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아침. 장거리 버스 회사인 메콩 익스프레스(Mekong Express)의 벤을 타고 바탐방으로 향했다. 시엠립에서 바탐방까지는 대략 세 시간이 걸린다. 물론 한 번도 쉬지 않고 달렸을 때의 얘기다. 나는 잠시 창밖을 응시하다 반복되는 풍경이 지루해질 즈음 잠이 들었다. 자다 깨다 머리를 몇 번 창에 부딪히는 사이 벤은 바탐방에 도착했다. 시계를 보니 네 시간이 지나있었다.
벤이 정류장에 도착하자 호객을 하려고 진을 친 툭툭 기사와 호텔 직원들이 보였다. 이들은 정차도 하기 전에 피 냄새를 맡은 상어처럼 벤으로 돌진해 왔다. 그중 몇 명은 굉장히 저돌적이어서 버스에 치이지는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이들은 호텔명과 숙박비, 관광지 등의 정보가 적힌 광고지를 보이며 무어라 소리쳤다. 마침내 버스의 미닫이문이 열리고 내가 제일 먼저 내렸다. 하지만 이들은 나를 건너뛰고 뒤이어 내리는 백인들이나 가족 단위 여행객들을 향해 몰려갔다. 오랜 경험을 통해 어떤 여행객들이 더 나은지 식별하는 능력이 생긴 것 같았다. 나는 홀로 짐을 꺼내러 트렁크로 갔다.
「헬로, 툭툭(Hello, TukTuk).」
트렁크에서 짐을 내리고 있는데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곱슬머리의 그을린 피부, 눈가에 주름이 깊게 패인 남자였다. 한눈에 봐도 몸싸움에서 밀렸을 것 같은 마른 체구였다.
그는 ‘차야 호텔(Chhaya Hotel)’이라고 적힌 광고판을 들고 웃고 있었다. 사실 아무도 내게 다가오지 않아 서운했는데, 내심 반가웠다.
「차야 호텔이요?」
「네. 깨끗하고 가격도 싸요. 거기까지 내 툭툭으로 데려다 줄게요.」
「얼마에 데려다 줄 건데요?」
「2,000리엘(US$0.5)이요.」
「1,000리엘은 어때요?」
「안 돼요. 2,000리엘. 그 밑으로는 안 돼요」
나는 피곤하기도 했고 그가 제시한 금액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했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내가 더 이상 흥정할 의지가 없다는 것을 알아챘는지 재빨리 내 캐리어를 들어 툭툭에 실었다.
차야 호텔은 지갑에서 2,000리엘을 꺼내는 동안 도착할 만큼 가까웠다. 붉은색으로 CHHAYA 녹색으로 HOTEL이라고 적힌 세로 간판이 달린 5층짜리 흰색 건물이었다. 툭툭에서 내려 작은 입구로 들어가자 로비가 나왔다. 프런트에 있는 눈망울이 큰 남자가 나를 보고 미소 지으며 인사했다.
「빈 방 있나요?」
「네. 있어요. 혼자세요?」
「네. 얼마죠?」
「1층에 있는 방은 7달러, 2층부터는 5달러, 그리고 에어컨이 있는 방은 10달러입니다.」
나는 잠시 고민하는 척을 했다. 마음속으로는 이미 5달러짜리 방으로 결정했다. 조금 낡은 실내를 보니 가격이 올라갈수록 만족도는 떨어질 거란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5달러 방으로 할게요.」
프런트 직원은 곧바로 무전기에 대고 무어라 말했다. 잠시 후 키가 작고 팔자로 걷는 남자가 오더니 나를 2층 구석에 있는 작고 허름한 방으로 안내했다. 방은 온통 흰 벽으로 둘러져 있었고 곰팡이 냄새가 났다. 아침이 돼도 해가 들지 않을 것 같은 어두운 방이었다. 하나 있는 창문의 커튼을 젖혀보니 실제로 창문 뒤가 막혀서 해가 안 드는 방이었다.
