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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쭝 브런치 Aug 03. 2018

야생동물





   「똑똑똑」

    노크소리에 잠에서 깼다. 공기가 차가웠다. 해먹에서 나오려는데 몸이 물에 젖은 솜처럼 무거웠다. 나는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아침 내내 울던 닭들이 마루 위에 발톱 자국을 내며 돌아다녔다. 간밤에 재는 모두 식었지만 신발은 전혀 마르지 않았다. 나는 젖은 신발에 발을 넣었다. 축축하고 무거웠다. 

   「잘 잤어요? 아침 먹어요.」 사믄이 문 밖에서 말했다. 



    밖엔 옅은 안개가 깔려 있었다. 집 앞에 은색 접이식 식탁을 펼쳐 놓고 인스턴트커피와 계란프라이, 구운 바게트, 몽키 바나나를 차려놨다. 나는 세수도 하지 않고 앉아서 식사를 했다. 따뜻하고 달콤한 커피 맛이 좋았다. 커피는 역시 분위기다. 

    가축들은 딱히 목적 없이 돌아다녔다. 새끼 돼지들은 어미 돼지 뒤를 따랐고, 물소는 위협적인 뿔을 앞세우고 어슬렁거렸다. 오토바이에 식음료를 실은 행상인이 나타나자 부스스한 머리를 한 아이들이 몰려들었다. 맞은편 움집 앞에 있는 여물통엔 어미 돼지와 새끼 돼지들이 한데 머리를 박고 여물을 먹었다. 

    아침 식사를 마친 후 내가 멍하니 있자 사믄이 재촉했다. 오늘은 반나절만 트레킹을 하기 때문에 시간이 촉박했다. 그는 어제와는 달리 그리 힘든 코스는 아닐 거라고 말했다. 물론 나는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는 펑퍼짐한 바지를 펄럭이며 앞장섰다. 나와 달리 그의 발걸음은 가벼워 보였다. 그는 전날 입었던 옷과 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혹시 같은 옷이 여러 벌 있는 게 아닐까 해서 봤지만, 바지의 밑단이 헤진 것과 상의에 땀이 말라 생긴 얼룩은 어제의 것과 같았다. 옷을 갈아입지 않은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한동안 빨래를 하지 못했고 앞으로도 언제 다시 빨래를 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마지막 남은 뽀송뽀송한 옷 한 벌을 트레킹을 위해 입을 수는 없었다. 

    출발한 지 얼마 안 돼 코끼리를 만났다. 정확하게 말하면 코끼리의 거대한 똥을 먼저 만난 후 코끼리를 만났다. 코끼리는 생각보다 작았다. 사믄은 그 코끼리를 깐톰이라고 불렀다. 그는 잠시 깐톰을 쓰다듬더니 이내 인사를 하고 앞질러 갔다. 

    사믄은 어제와는 달리 시종일관 느린 걸음을 유지했다. 우리는 따뜻한 햇살을 느끼며 한적한 시골길을 걸었다. 소들의 목에 멘 방울소리가 들렸다. 사믄은 소를 방목해 키우다 보니 찾기 쉽게 목에 방울을 단 것이라고 했다. 가끔 외딴집이 나오면 잠시 들어가서 쉬었다. 집은 비어있기도 했고, 누군가 살고 있기도 했는데 딱히 허락을 구할 필요는 없었다. 사람이 없으면 없는 대로 들어가 쉬었고, 있으면 집주인이 내준 자리에 잠시 앉았다가 갔다. 나는 난생처음 벼밭을 보기도 했다. 잘 익은 벼이삭들을 손바닥으로 쓸며 지날 땐 수확을 앞둔 농부라도 된 양 흐뭇했다. 

    숲속에 들어갔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커다란 스펑나무(Spung tree)였다. 사믄은 그중 가장 큰 나무를 가리키며 나이가 2,000살도 더 됐다고 말했다. 나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크기에 압도돼 그의 말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나무의 줄기는 성인 네다섯 명이 팔을 벌려야 두를 수 있을 만큼 두꺼웠다.  

    사믄은 신기한 생물이 나올 때마다 조용히 나를 불러 그것을 보여줬다. 몸을 줄였다 늘리며 느릿느릿 나아가는 커다란 애벌레부터 민달팽이, 생전 처음 보는 모양의 갑충류, 다리가 바늘처럼 길고 뾰족한 거미까지. 어떤 폭포를 지날 땐 그 뒤에 있는 동굴로 데리고 가 거꾸로 매달려 자고 있는 박쥐도 보여줬다. 

