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광주민주화운동’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영화들
1980년 5월 18일. 광주, 전남 일원에서 신군부의 집권 음모를 규탄하고 민주주의의 실현을 요구한 민중항쟁이 진행되었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은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 새벽까지 열흘 동안, ‘비상계엄 철폐’, ‘유신세력 척결’등을 외치며 항거한 역사적 사건이다. 그러나 오랜 세월 ‘광주사태’, ‘광주소요사태’, ‘폭동’ 등으로 불리며 은폐 혹은 축소되어 왔다.
1994년에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정신을 계승하고 진상조사, 기념 및 추모행사, 학술문화사업, 사회봉사 등의 활동을 목적으로 '5·18기념재단'이 설립되었다. 1995년에 이르러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었고, 희생자에 대한 보상 및 희생자 묘역 성역화가 비로소 이뤄졌다. 1997년부터는 '5·18민주화운동기념일'을 국가기념일로 제정해 정부 주관 기념행사가 열렸다. 2011년 5월에는 관련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정식으로 등재되었다.
그간 1980년 광주를 모티브로 한 영화들이 지속적으로 개봉되었다. 그 영화들은 같은 시기를 소재로 삼았지만 조금씩 다른 시선으로 사건에 접근하였다. 주인공을 누구로 삼느냐에 따라 스토리텔링 방식과 초점은 조금씩 달라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다양한 시선을 통해 우리는 보다 풍성하게 이 역사를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광주에 살았던 사람들의 눈으로
최윤의 소설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를 원작으로 하는 <꽃잎>(1996)은 ‘5·18광주민주화운동’을 본격적으로 그린 영화이다. 공사장 인부와 정신을 놓은 소녀가 주로 극을 이끌어가고, 다른 한 편에는 일행들이 의문사를 당한 친구의 여동생을 찾고 있다. 홀로 남겨진 소녀는 총격에 쓰러진 엄마를 버려두고 도망친 기억에, 시체들과 함께 실려 가다 탈출한 충격에 사로잡혀 있었다.
<화려한 휴가>(2007)는 택시기사인 민우와 그의 동생 진우, 간호사인 신애가 겪은 5월의 광주를 이야기한다. 소소한 일상을 지니던 이들은 무고한 시민들이 폭행과 죽임을 당하는 일을 목격하게 된다. 가족과 친구를 잃게 된 사람들은 시민군을 결성하고 사투를 벌인다. 영화의 제목인 ‘화려한 휴가’는 당시 계엄군의 비공식적인 작전명으로 알려져 있다.
<오월애>(2010)는 80년 광주를 직접 겪은 이들을 찾아간 다큐멘터리이다. 시민군으로 참여했던 사람들, 차량 시위를 하던 사람들, 주먹밥을 만들어 나르던 사람들이 주인공이다. 이름도 없이 살아온 이들이 어느덧 중년의 나이를 넘어섰다. 3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들의 몸과 마음에는 여전히 상처가 새겨져 있었다. 주목받지 못한 이들의 기억은 혼자만의 고통으로 축소되고, 항쟁의 기록에서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을 그린 영화들의 대표적인 역할은 위령제 혹은 진혼곡이었다. 이 같은 영화들은 광주시민들이 그날 겪었던 한과 슬픔을 위로한다. <화려한 휴가>의 마지막 장면은 자신들을 잊지 말아달라는 울부짖음이었다. 누군가는 어서 잊히기를 바라겠으나, 결코 잊혀서는 안 될 역사의 한 페이지다.
군인의 신분으로 광주를 찾았던 사람들
<박하사탕>(1999)의 여정은 “나 다시 돌아갈래”라는 주인공 영호의 간절한 외침으로 시작된다. 지금은 폐인처럼 되어버렸지만 영호에게도 한 때 순수했던 시절이 있었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타락하도록 만들었을까? 관객들은 영호와 함께 시간의 역순으로, 그의 과거로 점차 거슬러 올라간다. 그 변곡점에는 ‘5·18광주민주화운동’과 오발사고가 있었다.
<군함도>(2017)와 함께 개봉하여 큰 주목을 받지 못했으나 <포크레인>(2017)도 시위 진압에 참가했던 공수부대원이 주인공을 맡은 영화이다. 구성은 단순하다. 주인공은 굴삭기를 몰고 군대생활을 함께 했던 동료들을 만나러 다닌다. 제대한 이들은 농민, 은행원, 경찰, 종교인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 만나보니 누군가는 불현듯 폭력성을 보이고, 또 누군가는 알코올 중독 상태이다. 다 그런 것은 아니다. 번듯한 직장에 다니며 사회생활을 유지하는 사람도, 자신의 과거를 변명으로 합리화하려는 사람들도 있었다.
두 영화는 당시 군 복무 중이었고, 광주에 진압군으로 파견되었던 인물의 후일담을 엮어 만든 것이다. 가해자의 입장에 섰지만, 그들 역시 오랜 세월 트라우마를 지닌 채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의 영혼은 부당한 명령에 의해 피폐해졌다. 어디서도 말할 수 없는, 묻어둘 수 밖에 없는 비밀을 늘 가슴에 품고 산다. 무엇으로 이 고통을 덜어낼 수 있을까?