나는 실망할 걸 알면서도 5달러 방을 보겠다고 한 거였지만 그곳은 해가 지고 나면 감금됐다는 착각이 들게 할 것만 같았다. 하루나 이틀 정도 머물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무 방이나 고를 수는 없었다
「다른 방은 없나요?」
남자는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무전기에 대고 무어라 말했다. 곧이어 무전으로 답이 오자(그 사람 귀찮게 왜 그러냐는 말 같았다) 남자는 나를 데리고 이 방 저 방을 돌며 객실 순회를 시작했다. 나는 한두 개의 방을 더 볼 요량이었지만, 남자는 빠른 걸음으로 나를 데리고 다니며 호텔의 5달러짜리 방을 모두 보여줬다. 처음에는 2층과 3층을 돌더니 나중에는 굳이 보여 달라고 하지도 않은 1층 방까지 갔다. 침대가 두 개인 방, 창문이 커다란 방, 심지어 에어컨이 있는 방도 있었다. 이렇게 많은 객실을 돌아다닌 보람은 있었다. 이중 내 마음에 드는 방이 있었다.
그 방은 1층 복도 끝에 위치한 130호였다. 이 방은 복도 끝에 있어 음침해 보였지만 막상 안으로 들어가 보니 예상과는 다른 광경이 펼쳐졌다. 아침마다 눈부신 햇살이 들어올 것 같은 커다란 창문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천장에는 실링팬이 걸려있었고, 한쪽 벽엔 에어컨도 있었다. 물론 다른 방과 비교해서 특별히 더 좋다고 할 만한 게 있는 건 아니었다. 실링팬은 오랜 노동으로 지쳤지만 은퇴할 수 없는 노인처럼 터덜터덜 소리를 내며 돌았고, 에어컨은 낡고 먼지가 가득한 게 괜히 작동시켰다가는 재앙이 일어날 것 같아 켜보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런 에어컨이라도 없는 것 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냉장고는 냉동실보다 냉장실의 온도가 더 낮아 혼란스러웠고, V자형 은색 안테나가 달린 텔레비전은 회색 화면을 띄우며 지지직 소리만 냈다. 이 방은 뭐랄까, 커다란 창문 말고는 멀쩡해 보이는 게 하나도 없었지만 특유의 분위기가 나를 사로잡았다. 터덜터덜 돌아가는 실링팬이 만들어 내는 바람, 창밖으로 들리는 오토바이 소리와 의미를 알 수 없는 캄보디아 말들, 거기에 붉은 커튼을 투과해 들어오는 밝은 햇빛까지 묘하게 조화로웠다. 먹통 텔레비전은 빈티지 장식이라고 생각하면 그만이었다.
「이 방은 얼마죠?」
「5달러예요.」
「5달러라고요?」
「네, 5달러요.」
‘분명 1층 방은 7달러, 에어컨이 있는 방은 10달러라고 했는데….’ 나는 그 이유가 너무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그저 다시 프런트로 돌아가 한 번 더 130호가 5달러라는 것을 확인한 후 그곳에 묵겠다고 했다.
제이가 퇴근하고 돌아왔을 때 우리는 오랜만에 재회했다. 그녀는 변한 게 없는 것 같으면서도 모든 게 조금씩 달랐다. 수없이 많이 영상통화를 했지만 그녀를 실제로 마주하자 내 가슴이 또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제이는 차야 아파트(Chhaya Apartment)에 살았는데, 그곳은 차야 호텔에서 엎어지면 코 닿는 곳에 위치했다. 그녀는 여정에 지친 내게 점심을 만들어 줬다. 그녀가 잘하는 음식은 다섯 가지쯤 되는데, 첫 번째는 계란찜이고 두 번째는 된장찌개, 세 번째는 볶음밥, 네 번째는 카레, 다섯 번째는 아이스커피다. 아이스커피를 잘하는 음식으로 분류하는 건 좀 무리일지 모르겠지만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는 깊은 맛을 내기 때문에(실제로 그녀가 가르쳐준 비율로 똑같이 만들어봤지만 같은 맛이 안 났다) 잘하는 음식으로 넣어주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이날은 찬밥이 많다며 볶음밥을 해줬다. 그녀의 볶음밥 비법은 간단하다. 무엇이든 작게 다져서 밥과 함께 볶고 마지막에 통조림 옥수수와 굴소스를 넣고 섞으면 된다. 이 두 재료가 없으면 그녀가 잘하는 음식은 네 가지로 줄어들 것이다.
