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잿빛으로 변하더니 이내 강한 소나기가 내렸다. 굵은 빗방울이 바닥에 떨어질 때마다 흙을 튀겼고, 세상은 온통 흙냄새로 가득 찼다. 상쾌한 흙냄새였다.
비는 금방 그쳤지만 곳곳에 커다란 웅덩이를 남겼다. 그 위에서 몇몇 아이들이 팬티 바람으로 물을 튀기며 놀았다. 사람들은 신발이 젖든 말든 웅덩이에 파동을 만들며 지나갔다.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제이와 나는 더 키친(The Kitchen)에서 닥터 후와 저녁을 먹었다. 우린 웅덩이를 피해 더 키친에 도착했다.
잠시 후 툭툭에서 중절모와 흰색 폴로셔츠 차림의 키가 큰 남자가 내렸다. 닥터 후였다. 우리는 가벼운 포옹으로 재회의 기쁨을 나눴다.
닥터 후는 소를 사랑하는 수의사인데, 바탐방대학교(University of Battambang)의 객원 교수로 있다. 그와 나는 엘살바도르에서 만나 알고 있는 사이였다. 엘살바도르를 떠난 후로는 별다른 연락 없이 지냈는데(이상하게도 외국에서 만난 인연을 한국에서 지속하기 위해서는 그곳에 있을 때보다 몇 배의 노력이 더 든다), 마침 바탐방에서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만난 것이다. 이럴 땐 정말 ‘세상 참 좁다’라는 말이 상투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더 키친은 상커 강변에 위치한 레스토랑이다. 이곳은 캄보디아 음식을 비롯해 웨스턴 음식, 멕시코 음식, 아시아 음식을 파는 곳으로 바탐방을 방문한 외국인이라면 한 번 정도는 꼭 들르는 곳으로 유명하다.
누군가 내게 ‘이 집에서 제일 잘하는 음식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어니언링을 추천할 것이다. 이곳의 어니언링은 내가 별로라고 여기는 식당들이 아무 양파나 골라 대충 튀겨 낸 것과는 질이 달랐다. 이곳에선 큰 양파만을 따로 선별해 꼼꼼하게 튀김옷을 입히고 그 위에 빵가루를 묻혀 어니언링을 만들었다. 꽃이 핀 듯한 모양과 바삭한 식감, 입안 가득 들어차는 단 양파가 일품이었다. 메뉴판에 ‘Freshly made crispy onion rings, best in Cambodia(갓 만든 바삭한 캄보디아 최고의 어니언링)’이라는 설명이 적혀 있었는데 최고라는 표현의 가장 적절한 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인지 더 키친의 메뉴판에 최고란 말이 들어간 건 어니언링이 유일했다.
우리는 레드와인으로 숙성한 폭찹과 어니언링을 주문했다. 폭찹은 부드러웠다. 특히 고기에 깊이 배인 와인 향이 좋았다. 어니언링은 말할 것도 없었다.
흔히 나이가 들면 지갑은 열고 입은 닫으라고 하는데 닥터 후는 지갑은 열고 입은 더 많이 여는 사람이다. 나는 말이 없어 대화를 잘 이끌지 못하는 성격인 반면 그는 늘 넘쳐나는 이야깃거리를 주체하지 못한다. 그는 어떤 이야기를 끝내면 곧바로 또 다른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래서 그가 이야기할 때는 언제 화제가 바뀔 지 모르기 때문에 집중해야 했다. 물론 그의 이야기는 대부분 재미있어서 굳이 집중력을 유지하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었다.
닥터 후는 자신이 1년 동안 캄보디아에 살면서 불편하다고 느낀 것들을 ‘4S’라는 말로 정리했다.
4S는 S가 들어가는 네 가지의 영어 단어를 말하는데, ‘Noise’, ‘Smell’, ‘Dust’, ‘Insect’가 그것들이다. 이 네 단어로 캄보디아를 설명할 수 있다고 하니 흥미로웠다. 그의 설명은 이랬다.
Noise: 결혼식과 장례식 때 울려 퍼지는 커다란 음악 소리.
Smell: 특유의 향신료와 젓갈 냄새.
