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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쭝 브런치 Jul 19. 2018

메콩 블루






   「이거 어쩌죠? 예약하신 스텅트렝행 벤이 출발할 수 없을 거 같아요. 운전기사가 갑자기 아프다고 연락이 왔어요.」 운송 회사 직원이 말했다. 

   「뭐라고요? 그럼 스텅트렝에 가는 차는 없는 건가요?」  

   「아니요, 그래서 제가 급하게 구하긴 했는데… 저거예요.」 그가 뜸을 들이더니 군데군데 칠이 벗겨진 회색 승용차 하나를 가리켰다. 

    차 안에는 운전기사와 3인 가족이 있었다. 뒷좌석 오른쪽에는 내가 앉을 자리 하나만 남아 있었다. 나는 그곳에 가 앉았지만 차는 바로 출발하지 않았다. 잠시 후 봇짐을 들고 나타난 사람들이 더 타더니 순식간에 차 안에 사람이 아홉 명(어른 일곱, 아이 둘)으로 불어났다. 차는 곧 출발했지만 좀처럼 속력을 내지 못했다. 날은 더웠고 고장난 에어컨 대신 연 창문으로 흙먼지가 들어왔다. 아이 하나가 짜증이 났는지 울음을 터뜨렸다. 나도 함께 울고 싶었다. 

    차는 여전히 속력을 내지 못했지만 그런대로 괜찮았다. 가로수를 지날 때는 시원한 바람이 불었고 울다 지친 아이도 잠이 들었다. 갑자기 소떼들이 길을 막아도 운전기사는 경적을 울리지 않았다. 갈비뼈가 훤히 드러난 소들은 한참 동안 도로 위를 걸었다. 소몰이를 하는 소년은 허공에 대고 긴 막대기를 휘저을 뿐 소들을 때리거나 재촉하지 않았다. 나도 조바심을 내지 않고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봤다. 

    이런 여유로운 분위기는 스텅트렝에 도착할 때까지 이어졌다. 차에서 내렸을 땐 시엠립과 프레아 비히어에서와는 달리 호객원들이 나타나지 않았다. 툭툭이나 모토덥(Motodup, 운전기사가 딸린 오토바이)이 있기는 했지만 아무도 내게 관심이 없었다. 누구든 나와 눈을 마주치면 그저 웃고 말았다. 시엠립과 프레아 비히어에서 시달려서 그런지 오랜만에 느껴보는 기분 좋은 무관심이었다. 하지만 길을 잃은 듯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나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모토덥 기사에게 다가갔다. 

   「여기 어디 가볼 만한 곳이 없나요? 유명한 장소 같은 곳이요.」

   「….」 

    그는 말없이 그냥 웃었다.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는 우선 숙소를 찾아 다녔다. 마침 식당이 딸린 게스트 하우스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깨끗한 연겨자색 외관의 4층짜리 건물이었다. 1층 전체가 식당이었고, 정문 앞에 있는 노천 식탁에서 식사하는 사람들의 음식이 꽤 먹음직스럽게 보였다. 나는 이곳에 묵기로 결정했다.

    짐을 풀고 강변에 있는 한 여행사로 갔다. 그곳에서는 강 건너 마을에 있는 프레아 코(Preah Ko) 사원을 추천했다. 나룻배를 타고 커다란 강을 가로질러 사원에 가는 게 얼마나 특별한 경험이 될지 설명했다. 나는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배는 이미 탈 만큼 탔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론리 플래닛을 펼쳐 보니 사원에 열광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굳이 갈 필요는 없다고 했다. 나는 평소에는 이 여행 안내서를 불신하다가도 이렇게 갈팡질팡할 때는 매우 신뢰했다. 오히려 그 아래에 있는 추천 여행지가 눈에 들어왔다. 메콩 블루(Mekong Blue), 아름다운 이름이었다. 



    메콩 블루는 어느 비정부단체(NGO)가 설립한 스텅트렝 여성능력개발센터(Stung Treng Women's Development Center)다. 이곳에서 이 지역 여성들은 전통적인 방식으로 스카프를 만든다. 메콩 블루는 이들이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고 가난으로부터 벗어나 자립할 수 있도록 돕는다. 

메콩 블루는 스텅트렝 시내에서 오토바이로 5분 정도 떨어진 한적한 마을에 위치했다. 

   「안녕하세요.」 

    깔끔한 정장 차림의 여자가 썸뻬아를 하며 인사했다. 활짝 웃는 얼굴과 쫙 편 어깨에서 자신감이 느껴졌다. 관리자로 보이는 그녀는 내가 이곳에 올 걸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 입구에서부터 나를 맞아줬다. 그녀는 나 같은 외국인 손님이 익숙한지 내가 부탁도 하지 않았는데 센터 내부를 보여줬다. 

