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으로 계란프라이와 바게트를 먹으며 미리 예약한 벤을 기다렸다. 역시 이번에도 벤은 예약 시간보다 한 시간 늦게 도착했다. 이제 이 정도 늦는 건 충분히 예측 가능한 일이 되었다. 벤에는 총 네 명의 현지인들이 타고 있었다. 운전기사는 나보고 조수석에 타라고 했지만 나는 극구 거부하고 뒷좌석에 탔다. 자리에 앉으려고 하는데 안전벨트가 있어서 놀랐다. 처음에 캄보디아에서 버스나 벤을 타면 안전벨트가 없어서 놀랐는데, 이제는 안전벨트가 있을 때마다 놀란다. 대부분 안전벨트가 없거나 좌석 밑에 숨겨두기 때문이다. 벨트가 있다고 해도 열의 아홉은 고장 난 것이어서 힘이 빠지곤 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딸깍 소리를 내며 버클이 맞물렸을 때는 기분 좋게 놀랐다. 너무 당연한 건데 말이다.
구글 지도(Google map)로 라따나끼리의 주도(州都)인 반룽(Banlung)이 얼마 안 남은 걸 확인했을 때 벤은 휑한 도로 한가운데에 섰다.
「다 왔어요. 여기서 내리세요.」 운전기사가 내게 말했다.
「저는 반룽에서 내리는데요.」
「여기가 반룽이에요.」
「여기엔 아무것도 없는데요?」
「여기가 맞아요.」
운전기사가 닦달하는 바람에 나는 엉겁결에 벤에서 내렸다. 벤이 떠난 자리 위에 피어나는 흙먼지를 보면서 뒤늦게 뭔가 잘못됐다고 느꼈다. 나는 끝까지 내리지 말고 버텼어야 했다고 후회했다. 반룽은 라따나끼리의 가장 큰 도시인데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도시라고 할 만한 것을 찾을 수 없었다. 날은 매우 더웠고 수직으로 내리꽂는 햇빛은 앞으로의 일을 고민할 그늘조차 내주지 않았다. 그때 한 모토덥 기사가 나타났다.
「반룽까지 태워줄까요? 호텔도 소개해 줄게요.」
이상했다. 휑한 도로 한가운데에 있는 모토덥이라. 이 모든 게 계획된 속임수가 아닐까 의심이 들었다. 목적지 근처에 내려줬지만 목적지는 아닌 곳, 당황한 여행객이 발을 구르고 있으면 구원의 손길을 내밀 듯 나타나는 모토덥 기사, 눈에 빤히 보이는 술수였다. 이렇게 뒤통수를 맞다니.
「나에게 10달러만 주면 반룽까지 데려다주고 에어컨이 있는 숙소도 소개해 줄게요.」
「됐습니다. 걸어갈게요.」
나를 반룽까지 데려다 주고 요금과 숙소 소개비를 부풀려 받으려는 속셈이겠지. 어찌 보면 10달러에 편하게 시내로 가서 에어컨이 있는 방까지 소개를 받는 게 합리적일 것이다. 하지만 여러 정황들이 이대로 모토덥을 타면 호갱이 될 것이라 말하고 있었다.
그의 제안을 거절한 후 지도를 따라 걸었다. 20분쯤 걷자 팔이 여러 개 달린 신상이 나왔다. 신상의 시선이 향하는 쪽에 커다란 맥주 광고판이 있는 시가지가 있었다. 반룽 시내에 도착한 것이다.
나는 대로변에 있는 게스트 하우스에 방을 구했다. 2층 베란다에 세라믹 타일로 장식된 벤치가 인상적인 곳이었다.
반룽의 저녁은 특유의 분위기로 활기찼다. 맥주 광고판 아래 큰길을 따라 노점이 섰는데, 각 노점마다 백열등을 달아 거리를 밝혔다. 오후에 잠시 비가 내려 더위도 가셨다. 나는 한 노점의 노천 식탁에 앉아 어묵과 소시지튀김, 놈빵, 그리고 맥주를 주문했다.
식사를 마친 후 주인아주머니에게 라따나끼리에 아름다운 호수가 있다고 들었는데 아느냐고 물었다.