    한참을 걷다가 계곡에 도착했다. 사믄은 윗옷을 벗고 계곡 물에 뛰어들었다. 높은 곳에 올라가 다이빙도 하고 반얀나무(Banyan tree)의 가지에서 뻗어 나온 뿌리를 잡고 타잔처럼 물에 뛰어들기도 했다. 나도 그를 따라서 바위에 올라가 다이빙을 했다. 물은 굉장히 시원했다. 나의 어설픈 다이빙 때문에 수면에 등짝을 부딪히기도 했지만 아프기는커녕 계속 웃음이 났다. 우리는 입술이 파래질 때까지 다이빙을 했다. 

    계곡에는 모기가 많았다. 모기 기피제를 아무리 뿌려도 야생의 모기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 오히려 내가 모기 기피제에 취해 쓰러질 지경이었다. 사믄과 나는 모기를 잡겠다고 허공에 대고 손바닥이 얼얼해질 때까지 박수를 쳐댔다. 그런데 우리의 피를 원하는 건 모기만이 아니었다. 거머리도 다리에 붙어 피를 빨았다. 어디서 나타나는지 하나를 떼어내고 보면 어느새 또 하나가 붙어 있었다. 거머리는 한번 붙으면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그때마다 요령을 아는 사믄이 내 다리에서 거머리를 떼어 주었다. 우리는 이 집요한 흡혈 생물들을 피해 서둘러 계곡을 떠났다. 하지만 그 후에도 숲을 걷다가 발목이 따끔해서 보면 검은색 거머리가 피를 빨고 있었다. 정말 집요했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거머리가 아니었다. 앞서가던 사믄이 걸음을 멈추더니 작전 수행을 하는 특공대처럼 말없이 손바닥을 펴 멈추라고 지시했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비어」 그가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비어?」 나는 맥주를 떠올리며 되물었다.  

    사믄이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상황에는 맞지 않았지만 굉장히 반가운 소리였다. 머리가 띵할 정도로 차가운 맥주를 기대할 수는 없겠지만 맥주를 마실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아니면 잠시 계곡물에 담가 시원하게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나의 갈증은 절정에 달해 있었지만 그 정도의 인내심은 남아 있었다. 

   「맥주가 어디에 있어요?」 내가 물었다. 

   「이 숲 어딘가에 있어요.」 그가 대답했다. 

   「이 숲이라고요? 당신의 가방에 있는 게 아니고요?」

    내가 손으로 맥주잔을 들고 마시는 시늉을 하자 그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는 손가락을 말아 동그랗게 만들더니 나무에 오르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는 손가락으로 나무 하나를 가리켰다. 그가 가리킨 나무의 줄기엔 낫 같은 것에 패인 자국이 나 있었다. 

   「비어」 그가 반복해서 말했다. 

   「비어…. 혹시 베, 베어?」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맥주가 아니라 곰을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무에 난 커다란 흔적은 곰이 발톱으로 파 놓은 것이었다. 그는 밤부 스틱으로 바닥에 뒹구는 텅 빈 벌집을 가리켰다. 그는 곰이 나무에 있는 벌집을 꺼내 꿀을 빼먹었다고 했다. 곰이 꿀을 먹는다는 건 『곰돌이 푸』에나 나오는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실제로 꿀을 먹는 줄은 몰랐다. 

   「사믄, 그러니까 이 숲에 곰이 산다는 거예요?」  

   「네.」

   「오늘 우리가 곰을 만날 수도 있어요?」

   「네, 운이 나쁘면요.」

    이때 갑자기 무언가가 우리 머리 위를 빠르게 지나갔다. 그것이 지난 자리엔 나뭇잎 몇 개가 빙글빙글 돌며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순간 몸이 굳어 그 자리에 움직이지 못하고 서 있었다. 등골이 오싹해졌다. 

   「원숭이가 지나갔어요.」 사믄이 말했다. 