    가장 먼저 베틀이 있는 공방에 갔다. 입구 옆 선반엔 형형색색의 재봉실들이 한가득 있었다. 입구에서부터 베틀 소리가 들렸다. 안에는 가운데 통로 양쪽으로 커다란 베틀이 죽 늘어서 있었고, 그 중 절반은 여성들이 앉아 실크를 짜고 있었다. 베틀은 이들의 능숙한 손놀림에 의해 살아 숨 쉬는 생물처럼 움직였다. 이들은 내가 들어온 것을 의식하는 듯 보였지만 작업을 멈추지 않고 계속 몰입했다. 나는 혹시라도 방해가 될까 발을 살금살금 디디며 관리자를 따라갔다. 공방 뒤쪽으로 나가자 재래식 부엌이 나왔다. 아궁이와 솥이 여러 개 있었는데, 방금 전까지 불을 땠는지 옅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 옆 건조대에는 색을 머금은 실들이 걸려있었다.

   「이곳에서 저희는 실을 염색해요. 모두 수작업이죠.」 

   「모두요?」

   「네. 저희는 직접 키운 누에에서 얻은 천연 실로 실크를 만들어요. 염색도 천연 염료를 이용하고 있어요.」 

   「굉장하네요. 모두 수작업이라니.」 

    놀라웠다. 능력개발센터라고 하기에는 얼핏 봐도 작업의 수준이 높았다. 차라리 장인 집단이라고 하는 게 더 맞을 것 같았다.  



    염색 작업장 옆에는 유치원이 있었다. 유치원에서 아이들이 깔깔깔 웃는 소리가 들렸다. 공방에서 여성들이 실크를 만드는 동안 유치원에서는 아이들의 보육을 맡는다. 덕분에 이곳 여성들은 일하는 동안 육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쉬는 시간이 되자 서른 명쯤 돼 보이는 아이들이 놀이터로 나와 뛰어 놀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내 정신을 쏙 빼놓을 만큼 활기찼다. 몇몇 아이들은 나를 잘 아는 것 마냥 달려와 안기기도 했다. 공방 안에서 베틀에 몰입하고 있는 여성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마 공방에서도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릴 것이다. 그 깔깔거리는 웃음소리는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베틀 소리와 어우러져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하모니를 만들고 있을 것이다. 이게 바로 그들이 베틀과 하나처럼 보일만큼 몰입할 수 있는 비결 같았다.   

    마지막으로 들른 작은 쇼룸에는 다양한 스카프들이 진열돼 있었다. 이곳에 있는 몇몇 스카프는 유네스코 상을 수상할 정도로 높은 가치를 인정받기도 했다. 전통적인 방식으로 질 좋은 실크 스카프를 만든다는 원칙과 메콩 블루 여성들의 삶의 이야기가 더해져 하나의 브랜드가 탄생한 것이다. 그래서인지 메콩 블루의 스카프는 대부분 미국, 일본, 스위스 등 외국으로 수출돼 오히려 캄보디아 내에서는 프놈펜과 스텅트렝의 쇼룸이 아니면 구하기가 힘들다고 한다. 

   「이곳의 여성들은 아이를 교육시킬 수 있고, 식사를 거르지 않으며, 스스로 일을 해 돈을 벌어요. 이들은 자립했고 안정된 삶을 살고 있어요.」 관리자가 말했다.

   「정말 인상적이네요.」

   「다음에 점심시간에 맞춰서 오면 함께 식사를 해요.」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꼭이요.」

    그녀의 배웅을 받으며 나는 메콩 블루를 나왔다. 



   저녁이 되자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나는 강변을 걷다가 게스트 하우스 1층 식당에 갔다. 저녁으로 반숙 계란을 얹은 록락을 주문했다. 맥주도 한 잔 곁들였다. 낮에 본 사람들처럼 노천 식탁에 앉아서 식사를 했는데, 음식이 나오자 주변을 배회하던 개들이 몰려왔다. 개들은 눈썹을 팔자로 만들고 눈을 동그랗게 떠 최대한 불쌍하게 보이려고 애를 썼다. 개들이 눈썹을 이용해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개들은 마치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를 하듯 내가 록락을 한입 먹을 때마다 점점 나와 가까워져 있었다. 외면하고 계속 식사를 하려고 했지만, 어느새 내 발밑까지 온 개들은 앞발로 나를 툭 친 후 내가 쳐다보면 시치미를 뚝 떼고 있다가 다시 불쌍한 눈으로 쳐다봤다. 이곳의 개들은 이랬다. 어떤 생물이든 주어진 환경에 적응한다고 하던데 이곳의 개들은 불쌍한 표정만큼은 어디에 내놔도 뒤지지 않을 만큼 발달했다. 하지만 나도 금세 이런 상황에 적응했다. 이젠 개들이 옆에서 툭툭 치건 말건 모른 척 식사를 할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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