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탐방의 날씨는 한국의 한여름에 국민안전처가 폭염주의보를 발령할 때와 비슷했다. 보통 이런 날씨엔 ‘노약자의 야외활동 자제, 충분한 수분 섭취, 물놀이 안전 등에 유의하세요’ 같은 경고 메시지를 받게 되는데, 이곳에서는 매일 이런 주의를 따르며 생활해야 했다.
많은 사람들이 동남아 사람들이 게으르다고 말하는데, 어떤 날씨 속에서 생활하는지 모르고 하는 소리다. 이곳에 와서 지내보면 왜 현지인들이 시도 때도 없이 낮잠을 자는지, 왜 한낮에 그늘 아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게 앉아 있는지 이해가 갈 것이다.
이런 날씨에는 툭툭 기사들이 아무리 호객 행위를 하더라도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거부 의사를 표현하면 안 된다. 고개를 좌우로 흔드는 것만으로도 구토와 현기증을 유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여행객은 이런 무더위 속에서 툭툭 기사들의 호객 행위에 일일이 고개를 흔들어 거절하다가 그만 현기증이 나 쓰러졌다고 한다. 결코 농담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현기증을 일으키지 않고 호객 행위를 거절하는 방법으로는 손을 활용하는 것을 추천한다. 한 손을 들고 손바닥과 손등이 번갈아 보이게 앞뒤로 돌려주거나 검지손가락을 좌우로 흔들면 된다. 아예 반응을 하지 않으면 더 적극적으로 말을 걸어오니 이런 식으로라도 거절하는 편이 낫다.
더위가 절정에 이를 땐 괜히 버티지 말고 에어컨이 있는 카페를 찾는 게 상책이다. 나는 아무리 낯설고 별 볼 일 없는 여행지에 가도 마음에 드는 카페 한 곳만 발견하면 몇 날 며칠을 머물 수 있다. 처음부터 바탐방에 쉽게 정을 붙일 수 있었던 것도 다 이런 이유에서였다.
바탐방에는 꽤 괜찮은 카페들이 여럿 있었다. 그중 내가 주로 가는 카페는 세 곳 정도였는데, 각 카페마다 개성이 뚜렷해 상황에 따라 찾는 카페들도 달랐다.
내가 가장 자주 가던 카페는 차야 호텔 바로 옆에 위치한 카페 크레마(Cafe Crema)였다. 이곳은 출입문 앞에 ‘일주일 후 문 엽니다’라는 팻말을 걸어 놓아야 하는 건 아닐까,할 정도로 여백이 많은 곳이었다. 물론 여백이 많다고 인테리어가 별로라는 말은 아니다. 흰 벽과 드문드문 놓인 몇 개의 테이블 그리고 황금빛 텅스텐 전구들은 아늑하고 편안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곳이 로스터리 카페라는 건 입구에 있는 붉은색 로스터기를 보고 쉽게 알 수 있었다. 하루는 운 좋게 카페 주인이 직접 생두를 볶는 모습을 볼 기회가 있었다. 붉은색 원통이 열기를 뿜으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규칙적인 요란함이었다. 생두가 원통 안을 쉼 없이 돌아다니며 촤아촤아 소리를 냈다. 카페 안은 조금 후끈거렸고 금세 꽃향기와 곡물 냄새로 가득 찼다. 커피 라벨지에 달콤한 꽃향기라고 적힌 말을 글로만 읽었을 때는 커피 향을 낭만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쓰인 과장된 표현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다는 걸 알게 됐다. 꽃향기와 함께 풍기는 곡물 냄새는 어릴 적 목욕탕에 갈 때마다 지나던 방앗간에서 퍼져 나오던 고소한 냄새를 떠올리게 했다. 연두색이었던 원두가 점점 갈색으로 변했고 고소한 향이 정점에 달하자 주인의 움직임이 바빠졌다. 주인이 마지막으로 원두의 상태를 확인하고 볶음 통 전면의 덮개를 열자, 쏴아, 반질반질 윤기를 두른 원두가 채반 위로 쏟아져 나왔다. 채반 안의 날개가 돌면서 아직 김이 피어오르는 원두를 식혔다. 그제야 익숙한 커피 향이 느껴졌다.
카페 크레마에서 주로 마셨던 커피는 콜드브루였다. 내가 알기론 바탐방에서 콜드브루를 마실 수 있는 곳은 이곳이 유일했다. 콜드브루를 주문하면 잘게 쪼갠 얼음이 담긴 마티니 잔과 산미가 풍부한 콜드브루 원액, 그리고 물이 함께 나왔다. 원액을 마티니 잔에 붓고 물로 내가 원하는 만큼 희석시킨 후 마시면, 내내 시달렸던 더위를 잊을 수 있었다.
