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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쭝 브런치 Jul 17. 2018

하늘 위의 사원







    스텅트렝행 벤이 예약 시간보다 한 시간이 더 지났는데 오지 않았다. 밖엔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었다. 어찌나 많이 오던지 문 앞에 폭포가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었다. 잠시 후 툭툭 한 대가 입구에 서더니 기사가 얼른 타라고 손짓했다. ‘분명 벤을 탄다고 한 거 같은데….’ 나는 엉겁결에 툭툭에 올랐다. 툭툭 안에는 2인석을 1인석으로 만들 만큼 몸집이 큰 백인 남자가 타고 있었다. 매일 무거운 역기를 들고 끼니마다 물에 단백질 보충제를 녹여 마실 것 같은 그런 체구였다. 

   「안녕하쇼.」 남자가 말했다. 

   「안녕하세요.」 나는 몸을 잔뜩 웅크리고 그의 옆에 앉았다.

   「몇 시에 차를 타기로 했죠?」 그가 물었다. 

   「일곱 시요. 그런데 벤을 탄다고 하지 않았나요?」

   「이게 벤이 있는 곳까지 데려다주겠죠. 설마 이걸 타고 스텅트렝까지 가진 않을 테니까.」

    폭우는 계속됐다. 얼마 안 가 툭툭이 멈추고 나와 근육질 남자는 기사의 안내에 따라 밖으로 나갔다. 밖엔 벤 한 대가 정차해 있었고, 우린 재빨리 벤 안으로 들어갔다. 툭툭에서 벤으로 옮겨 타는 동안 잠깐 비를 맞았을 뿐인데 금세 어깨와 등이 다 젖었다. 벤 안에는 운전기사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우리가 첫 탑승객이었다. 벤은 20여 분간 시엠립 시내를 돌면서 다른 승객들을 태웠다. 

   「난 호주에서 왔어요.」 근육질 남자가 말했다.

   「저는 한국에서요.」

   「저희는 스페인에서 왔어요.」 제일 마지막에 탄 청년 세 명 중 하나가 말했다.   

   「근데 이놈의 차는 제때 오는 법이 없단 말이야. 오늘은 거의 한 시간이나 기다렸다고.」 근육질 남자가 투덜댔다. 

   「우리도 일곱 시 반에 온다고 했는데, 여덟 시 반이 돼서야 도착했어요.」 스페인 청년이 말했다. 

    갑자기 조수석에 앉은 외국인도, 뒤에 있던 외국인 중년 부부도 하나둘 우리의 대화에 동참하더니 캄보디아를 여행하면서 시간 약속이 지켜지지 않아 생긴 이야기들을 풀어 놓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 주제만 가지고 한 시간 가까이 떠들었다. 그 덕분에 벤 안에 있는 사람들은 오랜만에 만난 동창생들처럼 급격히 친해졌다. 만약 캄보디아에서 낯선 외국인 여행자와 빨리 친해지고 싶다면 ‘Where are you from(어디 출신이죠)?’하고 묻기보다 ‘오늘 아침에 일곱 시에 온다던 차가 여덟 시가 넘어서 왔지 뭐예요’라고 대화를 시작하는 편이 훨씬 더 도움이 될 것이다.

    벤은 고속도로를 달리기 시작했고 창밖을 뿌옇게 만들던 비도 곧 그쳤다. 운전기사는 기다렸다는 듯이 역주행을 시작했다. 그는 반대편에서 차가 오는데도 경적을 울리며 빠르게 달렸다. 아무래도 이 위험천만한 주행엔 여행이 끝날 때까지 적응하지 못할 것 같다. 

    차는 그렇게 두 시간여를 달려 프레아 비히어에 도착했다. 그곳에 내린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즐거운 여행 되세요.」

   「몸조심하쇼.」

   「잘 가요. 행운을 빌어요.」

   「늘 신이 함께하길 빕니다.」

    나는 벤에서 만난 사람들과 작별인사를 했다.  

    벤에서 내리자 현지인 남자들 무리가 내게 다가왔다. 이들은 버스에서 내린 여행객들을 호텔이나 프레아 비히어 사원으로 데려다주고 돈을 버는 게 목적이었다. 나는 금세 그들에 둘러싸였다. 이들은 다른 때 같았으면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들이 선호하는 손님은 주로 가족, 커플, 단체 여행객이기 때문이다. 나같이 무채색 옷을 입은 남자는 우선순위 밖이었다. 오히려 내가 먼저 다가가야 상대를 해줬지만 이렇게 나 혼자일 때는 사정이 달랐다. 여러모로 나에게 유리한 상황이었다. 나는 곧바로 흥정을 시작했다. 

   「프레아 비히어 사원까지 얼마죠?」 

   「15달러입니다.」 그들 중 한 남자가 대답했다. 

