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둘끼리행 버스를 탔다. 나는 반룽 때처럼 중간에 내팽개쳐지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도중에 내리라고 해도 절대 내리지 않으리라. 이런 의심은 극에 달해서 실제 몬둘끼리의 주도인 센 모노롬(Sen Monorom)에 도착했을 때도 나는 선뜻 버스에서 내리지 못했다. 구글 지도도, 운전기사도, 승객들도, 심지어 버스 밖에 있는 가게들의 간판까지도 내가 센 모노롬에 잘 도착했다고 했지만 나는 확인의 확인을 거듭한 후에야 버스에서 내릴 수 있었다.
캄보디아는 국토의 대부분이 평지지만, 센 모노롬은 해발 800미터의 비교적 높은 곳에 위치한다. 나는 버스에서 내릴 때 막 가을 날씨가 시작된 어느 나라에 도착한 듯 기후가 완전히 달라졌다고 느꼈다.
센 모노롬은 언덕에 위치했는데, 경사진 길을 따라 잡화점과 식당, 게스트 하우스, 카페, 은행, 재래시장, 운송회사 사무실 등이 늘어서 있었다. 이곳에선 스쳐 지나만 가도 나를 보고 웃어 주는 사람들이 많았다. 도시에서 멀어질수록 사람들은 이방인에게 더 따뜻했다.
나는 여행사 바로 옆에 있는 게스트 하우스에 짐을 풀었다. 그리고는 곧장 여행사로 갔다. 사무실 안에는 윤기 나는 올백 머리에 쫄티를 입은 남자가 있었다. 그는 자신을 톤이라고 소개했다.
「우리가 가진 옵션은 다섯 개예요.」 그가 전단지를 보여주며 얘기했다.
1. 하루 동안 코끼리와 놀며 추억 쌓기
2. 하루 동안 정글 트레킹 하기
3. 이틀 동안 정글 트레킹 하기(정글에서의 캠핑 포함)
4. 1번+2번(정글을 트레킹하고 코끼리와 놀며 추억 쌓기)
5. 몬둘끼리 경치 둘러보기
「코끼리는 매우 순한 동물이라 당신을 해치는 일은 결코 없을 겁니다.」
‘코끼리와 놀며 추억 쌓기’는 그가 추천하는 투어였다. 그는 이 투어의 장점을 적극적으로 설명했다.
하지만 손바닥만 한 강아지와도 놀기 싫어하는 내가 돈을 내면서까지 코끼리에게 먹이를 주고, 산책을 시키고, 목욕까지 시키는 수고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꼭 그들이 해야 할 일을 내가 대신 하는 것 같지 않은가. 톤의 설명을 계속 듣다 보니 내가 투어를 신청하러 온 건지 코끼리 사육사 취업 면접을 보러 온 건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그의 말이 더 이상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틀 동안 정글 트레킹 하기가 낫겠어요.」 내가 말했다. 언제까지 코끼리 얘기만 듣고 있을 수는 없었다.
「정글 트레킹 좋죠.」 그는 조금 아쉬운 듯 말했다.
톤은 공책을 꺼내 비뚤비뚤한 선을 하나 그렸다. 그리고는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트레킹 코스를 설명했다. 정글 입구에서부터 소수민족이 사는 마을까지 트레킹을 한 후 그곳에서 하룻밤을 묵고 또 반나절 동안 트레킹을 하고 돌아오는 코스였다.
「가격은 80달러예요. 내일 출발 전까지 일행이 한 명이라도 생기면 55달러로 깎아줄게요. 숙식이 포함된 가격이니 그리 비싼 건 아닙니다. 그럼 내일 아침에 보죠.」
다음 날 아침. 나는 준비를 마치고 게스트 하우스를 나왔다.
「톤, 동행할 사람은 생겼나요?」
「아쉽지만, 혼자 트레킹을 해야 할 것 같네요. 우기엔 트레킹을 하려는 사람들이 잘 없어요.」
「어쩔 수 없죠.」
「오늘 투어를 이끌 가이드를 소개할게요. 사믄이에요.」
톤이 소개한 남자는 맨발에 샌들을 신고, 허리춤에 커다란 정글도를 차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사믄이 악수를 청했다.