   「원숭이?」

   「요즘은 통 안 나타나서 못 보고 가는 줄 알았는데, 운이 좋네요.」

    원숭이들은 날렵한 몸놀림으로 나무 사이를 넘나들었다. 어찌나 빠르던지 뒤꽁무니를 잠시 본 게 다였다. 그조차도 사믄이 방향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면 놓쳤을 것이다. 그는 반가운 친구라도 본 듯 떨어지는 나뭇잎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다른 야생동물들도 많은데 안 보이네요. 곰을 제외하고는 그렇게 위험하지 않거든요. 아쉽지만 이런 날이 종종 있어요.」

   「괜찮아요. 그리 아쉽지는 않네요. 하하하.」

    정글 트레킹을 한 목적 중에 하나는 야생동물을 실제로 만나 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곰의 흔적과 날렵한 원숭이를 보자 그 생각이 확 달아났다. 그들은 힘세고 빠른 존재들이었다. 밤부 스틱 따위는 금방 낚아채 분질러 버릴 것이다. 나는 사믄에게 야생동물은 텔레비전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말했다. 다시 마을로 돌아올 때까지 그에게는 아쉽지만 나에게는 다행히도 더 이상 야생동물을 만나는 일은 없었다.   

    이로써 모든 트레킹이 끝났다. 내가 짐을 다 싸고 나오자 전날 정글 초입까지 데려다 주었던 남자가 나를 데리러 왔다. 

   「사믄, 이 밤부 스틱은 돌려줄게요. 이건 트레킹을 할 때가 아니면 쓸 일이 없을 테니까요.」

   「네, 알았어요.」 그가 밤부 스틱을 받았다.

   「잊지 못할 추억이 될 거예요. 고마워요.」

   「정말이죠?」 그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정말로요.」 

   「사실 어제 당신의 표정이 너무 안 좋아서 트레킹이 마음에 안 드나 했어요.」

   「그렇지 않아요. 단지 조금 힘들었을 뿐이에요.」 

    분명 뙤약볕 아래서 풀숲을 헤치고 나아가는 건 힘들었다. 하지만 힘들다고 해서 그게 꼭 나쁜 경험이라고는 할 수 없다. 기억은 시간이 지나면 미화되기 마련이니까. 오해가 풀렸는지 그가 웃었다. 

   「우리 같이 사진이나 찍을까요?」 내가 말했다. 

   「좋아요.」 사믄이 말했다. 

    먼저 우리 둘이 함께 찍었다. 그러고 나서 사믄은 자신의 가족들을 불렀다. 그의 아내와 아이들이 우리 옆에 와서 나란히 섰다. 그의 가족과 사진을 찍은 후 이번에는 근처에 있던 아이와 어른들도 우리 옆에 와서 섰다. 갑자기 동네 사람들과의 단체 사진이 됐다. 

    다시 시내로 돌아가는 동안 머릿속에 내가 걸었던 풍경들이 스쳤다. 내 키보다 높은 풀숲, 벼밭이 있는 시골길, 질퍽한 진흙, 넓고 물살이 세던 냇물, 더위를 식혔던 계곡, 그리고 다양한 정글 생물들까지 머릿속에 떠오른 풍경들은 너무도 변화무쌍해서 하나의 그림으로 모아지지 않았다. 그리고 곰을 만나지 않은 건 정말 다행이었다.



    다시 여행사로 돌아왔을 때, 톤이 나를 반겨줬다. 그의 옆에는 꽁지머리를 한 사내가 함께 있었다.

   「트레킹은 어땠어요? 코끼리랑 놀 걸 후회했죠?」 톤이 말했다.

   「아니요. 트레킹은 좋았어요. 다시 하라고 하면 못 하겠지만요.」 내가 웃으며 말했다. 

    꽁지머리 사내가 내게 조그마한 술잔을 건넸다.    

   「쓰라삐앙인가요?」 

   「맞아요. 어떻게 알았죠?」

   「다들 제게 이 술을 권하던 걸요.」

    나는 그가 준 술을 받아 마셨다. 달았다. 이곳에서는 쓰라삐앙이 인사 대신인 것 같았다.

   「이제 어디로 갈 건가요?」 톤이 물었다. 

   「끄라쩨로 갈 겁니다.」 내가 말했다. 

   「오, 끄라쩨라구요? 제 고향이 끄라쩨예요. 그곳은 제가 잘 알죠. 숙소는 정했나요?」 꽁지머리 사내가 말했다. 

   「아직….」

   「그럼 ‘실버 돌핀 게스트 하우스(Silver Dolphin Guesthouse)’로 가세요. 거기서 ‘미스터 픽’이라는 사람에게 내 소개로 왔다고 하면 싸게 묵을 수 있을 겁니다. 참고로 5달러가 넘는 방을 추천하면 거절하시고요.」

   「고마워요. 가서 미스터 픽을 찾아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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