   「너무 비싼데요. 10달러에 가시죠.」 

    내가 이렇게 대답하자, 알 수 없는 말과 탄식이 일제히 터져 나왔다. 욕을 하는 것 같기도 했다. 캄보디아 욕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그때 나를 보던 그 표정으로는 욕 말고 다른 말을 했을 리가 없다. 그들 중 두 명만 남고 나머지는 그대로 뒤돌아 떠났다. 어떤 사람은 떠난 뒤에도 계속 나를 보며 눈을 흘기고 있었다. 나는 솔직히 15달러면 저렴하다고 생각했지만 여행의 재미 중 하나는 바로 흥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일단 가격부터 깎고 봤다. 그런데 다들 너무 쉽게 포기해서 오히려 내가 당황스러웠다. 다행히 남은 두 명과 흥정을 이어갈 수 있었다.  

   「14.5」 

   「10」

   「14」

   「10」

   「13.7」

   「10」

   「13.5」 

   「10」

   「13.3」 

   「10」 나는 상대가 뭐라고 하던 계속 10달러를 고수했다. 

   「13!!」 키 작은 남자는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랐는지 정색을 하며 말했다. 

   「좋아요.」 분위기가 점점 험악해지는 것 같아 이쯤에서 그만두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결국 13달러까지 흥정에 성공한 후 그의 차에 올랐을 때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보통 흥정은 달러 단위로만 했지 센트 단위까지 내려갔던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흥정을 할 때는 정신이 없어 몰랐지만 차에 타고 생각해 보니 뭔가 단단히 착각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재빨리 수첩과 펜을 꺼내 ‘$13?’라고 적어 운전석으로 내밀었다. 메모를 본 남자는 흥분을 해서 내리더니 뒷좌석 문을 거칠게 열었다. 

   「이 가격엔 갈 수 없어요.」

   「우린 이 가격에 합의를 하지 않았던가요?」

    그는 내 수첩을 가져가더니 뭔가를 적은 후 다시 내게 돌려줬다. 수첩엔 13이란 글자에 가로로 줄이 그어져 있었고, 그 위에 ‘30’이라고 적혀 있었다. 처음에 그들이 말한 금액은 15달러가 아니라 50달러였던 것이다. 15(Fifteen)와 50(Fifty)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해서 생긴 오해였다. 13(Thirteen)을 30(Thirty)으로, 14(Fourteen)를 40(Fourty)으로 15(Fifteen)를 50(Fifty)으로 말이다.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사람들끼리 대화를 하다 보면 발음과 강세 차이를 구분하지 못해 오해가 생기곤 하는데, 보통 낮은 금액으로 이득을 얻기보다는 높은 금액으로 손해를 보는 경우가 많다. 마음을 나쁘게 먹은 사람들이 상대가 자신이 부른 금액보다 훨씬 큰 돈을 낼 때 오해라는 걸 알면서도 이득을 챙기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그 반대의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던 것이다. 나는 이들이 왜 그렇게 심하게 화를 냈는지 그제야 깨달았다. 50달러를 불렀는데 단번에 10달러로 받아치는 나를 뭐라고 생각했을까. 이들에게 포위된 채로 집단 구타를 당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나는 수첩에 적힌 30이란 숫자 옆에 ‘OK’라고 적은 후에야 다시 차에 오를 수 있었다.  



    마을을 빠져나온 차는 고속도로를 달렸다. 길은 잘 닦여 있었다. 나는 줄곧 시선을 창밖에 고정했지만 끝없이 펼쳐진 들판과 듬성듬성 높게 뻗은 야자수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게 약 한 시간쯤 달리고 나자 악어 등처럼 길게 연결된 산맥이 나타났다. 잠시 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프레아 비히어라고 적힌 안내판이 나왔고 우리는 곧 매표소에 도착했다. 붉은 양철 지붕을 얹은 가로로 긴 건물이었다. 입장권을 구매할 때 매표원은 여권을 보여 달라고 했다. 그는 산에 올라갈 때도 여권을 꼭 소지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사원까지는 매표소에서부터 오토바이나 사륜구동 차를 타고 더 가야 했다. 나는 혼자였기 때문에 가격이 더 저렴한 오토바이를 선택했다. 이내 한 청년이 작은 오토바이를 몰고 나타났다. 출발 전 나는 헬멧을 달라고 했지만 나를 위한 헬멧 같은 건 없었다. 우리는 길가에 흐드러지게 핀 이름 모를 꽃들을 지나 사원으로 향했다. 

