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엠립(Siem reap)에 도착한다는 기장의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창밖은 온통 암흑이었다. 눈에 보이는 거라곤 비행기 날개 끝에서 깜박이는 붉은색 등뿐이었다. 이것이 캄보디아(Cambodia)에 대한 나의 첫인상이다.
나는 창 너머로 펼쳐지는 야경을 보며 여행지에 대한 기대와 잘 도착했다는 안도를 느낀다. 하지만 이날 바깥 풍경을 봤을 때는 블랙홀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공포를 느꼈다.
언젠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먼 북소리』를 읽었다. 그는 마흔 살이 가까워지던 어느 날 멀리서 북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그 순간 그는 긴 여행을 떠나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 후 그는 유럽에 가서 3년을 살았다. 이민도, 관광도 아닌 상주하는 여행자로 말이다. 이후 나는 이런 삶을 동경해 왔다. 언젠가 외국으로 떠나 이민도, 관광도 아닌 상주하는 여행자로 살아보겠다고. 그것은 일종의 로망이었고, 서른이 되기 전에 꼭 해야만 하는 일이 되었다.
얼마 전 나는 해가 바뀌면 서른이 된다는 걸 깨달았다. 갑자기 불안해졌고,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아직 뭔가 이룬 것도 없고, 무엇을 하면 좋을지 분명하지 않다는 사실이 나를 괴롭혔다. 지금까지 무얼 하며 살아왔는지 생각해 봤지만 잘 떠오르지 않았다. 조급해졌다. 그래도 뭔가를 하면서 20대를 보냈을 텐데. 그걸 정리해야 서른을 실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처음부터 떠올려 봤다. 스무 살이 되던 해 나는 무엇을 했을까. 아니 아예 10년 전으로 돌아가 보자. 그래, 열아홉 살 때 나는 고등학교를 중퇴했다. 철없다면 철없고 용기 있다면 용기 있는 선택이었다. 괜찮았다. 지금처럼 불안하지 않았다. 이제 고작 스무 살인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서른은 뭐랄까, 이전까지가 연습이었다면 이제부터는 실전이라는 생각이 든다. 머리가 복잡해졌다. 실타래처럼 엉켰다.
이런 생각도 잠시였다. 갑자기 활주로 유도등이 나타났고 이내 의자가 떨어져 나갈 듯 심하게 흔들렸다. 잠시 후 기체가 안정되자 곳곳에서 ‘딸깍, 딸깍’ 안전벨트 푸는 소리가 났다.
비행기에서 내렸을 때 비가 왔는지 바닥은 젖어있었고, 조금 습하기는 했지만 바람이 불어 상쾌했다. 나는 캄보디아도 다른 열대 국가들처럼 후덥지근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피곤한지 눈가에 경련이 일었다. 나는 걸음을 재촉했다.
승객들 대부분은 비자 발급처로 향했다. 나는 주한캄보디아대사관에서 비자를 받아왔기 때문에 곧장 입국 심사대로 갔다. 하지만 입국 심사원에게 여권을 건넸을 때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했다. 내가 편도 티켓으로 왔다며 문제를 삼은 것이다. 그는 영어와 캄보디아어를 섞어가며 질문을 던졌고, 내가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는 바람에 심사가 길어졌다. 그러는 동안 다른 승객들은 비자를 받아와 입국 심사대를 통과했다. 나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비행기를 예매하던 날 귀국 날짜를 정할 수 없었다. 우선 한 달 정도면 되지 않을까 생각하기는 했다. 현지에서 조금 살아보고 그곳 생활이 마음에 들면 한두 달 더 머물 생각도 있었다. 그래서 가서 결정하자고 마음을 먹고 편도 티켓을 예매한 것이다. 하지만 심사원이 보기에 편도로 입국하려면 좀 더 납득할 만한 이유가 필요했었나 보다. 한참 후에야 심사가 끝났고, 나는 두통을 느끼며 짐을 찾으러 갔다.