「반갑습니다.」 나는 그의 손을 맞잡았다.
나와 사믄은 사무소 직원의 차를 타고 정글 입구로 갔다.
「천천히요? 빨리요?」 정글 입구에서 그가 내게 물었다.
「천천히요.」 내가 대답했다.
초입은 일반 등산로와 다름이 없었다. 편편한 흙바닥에 양옆으로 울창한 나무들이 솟아있었다. 얼마 안 가 커다란 나무들 사이로 대나무 숲이 나왔다.
「등산용 스틱은 가지고 왔어요?」 앞서 걷던 사믄이 물었다.
「그런 건 안 가지고 왔는데….」
내 대답을 들은 사믄은 정글도를 꺼내더니 대나무가 우거진 곳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칼로 나무를 후려치는 소리가 들렸다. 대나무 몇 개가 흔들리고 지들끼리 부딪히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정적 속에서 나뭇잎만 살랑살랑 떨어졌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대나무 숲에서 무림 고수들 간의 결투가 벌어진 줄 알았을 것이다. 대숲 사이로 다시 모습을 드러낸 사믄은 양손에 굵고 단단해 보이는 대나무 두 개를 들고 있었다.
「밤부 스틱(Bamboo stick).」 그는 치열한 결투에서 전리품이라도 얻어온 듯 당당했다. 끝이 잘 정돈된 밤부 스틱을 하나는 그가 갖고 나머지 하나는 내게 줬다.
밤부 스틱을 받고 얼마 안 가 바닥이 질퍽해지기 시작했고, 나뭇잎들은 짙은 비취색을 냈다. 이젠 뒤를 돌아봐도 내가 지나온 길이 어디였는지 확실히 알 수 없었다. 숲으로 들어갈수록 바닥은 질퍽하다 못해 군데군데 웅덩이까지 있었다. 신발은 이미 다 젖었고 황토색으로 물들었다. 바닥도 미끄러웠다. 갑자기 한쪽 다리가 앞으로 쭉 미끄러지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밤부 스틱 덕분에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밤부 스틱은 여러모로 쓸모가 많았다. 두 발로는 중심을 잡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카메라 삼각대처럼 안정적으로 중심을 잡을 수 있었고, 풀이나 나뭇가지들이 앞을 가로막을 때는 스틱을 휘둘러 길을 만들 수도 있었다. 무협지에 나오는 주인공이 된 양 스틱을 돌려보며 즐거운 상상을 할 수도 있고, 야생동물이 나타난다 해도 아무 저항 없이 당하진 않을 거란 헛된 용기를 갖기도 했다.
사믄은 쉬운 길과 어려운 길이 나오면 꼭 어려운 길을 택했다. 넓은 길과 좁은 길이 있으면 좁은 길로 가고, 좁은 길과 풀숲이 있으면 풀숲으로 가는 식이었다. 친한 친구였으면 당장 싸움이 났을 것이다. 풀숲엔 해를 가려줄 나무도 없었다. 땡볕 아래를 계속 걷다 보니 힘들다는 것 말고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나는 점점 지쳐갔고, 기계적으로 걷기 시작했다.
내 키를 훌쩍 넘는 풀숲에서는 그를 잃어버리기도 했다. 잠깐 사이에 그를 놓친 것이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에 섰다. 발을 뗄 수가 없었다. 어디로 가야할지도 모르고, 길을 잃을까 두려웠다. 나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크게 소리쳤다.
「사믄~!」
풀벌레 소리만 요란했다. 나는 다시 한 번 소리쳤다.
「사믄~!!!」
잠시 후 풀들이 마구 흔들리더니 그 사이로 그가 나타났다.
「사믄, 출발 전에는 천천히 가기로 했잖아요!」 내가 나무랐다.
「이 정도면 천천히 가는 건데….」 사믄이 어색하게 웃고는 다시 앞장섰다.
