때 알게 된 게 바로 코이카였다. 코아카에는 다양한 형태의 해외봉사단원을 모집하고 있었는데, 국제협력봉사요원이라는 개발도상국에 공익근무요원으로 파견되는 제도가 있었다. 마침 태권도 분야로 지원이 가능했다. 듣도 보도 못한 중미의 엘살바도르에 가서 태권도를 가르친다니, 이 또한 가슴 뛰는 일이었다. 역시 그전까지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일이기도 했다.
코이카에 합격한 후 나는 엘살바도르에 파견됐다. 그곳에서 26개월 동안 있으면서 현지의 아이들을 대상으로 태권도 수업을 했다. 도망치듯 태권도를 그만뒀지만 오랜만에 도복을 입으니 기분이 아주 좋았다.
엘살바도르는 내가 살던 세상과는 아주 많이 달랐다. 날씨, 음식, 언어, 문화 등이 모두 낯설었다. 치안도 나빠서 적응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현지인들은 정이 넘쳤고, 내게 호의적이었다. 덕분에 무사히 활동할 수 있었다.
전혀 다른 환경에 있으면서 이전에 몰랐던 또 다른 나를 발견했다. 나는 주로 태권도 사범으로 일을 했지만 일을 하고 남는 시간엔 사진을 찍었다. 강렬한 태양과 도처에 널린 원색들에 매료돼 해가 질 때까지 돌아다녔다. 어떤 날은 한 곳에 가만히 멈춰 서서 한두 시간씩 원하는 장면을 기다리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사진을 찍을 때 가장 중요시하는 건 천천히, 두리번거리며 걸을 수 있는 여유를 갖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이게 쉽지 않았다. 늘 무언가에 쫓기듯 하나를 찍으면 빨리 다음 걸 찾아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다. 그런데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좀 더 천천히 걷고, 언제든 멈추고 싶을 때 멈추고 싶어졌다. 그곳에서 내가 발견한 건 여유가 있는 나였다.
엘살바도르에 다녀온 후 곧바로 복학했지만 대학 생활은 이전만큼 재밌지 않았다. 영상보다는 사진이 더 좋아졌고, 한국보다는 외국에 살고 싶었다. 당시 나는 좋은 기회를 만나 엘살바도르에서 찍은 사진들로 사진집을 냈고, 귀국하는 길에 다녀온 쿠바 여행을 여행기로 정리해 어느 공모전에 당선되기도 했다. 사진과 글쓰기를 취미 이상으로 여기기 시작한 것도 이 즈음이었다.
한국에 있었지만 나는 엘살바도르를 잊지 못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과 강렬한 태양, 다채로운 색깔들, 현지어로 쓰던 스페인어까지 모든 게 그리웠다. 나는 역으로 향수병에 걸렸다. 한국으로 돌아오니 엘살바도르가 마치 고향처럼 느껴졌다. 결국 나는 휴학을 하고 다시 엘살바도르로 떠났다.
이십 대에는 매사가 이런 식이었다. 뭔가에 끌린다 싶으면 그 일을 해야 했다. 그만큼 뭔가를 그만두는 일에도 거침이 없었다. 그러다보니 제대로 매듭지지 않은 일들이 많았다. 그때 그걸 더 꾸준히 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후회를 할 때도 있지만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아마 나는 똑같은 선택을 할 것 같다.
제이는 아직 프놈펜에 있었다. 나는 해 질 녘에 혼자서 강변을 걸었다. 사람들은 잠옷 차림으로 나와서 더위를 식혔다. 툭툭 기사들도 영업이 끝났는지 호객을 하지 않았다. 그냥 의자에 누워 강바람을 즐기는 듯 보였다. 젊은 승려들 무리가 보였다. 망토를 두른 것 같은 오렌지색 승복이 편안해 보였다. 짙은 황톳빛 강을 따라서 작은 노점들이 늘어섰다. 바비큐를 굽는 곳도 있었고, 쌀국수를 파는 곳도 있었다. 작고 아기자기한 식탁에 사람들은 쪼그리듯 앉아서 식사를 했다.
강변 한쪽 광장에 태권도복을 입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도복에는 ‘경희대 을지’, ‘국가대표탑’ 같은 글자가 한글로 적혀있었다. 대략 서른 명 정도 돼 보였는데, 크게 두 무리로 나눠 훈련을 하고 있었다. 인원이 적은 것도 아닌데 꽤 질서 정연했다. 이들은 열을 맞춰 앞에 있는 사범의 동작을 따라했다. 이내 품새를 시작했는데 동작에 절도가 있었다. 도복 소매에서 나는 소리가 듣기 좋았다.