「이름이 보잉 엑….」
나는 론리 플래닛에서 본 그 호수의 이름이 떠오르지 않아 말끝을 흐렸다. 내 말을 들은 그녀는 가게 안에 있는 소년을 부르더니 무어라 말했다. 소년은 나를 잠깐 쳐다보더니 대로의 백열등을 등지고 어두운 골목으로 안내했다. 그곳엔 텅스텐 알전구 하나에만 의지해 평상에 둘러앉아 식사를 하고 있는 가족이 있었다. 통나무처럼 몸이 두꺼운 남자와 그의 아내, 그들 사이에 엉덩이를 맞대고 앉은 아이들이 있었다. 평상 옆에는 오렌지색 전구 빛에 반쪽만 모습을 드러낸 툭툭 한 대도 보였다. 소년은 캄보디아어로 남자에게 무언가를 말했다. 남자는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다.
「내 이름은 쓰나요. 어디를 가려고 하는데요? 폭포? 호수?」 그가 물엇다.
「이곳에 유명한 호수가 있다던데. 이름이 보잉 엑….」 나는 또 말끝을 흐렸다.
「보엥 익 롬(Boeng Yeak Lom)?」
「네. 거기가 맞는 거 같아요.」
「호수로 가는 길에 폭포가 있어요. 폭포 두 개와 호수까지 20달러로 합시다. 출발은 내일 오전 여덟 시, 묵는 곳을 알려주면 데리러 갈게요.」
「좋아요.」
그는 외국인 관광객을 많이 상대해 봐서 그런지 영어를 또박또박 알아듣기 쉽게 구사했다. 평소 같았으면 흥정을 해봤겠지만, 나는 그의 커다란 몸집과 위엄 있는 목소리에 기가 눌려 그런 시도를 할 생각조차 못했다.
다음 날 오전 여덟 시. 쓰나는 게스트 하우스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맨날 늦는 벤과는 달랐다. 캄보디아 사람들은 모두 시간 약속에 둔감한 줄 알았는데 꼭 그런 것만도 아니었다. 아마도 돈이 자신의 주머니로 들어오느냐 사장의 주머니로 들어가느냐에 따른 차이 같았다.
「좋은 아침입니다.」
나는 인사를 하고 툭툭에 올랐다. 그는 간밤에 본 것보다 몸집이 더 커 보였지만 위압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내가 앉은 것을 확인하고 시동을 걸었다.
폭포로 가는 길은 황토와 잡초가 가득한 캄보디아의 전형적인 시골길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길옆으로 고무나무 묘목이 심어져 있다는 것 정도였다. 나무들은 커다란 땅에 촘촘히 박혀 작은 숲을 이루고 있었다. 쓰나는 고무나무 묘목은 심은 지 1년 정도 지나면 다른 곳으로 옮겨진다고 했다. 조금 더 나아가자 다 자란 고무나무들이 나타났다.
「이 고무나무 농장은 중국인들 소유예요. 그들은 농장을 국경 지역에 만들고 있어요. 소수민족들이 많거든요. 그들에게 싼 임금을 주고 농장을 운영하죠.」
고무나무는 큰 키에 비해 줄기가 매우 가늘었다. 고무나무라는 말을 들었을 때는 지금까지 보아왔던 나무들과는 다른 특색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고무나무라고 말해주지 않았다면 전혀 몰랐을 만큼 평범했다.
쓰나는 툭툭을 잠시 세워두고 나를 농장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가까이서 보니 나무줄기에 사선으로 그어진 칼집이 있었고, 그곳에서 하얀 진액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줄기마다 사발을 매달아 진액을 받았다. 페인트처럼 아주 희고 걸쭉했다.
「이 하얀 액체가 라텍스예요. 이걸 가지고 당신이 신은 운동화나 자동차 타이어 같은 걸 만들죠.」 그가 말했다.
어제와는 달리 그의 말투와 태도에는 친절함이 배어 있었다. 그의 위엄 있던 태도는 어쩌면 가족들 앞에서 외국인을 상대로 멋지게 일을 따내는 가장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첫 번째로 도착한 타티응(Ta Tieng) 폭포는 작지만 폭포로써 갖춰야 할 것은 다 갖추고 있었다. 황토색 물이 아래로 떨어졌고, 그 앞으로 엷은 무지개가 반쪽짜리 아치를 그렸다. 황토색 물을 보고 더럽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세차게 흐르는 황토색 폭포를 보고 있으면 물에는 맑거나 더러운 것 이상의 에너지가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킨찬(Kinchaan) 폭포에 갔다. 이곳은 입장료를 받았다. 우리는 폭포를 보기 위해 철교를 건넜다. 철교의 중간쯤에 다다르자 폭포가 보였다. 이곳은 타티응 폭포 이상의 힘이 느껴졌다. 이보다 더 진할 수는 없을 거 같은 황토색 물이 두껍게 위에서 아래로 쏟아졌다. 중력이 느껴지는 폭포였다. 다리에서 폭포까지는 거리가 꽤 있었지만 분무기가 물을 분사하듯 포말이 날아들었다. 나는 포말에 몸이 젖으면서도 쉽게 그 앞을 떠나지 못했다. 입장료를 받을 만했다.