우린 오후 늦게 밖으로 나와 강변을 걸었다. 그녀는 혼자 있을 때는 밖에 잘 나가지 않았다며 한가롭게 강변을 걷는 것만으로도 크게 만족해 했다.
바탐방에는 상커(Sanker)라는 이름의 커다란 강이 흐른다. 낮에 차야 호텔 앞에서 호덤이라는 툭툭 기사를 만났는데, 그는 이 강을 ‘썽카이’라고 발음했다. 그는 친절하게도 바탐방에 가볼만한 곳이 어디가 있는지 자세하게 설명해 줬다. 바탐방에 대해 얘기하는 동안 그의 눈빛은 자신감으로 빛났고 양손으로 모자를 고쳐 쓸 땐 특유의 사람 좋은 웃음까지 지어 보였다. 또 그가 의도했든 안 했든 영어는 딱 내가 알아듣기 좋은 수준으로 구사했다(또박또박 느린 속도로). 간혹 내가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우뚱해도 친절하게 다시 한 번 말해줬다. 만약 그래도 내가 못 알아들으면 예전에 존에프케네디 국제공항(JFK airport)에서 만났던 입국 심사관처럼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영어도 제대로 못하다니, 인생 헛살았군’하는 표정을 짓기 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프랑스어를 하는 습관 때문에 영어 발음이 이상할 때가 있다며 양해를 구했다.
그는 상커 강이 태국 국경 지역에 있는 산에서부터 흘러나와 캄보디아 중앙에 위치한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큰 호수인 톤레삽(Tonle Sap)까지 흐른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듣는 순간, 흙탕물로만 보였던 황토색 강물에서 강한 생명력이 느껴졌다. 동시에 동남아에서 가장 큰 호수의 모습은 어떨까 호기심이 생겼다. 언젠가 이곳을 떠나기 전 이 강을 따라 톤레삽 호수까지 가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강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나와 강바람을 쐬며 더위를 씻어내고 있었다. 그들은 가볍게 운동을 하거나 삼삼오오 모여 앉아 대화를 나눴다. 강 사이 다리에 설치된 네온사인 불빛이 수면에 다채로운 색을 반사시켰다. 최근 우기가 시작되어서 강은 적당히 불었고, 유속도 보는 사람의 마음을 시원하게 할 만큼 빨랐다.
강변 광장을 지나는데 어디에선가 한국 가요가 들려왔다. 우린 음악이 흘러나오는 곳을 찾아갔다. 광장 분수대 앞에 캄보디아인 청년 여럿이 한국 가요에 맞춰 춤을 추고 있었다. 강변의 한가롭고 정적인 분위기와 대조되는 활기찬 모습이었다. 우리는 분수대에 걸터앉아 그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봤다.
재미있는 건 댄서들은 남자인데 음악은 전부 걸그룹의 것이라는 점이었다. 이들은 칼군무를 선보이며 완벽하게 안무를 소화해 냈다. 그러다 트와이스의 <Cheer Up> 전주가 흘러나오자 한쪽에서 스마트폰 삼매경에 빠져있던 소녀가 중앙에 섰다. 남자들이 음악에 맞게 춤을 춰야 한다는 강박이 보였다면 이 소녀는 음악과 하나가 된 듯 여유 있게 안무를 소화했다. 우린 ‘저 정도면 캄보디아의 쯔위라고 해도 손색이 없겠군’이라며 넋을 놓고 바라봤다. 사람들은 흥겨워 했고, 음악이 끝나자 여기저기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나는 내 멋대로 이들이 나를 위해 환영 공연을 해주었다고 생각했다. 옆에는 그토록 그리던 제이가 있었고, 나는 오랫동안 동경하던 상주하는 여행자가 되었다. 이곳에 온 지 겨우 하루밖에 안 됐지만 나는 벌써 이곳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스물아홉 나의 캄보디아 STAY, NOT ST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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