애초에 나는 자연경관을 보며 걷다가 가끔 귀엽고 신기한 야생동물도 마주치는 그런 트레킹을 기대했다. 그래서 트래킹 후 감명을 받아 환경보호단체에라도 가입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을까 약간의 기대도 했다. 하지만 그런 기대는 전부 사라지고 현실의 나는 풀숲에 둘러싸여 갈고리 모양의 가시들을 떼기 바빴다. 세계제초협회 같은 게 있다면 당장 가입해 세상의 풀을 모조리 베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 트레킹의 가장 큰 고비는 폭이 30미터는 돼 보이는 냇물을 건널 때였다. 톤이 트레킹 코스를 그렸을 때 이런 커다란 냇물이 있다는 말은 없었다. 나중에 사믄이 얘기해 준 것이지만 우리가 지나온 길은 원래의 트레킹 코스는 아니었다. 그는 내가 너무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 지름길을 이용했다고 했다.
냇물을 건너는 건 굉장히 위험해 보였다. 폭이 넓기도 했지만 유속이 너무 빨랐다. 사람이 다니는 길이었다면 징검다리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통나무를 눕혀 놓은 다리 하나쯤은 있었을 텐데 그런 것조차 없었다.
「사믄, 여기를 어떻게 건너요?」
「그냥 걸어서 건너면 돼요.」
「걸어서 건넌다고요? 가능해요? 떠내려가는 거 아니에요?」
「괜찮아요. 건널 수 있어요. 나만 믿어요.」
내가 주저하자 사믄은 안전하다는 걸 입증하기 위해 혼자서 냇물을 건넜다. 그는 중간에 한 번 휘청하기는 했지만 무사히 반대편에 도착했다. 그리고는 다시 내 쪽으로 돌아왔다. 나는 그의 손을 잡고 행여나 떠내려갈까 조심해서 발을 내디뎠다. 냇물의 중간에 이르자 물이 허벅지까지 왔고, 바닥이 미끄러워 발 디딜 곳을 찾기 힘들었다. 몇 번의 위기 때마다 초인적인 균형 감각을 발휘하며(이런 상황엔 평소에 경험하지 못한 집중력이 나오곤 한다) 간신히 냇물을 건넜다. 나는 묘한 성취감에 기분이 좋아졌다. 하지만 성취감을 만끽할 시간도 없이 재촉하는 사믄을 따라 다시 걷기 시작했다.
이후부터는 가파른 언덕길이었지만 나를 괴롭히던 풀숲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풀숲에서 해방됐다는 기쁨도 잠시였다. 가파른 언덕의 경사는 가도 가도 꺾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사믄은 ‘거의 다 왔다’는 말만 반복했다. 나는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바닥만 보며 걸었다. 강물에 젖은 옷은 내리쬐는 햇볕에 금방 말랐지만 금세 다시 땀으로 젖었다.
「거의 다 왔어요.」 그가 말했다.
나는 그가 또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천천히 간다고 하더니 빨리 가고, 거의 다 왔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아직 멀었다.
「딸랑딸랑~」 맑은 방울 소리가 들렸다.
나는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폈다. 풀을 뜯는 소가 보였다. 소의 목에 방울이 달려있었다. 소가 움직일 때마다 방울소리가 났다. 어느새 가팔랐던 언덕도 끝이 났다. 평지에 이르자 더 많은 방울 소리가 들렸다. 외딴집도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그의 마지막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능선 하나를 더 넘자 마을이 나타났다. 톳이 말한 소수민족의 마을이었다. 넓은 초원 위에 집들이 드문드문 있었고, 소, 돼지, 염소, 닭 등 가축들이 돌아다녔다. 시원한 바람도 불었다. 순식간에 완전히 다른 세상이 펼쳐진 것이다. 처음엔 이런 풍경을 보며 걷는 게 트레킹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이런 곳에 도착하는 게 트레킹이란 걸 깨달았다. 분명 시종일관 이런 모습이 이어졌다면 얼마 안 가 지루해졌을 것이다. 이런 풍경이 마지막에 나타나줘서 고마웠다.
사믄은 나를 커다란 움집으로 데리고 갔다. 움집은 작은 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으로만 그 안을 밝혔다. 중앙 통로를 사이로 양쪽에 평상이 있었고, 바닥엔 타고 남은 재와 희미한 불꽃이 있었다. 재에서 올라오는 연기가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평상에는 두 노인이 앉아 있었는데 사믄의 부모님이었다. 그들은 사믄에게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무어라 말했다. 사믄은 나를 통로 한쪽으로 데리고 가더니 커다란 항아리에 꽂혀 있는 대나무 빨대를 가리키며 마셔보라고 했다.