Dust: 도로에 날리는 먼지.
Insect: 모기와 파리를 비롯한 수많은 벌레들.
캄보디아에 온 지 며칠 안 됐지만 듣고 보니 공감 가는 말이었다. 더불어 단순히 이것들에 스트레스를 받고 불평만 하는 것이 아니라 네 가지 단어로 정리해 설명하는 그의 모습에 감탄했다. 이 정도면 수준 높은 불평이라 할 만했다.
닥터 후는 곧이어 호주에서 온 키가 큰 외국인 교수 멜빈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닥터 후는 기숙사에서 지내고 있는데 얼마 전 멜빈이 앞방으로 이사를 왔다. 멜빈은 원래 근처에 있는 한 리조트에서 살고 있었다. 그는 편안한 리조트 생활에 만족했고 바탐방대학교에서 강의를 하며 안정적인 생활을 해 나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한 달 치 숙박비(US$350)에 버금가는 전기 요금 고지서가 날아왔다. 그는 리조트 주인에게 가서 항의했다. 리조트 주인은 그가 전기를 많이 사용하였고 이 고지서가 바로 그 증거라며 맞받아쳤다. 멜빈은 납득할 수 없었다. 그는 분노했고 전기 요금을 내지 않고 버텼다. 갈등의 골은 점점 깊어졌고, 나중에는 전기 요금과는 관계없는 자존심 싸움이 돼 버렸다. 리조트 주인은 멜빈의 버티기가 계속되자 육군 장교 출신인 아버지에게 도움을 청했다. 장교 출신 남자는 멜빈에게 ‘돈을 내지 않으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며 협박했다. 하지만 멜빈의 고집도 대단했다. 멜빈은 그의 협박을 허투로 들어 넘겼다.
하루는 멜빈이 자주 이용하는 툭툭 기사로부터 리조트 주인의 아버지가 폭력 조직과 관계를 맺고 있으니 조심하라는 주의를 듣는다. 그러고 나서 며칠 후 사고가 발생했다. 이른 아침 텅 빈 도로에서 자전거를 타던 멜빈을 한 오토바이가 치고 달아난 것이다. 다행히 크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그는 이 사고가 장교 출신 남자가 보낸 마지막 경고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수많은 오토바이와 자동차, 자전거, 무단횡단을 하는 사람들이 무질서하게 도로 위를 다녀도 사고가 잘 나지 않는데, 왜 하필 텅 빈 도로에 있던 그를 치고 달아났단 말인가. 멜빈은 두려웠다. 결국 그는 백기를 들었다. 그리고 그토록 주기 싫어했던 전기 요금을 모두 지불하고 리조트를 나왔다. 리조트 주인은 멜빈이 임대 계약을 끝까지 이행하지 않았다며 보증금 700달러를 돌려주지 않았다. 멜빈은 어떤 항의도 하지 못했다. 그로서는 그게 최선이었다.
우린 식사를 마치고 더 키친 옆에 있는 켄코(Kenko)라는 기념품 가게에 갔다. 아기자기한 기념품들을 팔고 늘 바닥에 바퀴벌레가 한 마리쯤 지나가는 그런 가게였다. 나는 웬만해서는 바퀴벌레를 발견하지 못하는데 제이는 더듬이만 나타나도 금방 그것을 발견하고 저것 보라며 굳이 보고 싶지 않은 나로 하여금 그것을 보게 했다. 그리고 언제나 그것을 죽이거나 쫓아내는 건 나의 몫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제이는 이미 커다란 바퀴벌레 하나를 발견하고 몸이 굳어 있었다. ‘도망가. 얼른. 거기 멀뚱멀뚱 서서 더듬이나 흔들 때가 아니라고. 계속 그렇게 있다가는 너도 나도 곤란한 상황에 처하고 말 거야’ 나는 제이의 명령이 떨어지기 전에 얼른 바퀴벌레가 도망가길 빌었다. 나중에 누군가 캄보디아에 가서 무엇을 하고 왔냐고 물었을 때, ‘음……, 그건 말이야. 매일 바퀴벌레를 죽였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스물아홉 나의 캄보디아 STAY, NOT ST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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