광주일보는 지난 5월(2017.5.15) 중위 계급으로 광주에 투입되었던 공수부대 현장지휘관의 고백을 기사로 실었다. 그는 전남도청 앞에서 시위 군중을 향한 공수부대의 집단발포가 있기 전에 군내부적으로 조직적인 실탄 분배가 있었다고 증언했다. 사태 악화 배경의 하나로 베트남 전쟁 참전 경험이 있는 하사관들 중 일부를 지목하기도 했다. 그때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분명 더 있을 것이다. 그들의 자기고백과 반성이 좀 더 이어져야 할 것이다.
그 날 이후 유가족들은 어떻게 살아왔을까?
<26년>(2012)은 포털사이트에서 인기를 끈 강풀의 웹툰을 영화로 만든 것이다. ‘5·18광주민주화운동’ 후 26년이 지난 시점을 배경으로 한다. 당시 희생자의 2세들은 조직폭력배 중간보스, 국가대표 사격선수, 교통경찰관으로 성장했다. 계엄군으로 광주를 찾았던 이는 보안업체의 총수가 되었다. 이들이 모여 한 사람을 타깃으로 한 프로젝트를 계획한다.
영화는 학살의 주범을 찾아가 그를 단죄하고 복수한다는 파격적인 소재를 지녔다. 전직 대통령의 예우와 경호를 받고 있는 이를 암살하기 위해 주인공들은 치밀한 계획을 세워나간다. 이들의 계획은 좌절되기도 하고, 내부 분열과 갈등, 위기를 맞이하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점차 목적에 다가선다.
시간이 약이라 하며,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잊힐 것이라 여기지만, 그날의 비극은 살아남은 자들에게 여전히 계속되는 아픔이었다. 역사를 잊은 이들에게 고통은 또 다른 버전으로 반복되기 마련이다. 단죄와 심판, 치유의 화두를 던지는 것은, 과거사의 정립이라는 면에서,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질문이라 여겨진다.
<26년>은 웹툰으로 처음 공개된 후, 몇 차례 제작 시도가 있었지만, 번번이 무산되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제작두레’라는 방법이 도입되었다. 홈페이지 회원가입을 통해 제작비를 약정하는 방식이었다. 그리하여 약 7억 원의 제작비가 모였다. 대기업의 자본에서 탈피하여 모두가 영화를 만든다는 새로운 참여의 방법을 제시했다. 어려운 여건을 극복하고 이러한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선례를 만든 것이다.
타지 사람들이 겪은 광주
<택시운전사>(2017)는 외국인 기자를 광주에 데리고 간 택시운전사의 이야기다. 당시 도쿄 특파원으로 근무하던 위르겐 힌츠페터는 광주에서 벌어진 일들을 촬영하여 전 세계에 알리는 역할을 했다. 그는 2003년 ‘송건호언론상’을 수상하며 “나를 광주까지 태워주고 안내한 용감한 택시기사 김사복에게 감사한다”라고 전했다. 하지만 그는 김사복을 다시 만나지 못했다.
<스카우트>(2007) 초고교급 투수를 스카우트하기 위해 광주에 내려간 대학 야구부 직원 호창의 이야기이다. 라이벌 학교에게 3연패를 당하자 이를 설욕하기 위해 생각해낸 묘수가 광주일고의 선동열을 스카우트하는 것. 그러나 막상 광주에 내려가 보니 선동열의 얼굴조차 보기 힘들다. 여러 사람들의 도움으로 결국 선동열을 만나게 되었지만, 계약 직전에 ‘5·18광주민주화운동’을 겪게 된다.
두 영화의 주인공은 우연한 기회에 광주를 찾게 되었고, 본의 아니게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인물이었다. 두 사람은 외부인의 시선으로 광주를 겪고, 바라보았다. 그날 그 자리에 있지 않았던 대다수의 국민들을 대표하는 인물로, 우리는 이들의 눈과 귀와 발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그날을 체험한다.
어떠한 사건에 대해 외부인의 시각은 늘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세상은 언제나 가변적이고, 새롭게 등장하는 사건들은 외부인과 내부인의 위치를 가차 없이 뒤바꾼다. 그때 서로의 접점을 이어주는 것은 상처 입은 자들이 형성한 공감대이다. 진도 팽목항에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518 엄마가 416 엄마에게. 당신 원통함을 내가 아오. 힘내소, 쓰러지지 마시오.” 이러한 연대가 불행한 역사의 반복을 종식시킬 것이다.
<택시운전사>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택시의 추격신이 아니었다. 거리에서 주먹밥을 나눠주고, 주유소에서 공짜로 기름을 얻어 쓰고, 자신의 부품을 내주며 자동차를 수리해 주는 지점이었다. 혼돈스러운 세상 속에서도 서로를 위해 헌신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저항 가운데 아름다운 자치공동체를 만들어 유지했다. 민주정신과 함께 한 대동정신은 오랫동안 기억되고 이어져야 할 유산이다.
최근 광주지법은 ‘5·18광주민주화운동’ 등 역사를 왜곡했다는 이유로 <전두환 회고록>의 출판 및 배포를 금지했다. “표현의 자유의 한계를 초과해 5·18의 성격을 왜곡하고, 5·18 관련 집단이나 참가자들 전체를 비하함으로써 사회적 가치·평가를 저해했다”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전 대통령 측은 전직 대통령의 회고록을 금서 취급하는 것은 인권탄압이라는 입장을 보였다. 꽤 많은 세월이 흘렀다지만 ‘5·18광주민주화운동’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저들이 세워둔 성채는 견고하다. 우리가 계속하여 잊지 말아야 하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