「이게 뭐예요?」
「쓰라삐앙(Sra Peang)이에요. 일종의 라이스 와인(Rice Wine)이죠. 아버지께서 당신을 환영하는 의미로 주시는 거예요.」
나는 빨대에 입을 대고 빨았다. 이내 시고 단 액체가 입 안에 퍼지더니 목이 뜨거워지고 코가 뻥 뚫렸다. 두 노인의 희미한 눈빛은 계속 나를 응시했다. 쓰라삐앙은 몬둘끼리 지방의 전통주인데, 쌀을 발효시켜 만든 곡주였다. 사믄도 빨대에 입을 대고 쓰라삐앙을 마셨다. 그는 갈증이 났는지 여러 번 빨대를 빨았다. 그리고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사믄은 움집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다른 집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넓은 널을 세로로 이어 붙인 벽에 주황색 골함석 지붕을 얹은 집이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재래시장에서 봤던 비취색 군용 해먹이 나무 기둥에 걸려 있었다. 모기장이 부착된 꽤나 유용한, 한 번쯤(혹은 딱 한 번만) 자봤으면 하는 해먹이었다.
사믄은 부엌에서 장작불을 피우고 저녁을 만들었다. 장작 냄새와 함께 구수하고 달콤한 향이 났다. 메뉴는 그린 파파야를 채 썰어 넣은 치킨수프와 흰쌀밥이었다. 사믄이 직접 요리하고 상까지 차렸다. 그는 대나무 잔을 두 개 가져오더니 쓰라삐앙을 가득 채웠다. 움집에서 마신 게 과하게 발효돼 시큼했다면 이번 건 소주와 막걸리 사이 어딘가에 있는 맛이었다. 달고 농도가 진한 것이 막걸리 쪽에 더 가까웠다. 잔에서 풍기는 은은한 대나무 향 덕분에 오래 숙성된 고급주를 마시는 느낌이었다. 그가 술을 권하면 나는 마시고 내가 빈 잔을 내려놓으면 그가 다시 잔을 채웠다. 그는 내 잔이 빌 틈을 주지 않았고 나는 그가 주는 술을 다 받아 마셨다. 술이 달았다.
시골의 밤은 일찍 찾아왔고 마을엔 완전한 어둠이 내렸다. 초저녁부터 먹구름이 껴 달이나 별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아직 열기가 남은 재 옆에 젖은 신발을 두었다. 날이 쌀쌀했는지 강아지와 새끼 돼지들이 신발 옆으로 와 나란히 누웠다. 나는 다음 날 있을 일정을 위해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여덟 시였다.
해먹에 눕자 천이 온몸을 감싸는 게 김밥 속이 된 기분이었다. 내가 해먹에 눕는 순간 기둥에 묶은 밧줄이 풀어지지는 않을까 걱정했지만, 막상 해먹 안으로 들어가자 쓸데없는 걱정이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나는 해먹에 금방 적응했고 한없이 평온한 상태가 됐다. 많이 지쳤는지 나는 그대로 곯아떨어졌다. 세상과 분리돼 아득히 먼 곳으로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냉동 인간이 된다면 이런 기분일까, 언젠가는 깨어날 테지만 아주 깊고 오랜 잠에 빠지는 기분 말이다.
밤 동안 굵은 빗방울이 지붕을 요란하게 두드렸다. 모기장 밖에선 모기들이 ‘잉잉’ 소리를 냈고 돼지들은 연신 방 안을 들락날락하며 꿀꿀거렸다. 이른 새벽부터 닭들은 목청 높여 울어댔고 밖에서는 알 수 없는 노랫소리도 들렸다. 하지만 그 무엇 하나도 거슬리지 않았다. 그제야 사믄이 왜 그렇게 쉼 없이 술잔을 채웠는지 알 것 같았다.
스물아홉 나의 캄보디아 STAY, NOT ST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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