폭포에서 호수로 가는 길은 온통 진흙 투성이었다. 쓰나는 단단한 지면을 찾아 질퍽한 길을 피했지만 나중에는 결국 바퀴가 진흙에 빠져버렸다. 나는 쓰나와 함께 툭툭에서 내려 트레일러를 밀었다. 그는 우기에는 이런 일이 자주 있다고 했다. 그의 통나무 같은 몸은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졌던 것이다. 쓰나의 옷이 땀으로 흥건해졌다. 우리는 어렵게 바퀴를 빼내고 다시 툭툭을 출발시켰다.
쓰나에 의하면 보엥 익 롬은 거인이 둘러싼 호수라는 의미인데, 거인과 관련된 전설이 전해진다고 했다.
옛날에 이곳엔 거인이 살고 있었다. 거인족 왕에겐 아름다운 공주가 있었는데 그녀는 어느 날 인간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 그들은 빠르게 서로에게 빠져들었고, 사랑은 점점 깊어졌다. 왕은 공주가 인간이 아닌 거인과 결혼하길 원했다. 이를 안 그들은 둘의 관계가 들통날까 두려웠다. 결국 그들은 왕의 손길이 닿지 않는 깊은 숲속으로 도망쳤다. 얼마 후 이 사실을 알게 된 왕은 군대를 불러 공주를 찾으라고 명령했다. 군대는 왕국과 숲 속을 모두 뒤지지만 어떤 흔적도 발견하지 못했다. 왕은 그들이 나무 숲 어딘가에 숨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군대로 하여금 숲에 있는 나무를 뽑게 했다. 거인 군대는 수많은 나무를 제거했지만 그들을 찾는 데는 실패했다. 결국 왕과 군대는 수색을 포기했고, 나무가 뽑힌 자리엔 물이 고여 호수가 됐다고 한다.
보엥 익 롬 호수에 도착했을 때, 나는 혼자서 호수로 내려갔다. 쓰나는 진흙에 빠진 툭툭을 건져내느라 힘을 많이 뺐는지 잠시 눈을 붙이고 있겠다고 했다.
호수는 보는 이를 압도할 만큼 크지는 않았지만 나를 품은 듯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 줬다. 호수는 옅은 에메랄드빛이 났고 계곡물처럼 시원했다. 그래서인지 이곳엔 수영을 하거나 휴식을 취하러 온 사람들이 많았다. 수심이 깊어 수영하기에는 위험해 보였지만 구명조끼를 대여해 준다니 한번쯤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명조끼가 쌓인 곳엔 ‘수영을 할 테면 하세요. 당신이 어떻게 되든 우리는 상관하지 않습니다’라는 무책임한 경고문이 있어 당혹스러웠지만 연인들이나 가족 단위의 방문객들은 구명조끼를 입고 조심스럽게 물놀이를 했다. 겁 없는 소년들은 구명조끼 따위는 거추장스럽다는 듯 조끼 없이 나무에 올라가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풍덩!’ 아이들이 물속에 뛰어들 때마다 사방으로 물이 튀었고 그 자리엔 황토가 올라와 물을 탁하게 만들었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지만 아이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몇 번이고 반복해서 물에 뛰어들었다.
호수 주위엔 그것을 두른 띠처럼 둥근 오솔길이 나 있었다. 나는 수영 대신 오솔길을 걸었다. 비는 점점 더 거세졌다. 나는 배낭에서 우의를 꺼내 입었다. 우의를 입고 있어서 그런지 빗방울이 우의에 떨어져 터지는 소리, 나뭇잎이 발에 밟혀 바스러지는 소리가 내 안에서 나는 소리처럼 온몸에 울렸다. 오솔길엔 아무도 없었고 모든 소리가 비현실적으로 증폭됐다. 나는 흠칫, 이건 혹시 거인의 발자국 소리가 아닐까 생각했다. 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빗줄기가 나뭇잎을 스쳐 내 얼굴에 부딪혔다. 아직 이곳에 공주와 그녀의 연인이 숨어 있는 건 아닐까. 이토록 평화롭고 조용한 곳에 숨어 그들은 아직도 사랑을 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스물아홉 나의 캄보디아 STAY, NOT ST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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