해가 지고 어둠이 내렸다. 강변에 가로등이 켜졌다.
언젠가 바탐방 여행 안내서를 보다가 상커 강변에 나이트 마켓이 있다는 내용을 보고 의아했던 적이 있었다. 바탐방에 온 후 매일 강변을 산책했지만 나이트 마켓 같은 건 없었기 때문이다. 내게 나이트 마켓 하면 떠오르는 건 일시적으로 차들의 통행을 막아 놓고 빈틈없이 다닥다닥 붙은 노점과 좌판들이 끝없이 늘어진 광경이었다. 이렇게 작은 규모로 뜨문뜨문 있는 노상들, 흔한 수공예품 하나 없는 모습은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서 바탐방의 나이트 마켓은 여행 안내서에 소개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해 보였다. 아무리 둘러봐도 강변에 있다는 것 말고 내세울 것이 하나도 없었다.
나는 이 특별할 것 없는 나이트 마켓에서 저녁을 먹었다. 나는 프사 낫 바로 옆에 있는 크메르 누들(Khmer noodle)이란 노상 식당에 들어가 비프스튜 누들과 맥주를 주문했다. 잠시 후 음식이 나왔다. 우선 스튜부터 한입 먹었다. 스튜에선 매우 복잡한 맛이 났다. 기본적으로 아주 질긴 소고기가 있었고 코코넛밀크와 고수가 맵고 단 소스와 뒤엉켜있었다. 국수는 불어서 젓가락으로 들어 올리기만 해도 끊어졌다. 면을 몇 번 들었다 놨다 했을 뿐인데 금세 죽처럼 변했다. 이 모든 재앙으로부터 스튜를 구원하겠다고 나선 숙주만이 특유의 아삭한 식감을 냈지만 혼자 감당하기엔 벅찼다. 음식을 삼킨 후 느껴지는 조미료의 텁텁함을 맥주로 가셔보려고 했지만, 맥주는 미지근했다. 맥주와 함께 얼음이 담긴 잔을 줬는데, 시원함을 포기할 것인지 맛을 포기할 것인지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맛을 포기했다.
산책로 옆 갓길에는 오토바이나 자동차를 개조해 만든 포장마차들도 있었다. 그중 사람들이 유독 많이 모여 있는 곳이 눈에 띄었다.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 보니 모녀가 함께 볶음국수를 팔고 있었다. 딸은 주문을 받았고, 요리는 어머니가 했다. 조리대에는 각양각색의 조미료와 소스 병들이 정렬해 있었다. 국수를 볶는 손놀림이 분주했다. 중식 팬 안에서 튀어 오르고 섞이는 식재료들을 보고 있으니 다시 입에 침이 고였다. 나도 볶음국수를 하나 주문했다. 이름 모를 흰 조미료를 기본으로 설탕, 굴소스, 코코넛밀크, 칠리소스, 토마토케첩, 마늘기름, 고추기름을 팬에 넣고 각종 야채와 함께 볶았다. 국수를 볶던 아주머니가 내게 캄보디아어로 무언가를 물었다. 나는 이해를 못하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스파이시(Spicy)?」 엄마 대신 딸이 물었다.
「네!」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딸은 어머니에게 통역을 해줬고 어머니는 미소를 지었다.
「뜨리싸우전풔헌드레드 리엘(3,000리엘)!」 딸은 국수를 내게 건네며 큰 소리로 말했다.
내가 돈을 건네자, ‘쌩큐! 쌩큐!’ 하며 엄마와 딸이 자지러지게 웃었다. 나도 웃음이 났다. 이런 게 바로 노점에서 현지 음식을 사 먹는 재미랄까. 맛도 있었다. 이전 스튜의 실패를 잊고도 남을 맛이었다.
나이트 마켓은 그 규모만큼이나 특유의 밝고 활기찬 분위기가 중요하다. 이런 점에서 적어도 바탐방의 나이트 마켓은 이중 하나의 조건은 충족하고 있었다.
차야 아파트로 돌아왔을 때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빗방울이 주차장의 양철 지붕을 두드렸다. 타닥타닥. 흙냄새가 났다. 나는 잠시 쭈그리고 앉아 떨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봤다. 어느새 땅은 다 젖었고, 곳곳에 웅덩이가 생겼다. 크마우가 내 옆에 와 앉았다. 빗줄기가 점점 굵어졌다. 지붕을 때리는 소리도 점점 증폭됐다. 그리고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빗소리도, 지붕을 때리는 소리도. 심지어는 고요하다는 착각까지 들었다. 그렇게 나는 떨어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떠오르는 생각을 지워나갔다.
스물아홉 나의 캄보디아 STAY, NOT ST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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