    당렉산(Dangkrek Mountains) 정상 해발 525미터 높이에 지어진 프레아 비히어 사원은 앙코르 왓과 같이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다. 그래서인지 사원까지 올라가는 굽잇길은 매끈하게 포장돼 있었다. 하지만 길의 끝에 다다를수록 점점 경사가 가팔라졌고 이내 포장도로도 끝이 났다. 그 후로는 울퉁불퉁한 바위를 올라갔다. 긴 완충장치가 있는 산악용 오토바이가 아니면 오르지 못할 것 같은 가파른 바위산을 청년은 작은 오토바이만으로도 잘 올랐다. 나는 점점 심해지는 경사 때문에 갑자기 중심을 잃고 굴러 떨어지면 어쩌나 걱정했다. 청년의 옷자락을 붙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도 그럴 것이 변변한 울타리도 없어 자칫 돌이라도 밟아 미끄러지면 아래로 추락할 게 뻔해 보였다. 다행히 그의 운전 실력은 수준급이었다. 평평한 곳에서는 속도를 내다가도 길이 울퉁불퉁해지면 속도를 줄였다. 그렇게 갈지자 모양으로 아슬아슬한 곡예를 이어가며 무사히 사원에 도착했다. 

    바위산 정상에는 무장한 군인들이 있었다. 맞은편 산봉우리에 희미하게 보이는 태국 국기가 바람에 나부꼈다. 이곳은 태국이 육안으로 보일 만큼 국경이 맞닿아 있었다. 

    한때 이곳은 태국의 영토인 적도 있었다. 1904년 캄보디아와 태국을 점령하고 있던 프랑스는 당렉 산맥을 기준으로 두 나라의 국경을 나눴고, 프레아 비히어는 태국의 영토로 편입됐다. 나중에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캄보디아는 이때 빼앗긴 영토를 되찾기 위해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했고 승소 판결을 받아 냈다. 그제야 이곳에 있던 태국 군대를 철수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후 포격이 발생해 사상자가 나는 등 수차례 분쟁이 일어났고, 현재까지도 잠재적인 분쟁 지역으로 남은 상태다. 

    사원에 들어가기 전 군인 한 명이 나를 멈춰 세우더니 여권을 보여 달라고 했다. 태국인이 이곳에 들어오는 건 엄격히 금지돼 있기 때문에 국적을 확인한 것이다. 



    사원은 수십 개의 계단을 오르는 것으로 시작됐다. 계단을 다 오르자 사원의 탑문인 고푸라(Gopura)가 나왔다. 고푸라는 심하게 훼손되어 복구 중이었다. 복구에 동원된 사람들은 내리쬐는 태양을 피해 그늘 아래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 후로는 완만한 경사가 계속됐다. 돌로 만든 참배로 옆으로 진녹색 잔디들이 있어 커다란 궁전 정원을 산책하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중간에 있는 고푸라마다 유네스코 티셔츠를 입은 관리자가 한 명씩 배치돼 있었다. 그들은 넓은 챙이 달린 햇빛 가리개를 쓰고 고푸라 주변을 돌아다녔다. 

    다섯 개의 고푸라를 통과하자 중앙 성소가 나왔다. 프레아 비히어의 중앙 성소는 앙코르 왓에 있는 것처럼 높지 않았다. 성소 옆에 무너진 벽에서 나온 입방면체 모양의 바위들이 아무렇게나 쌓여 있었다. 중앙 성소 안에는 오렌지색 승복을 입은 스님이 불상을 등지고 앉아 경전을 읽고 있었다. 

    앙코르 왓이 신에게 닿기 위해 높고 수직적이었다면 프레아 비히어는 이미 신에게 닿았다는 듯 완만하고 묵직했다. 그래서인지 과거 앙코르 왕국의 왕들은 왕이 되면 제일 먼저 이곳으로 순례를 왔다고 한다.   



    중앙 성소를 둘러싼 회랑을 거닐다 밖으로 나갔다. 그때 갑자기 내 몸을 날려버릴 듯이 심한 바람이 불었다. 나는 몸을 잔뜩 움크린 채 모자를 잡고 얼마간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다. 바람이 잠잠해지고 웅크렸던 몸을 펴자 깎아지른 절벽이 보였다. 절벽 너머에는 뭉게구름이 떠 있었고, 그 아래로 숲과 평원이 펼쳐졌다. 절벽엔 흰 밧줄만 무릎 높이로 둘러쳐 있었다. 아찔했다. 발을 헛디디면 그대로 절벽 아래로 떨어질 것 같았다. 산이 끝나는 지점에서 사원도 끝난 걸 보니 애초에 이 산에 맞게 사원을 설계한 것 같았다. 절벽 끝에는 한 노파가 홀로 눈을 감고 서서 기도를 하고 있었다. 노파의 옷이 파도 같은 주름을 만들며 바람에 펄럭였다. 

    내려오면서 생각했다. 이런 사원을 만든 왕은 반쯤 정신이 나간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그렇지 않고서야 높은 산 위에 이런 사원을 지을 생각은 하지 않을 테니까. 아니면 정말 미칠 만큼 간절하게 신에게 가까이 가고 싶었던 거였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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