다행히 짐은 먼저 나와 수하물 벨트 위를 돌고 있었다. 그나마 위안이 됐다.
마지막으로 세관신고서를 내고 밖으로 나가려는데 제복을 입은 두 청년이 나를 막아 세웠다. 이들은 마르고 듬직한 청년들로 영화 『라이온 킹』의 티몬과 품바를 연상케 했다. 이들은 캄보디아어로 무언가를 말했지만 나는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나는 영어로 대화를 시도해 봤지만 마른 청년이 대답 대신 팬터마임을 하듯 손으로 도형을 그리고 그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는 시늉을 했다. 배낭을 열어보라고 하는 것 같았다. 나는 메고 있던 배낭을 열었다. 하지만 이걸로는 부족했는지 청년은 배낭 안에 있는 물건을 모두 거내라고 했다. 나는 힘들게 욱여넣었던 짐들을 모조리 꺼냈다. 이들은 그것들을 대충 훑더니 옆에 있는 캐리어도 열라고 했다. ‘캐리어도 열라고? 제대로 보지도 않으면서?’ 그렇게는 하고 싶지 않았다. 이번에는 내가 팬터마임을 했다. ‘이 캐리어에는 옷이랑 신발, 그리고 책밖에는 없어요.’ 옷을 입고, 신발을 신고, 책을 읽는 시늉을 하자 이들은 피식 웃더니 이제 가도 좋다고 손짓했다. 나는 바보가 된 기분이 들었지만 캐리어를 열어 짐을 모두 파헤치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만족했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나는 바탐방(Battambang)에 있는 제이에게 연락했다. 그녀는 내가 캄보디아에 온 걸 환영해 줬고, 잘 도착해서 다행이라고 말했다.
제이를 처음 만난 건 한국국제협력단(Korea International Cooperation Agency: KOICA, 이하 코이카)의 해외봉사단원이 되면서였다. 이후 나는 엘살바도르El Salvador에서, 그녀는 캄보디아에서 각각 활동을 했다. 우리는 2년 동안 각자 파견된 나라에서 활동하기로 돼 있었지만, 현지의 치안 악화로 인해 내가 먼저 귀국했다. 그 후 한국에서 머리가 복잡했던 나는 떠날 곳을 고민하던 중 그녀가 있는 캄보디아에 가기로 결정한 것이다.
간혹 1년 6개월 동안의 장거리 연애를 어떻게 버텼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아마도 다툰 후에 잘 화해했기 때문일 것이다. 관계가 좋을 땐 아무 문제가 없는데, 다투고 나면 꼭 위기가 찾아왔다. 만날 수가 없으니 제대로 풀 수도 없었다. 시간이 지나 화는 가라앉았지만 둘 사이에 남아 있는 어색함은 감출 수 없었다. 이때마다 제이는 우리가 다툰 이유를 찾아 다시 불편해질지도 모르는 얘기를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 화가 가라앉았다고 끝나는 건 아니야. 왜 다툰 건지 얘기를 하고 풀어야 하는 건 확실하게 풀어야 돼’ 우리가 다툴 때마다 그녀가 한 말이었다. 우린 이렇게 잘 화해하면서 서로에 대한 믿음을 키웠다.
시엠립에서 하룻밤 묵은 후 제이가 있는 바탐방으로 갈 것이다. 그녀를 다시 볼 생각에 벌써부터 기분이 들떴다.
나는 공항에 있는 툭툭TukTuk, 트레일러를 단 모토 택시을 타고 미리 예약해둔 게스트 하우스로 향했다. 길 위에는 내가 탄 툭툭 밖에 없었다. 거리는 휑했고, 어두웠다. 툭툭의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머리카락이 날렸다. 바람이 내 뺨에 와 부딪혔다. 그제야 내가 어딘가로 떠나 왔다는 사실이 실감났다.
스물아홉 나의 캄보디아 STAY, NOT ST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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