바탐방에 오는 여행객들에게는 카페 크레마보다 크냐이(Kinyei, 생강이라는 의미)가 더 유명할 것이다. 트립 어드바이저(Trip advisor)라는 웹 사이트에 리뷰가 많아서 그런 것도 있지만 실제로 가보면 꼭 그것만이 유일한 이유는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크냐이는 좁은 골목에 위치한 아담한 2층짜리 숍 하우스 건물1층은 상점, 2층은 주거공간인 형태의 주택에 있는 카페였다. 에어컨은 없지만 개방형 공간이라 커다란 실링팬과 선풍기만 돌려도 시원한 바람이 카페 안을 돌아다녔다. 이곳은 호주인 주인과 캄보디아 바리스타 챔피언십(Cambodia National Barista Championship)에서 우승한 캄보디아인 바리스타 사나카가 운영했다. 그래서 메뉴에는 롱블랙이나 플랫화이트 같은 호주식 커피들이 있었고, 그 질이 높았다.
이곳에서 주로 마신 커피는 롱블랙이었다. 에스프레소까지는 아니지만 갈색의 두툼한 크레마가 덮인 진한 커피다. 롱블랙은 아메리카노와 비슷하지만 엄연히 다른 종류의 커피다. 아메리카노는 미리 추출한 에스프레소에 뜨거운 물을 붓지만 롱블랙은 뜨거운 물 위에 에스프레소를 추출해 표면에 풍부한 크레마를 덮는다. 물의 양도 아메리카노보다 적기 때문에 걸쭉한 질감을 즐길 수 있다.
가끔 이렇게 유명한 카페에 오면 유명해서 커피가 맛있게 느껴지는 것인지 진짜 커피가 맛있어서 맛있게 느껴지는 것인지 헷갈릴 때가 있는데, 크냐이는 이런 의심을 할 필요가 없는 곳이었다.
마지막으로 자주 가던 곳은 잔바이(Jaan Bai)었다. 이곳은 크냐이에 갔다가 문이 닫혀 그 주변을 돌아다니다 우연히 발견한 곳이었다. 외벽에 커다란 벽화가 그려져 있어 단번에 나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안으로 들어가자 ㄴ자 모양의 바(Bar)가 먼저 눈에 띄었다. 흰 벽에는 미술관처럼 그림들이 걸렸고, 바 앞으로 사각형 원목 식탁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놓여 있었다. 그리고 한쪽 면에는 유럽식 패턴 타일을 두른 긴 의자가 있었는데 그곳에 앉으면 타일의 차가운 촉감이 전해져 시원했다. 나는 이곳에서 아이스커피를 마시곤 했다. 보통 카페에 가면 아이스 아메리카노, 카페모카, 카페라떼 같이 전문용어를 써서 메뉴를 분류하기 마련인데, 소박하게 아이스커피라고 써 놓은 게 마음에 들었다. 아이스커피를 주문하면 에스프레소와 얼음을 넣은 투명 유리잔, 우유가 든 작은 호리병, 따뜻한 시럽이 든 작은 사기 주전자가 함께 나왔다. 보통 커피에 시럽을 넣으면 잘 녹지 않아 다 마셔갈 때 즈음 갑자기 달아 지는 경우가 많은데, 따뜻한 시럽은 넣는 순간 녹아 균형감 있는 단맛이 느껴졌다. 잔바이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작지만 큰 배려였다.
사실 이곳은 카페가 아니라 음식점이다. 잔바이라는 말도 캄보디아어로 밥그릇을 의미한다. 하지만 나는 결코 식사를 목적으로 이곳에 가지는 않았다. 이곳에서 식사하길 꺼렸던 이유는 다른 식당들에 비해 값이 비쌌기 때문이다. 간혹 내가 이곳에서 식사를 하는 경우는 아이스커피를 주문해 놓고 책을 읽다가 밥때를 놓쳐 허기진 마음에 메뉴판을 펼치는 실수를 할 때뿐이었다. 오징어 튀김 같이 적당한 가격에 맛있는 음식도 있었지만 어떤 건 간에 기별도 안 가는데 지갑에서 20,000리엘(US$5)짜리 지폐를 두 장 이상 꺼내야 하는 경우가 생기기도 했다.
가끔 가게에 점원들과 나만 있을 때는 점원들이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노래를 부르는 진풍경이 펼쳐지기도 했다. 특히 영화 『분노의 질주: 더 세븐』의 주제곡인 <See you again>을 열창할 때는 듣고 있기 민망해 자리를 피해 줘야 하나,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렇게 점원이 노래를 부르는 날엔 계산대 옆에 있는 고객의 의견 카드에 ‘고음이 불안함’, ‘도입부에서 박자를 놓침’, ‘가사가 부정확함’ 같은 의견을 적어놓곤 했다. 물론, 한국말로 말이다.
스물아홉 나의 캄보디아 STAY, NOT STAY
구매를 원하신다면 아래 링크를 확인해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