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세상을 헤쳐나가는 두 여인의 긴 여정을 따라가다
‘벡델 테스트’라는 것이 있다. 미국의 만화작가 앨리슨 벡델이 남성 중심 영화들이 얼마나 많은지 계량화할 방법을 찾다가 처음 만들어졌다. 영화 안에서 ① 이름을 지닌 여성 캐릭터가 적어도 두 명 이상 되는지, ② 이 여성끼리 한 번이라도 대화를 나누는지, ③ 그 대화 속에 남자 주인공에 관한 것이 아닌 다른 주제의 내용이 있는지를 본다. 매우 간단한 조건이지만 이 기준을 통과하는 영화는 많지 않았다. 거대 자본이 투입될수록 더 통과하기가 어렵다고 한다.
‘지나 데이비스 포용 지수(GD-IQ)’는 인기 드라마 <커맨더 인 치프>(abc)에서 미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 역을 맡은 지나 데이비스가 고안해낸 것으로,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한 배우의 노출 빈도, 대사 분량, 대화의 질 등을 성별로 집계하여 그래프로 나타낸다. 결과를 보니 남성 배우들의 출연 분량은 여성 배우들의 분량을 2배가량 압도했다. 심지어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작품에서조차 그러했다고.
이러한 기준을 통과했다고 해도 그 영화가 반드시 젠더 개념에 충실하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대중문화 가운데 남성 중심적인 문화, 남녀의 성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이 얼마나 고착화되어 있는지 확인이 가능하다. 여성이 서사의 중심에 있는 영화, 여성 감독이 만든 영화는 그 자체로 흔치 않다. 여성의 문제를 다루고, 그 문제에 대한 대안적 전망까지 제시하는 영화를 찾기란 더더욱 어렵다. 이러한 것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공통적인 현상일 것이다. 흔히 드는 이유라면 상업성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
이러한 기근 가운데서도 여성을 표방하는 영화들이 등장하고 있다. 1980년대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두 명의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들을 찾아보았다. 두 인물의 관계를 통하여 여성을 어떻게 그려지고 있는지, 이들이 처한 문제 상황들과 그것을 어떻게 헤쳐나가는지 관찰함으로써 당대에서 여성에 대한 이해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었다.
위로를 얻은 두 여자
여행을 하던 도중 남편과 싸우고, 라스베이거스 인근의 황량한 모하비 사막에 홀로 남겨진 독일 여인 야스민. 큰 가방을 끌고 모텔을 겸하는 허름한 카페에 들어선다. 카페 주인인 브랜다는 무능한 남편을 내쫓은 상황. 그녀에게는 삭막한 일상이 남겨준 신경질과 짜증, 날카로움만 남았다. 이렇듯 그녀들의 첫 만남은 고단한 삶의 한가운데였다. 두 여인의 삶은 척박한 사막을 닮아있다.
손님으로 찾아온 야스민은 특유의 친밀감을 발휘하여 모텔을 청소해주고, 그림의 모델이 되어주고, 카페에서 마술 공연을 하며 사람들과 가까워진다. 야스민은 주변 사람들에게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존재가 되어주었다. 야스민에게 거리감을 유지하던 브랜다도 점차 마음을 열어 그녀를 진심으로 받아들인다. 불신과 오해, 경계심에서 벗어나, 점차 강한 유대감을 만들어 간다.
이 영화는 주제가인 'Calling You'가 유명하다. 이 권태롭고 희망 없는 삶을 구원해 줄 누군가를 목 놓아 부르는 것 같다. 그 구원자는 백마를 탄 초인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남편과 대판 싸우고 길가에 버려진 뚱뚱하고 볼품없던 아줌마가 그러한 역할을 감당해냈다. 한 사람의 따뜻한 마음이 주변 사람들의 무력한 날들을 변화시키는 동안, 그 자신의 삶도 함께 변해 가는 기적을 체험했다.
<바그다드 카페>(1987)는 80년대를 대표하는 페미니즘 영화로 곧잘 소개된다. 영화를 통해 남편들이 사라지거나 혹은 쫓겨난 공간을 배경으로 연대의식을 가진 두 여성이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를 만들어 간다는 선명한 메시지를 지녔다. 관습적인 여성상이 아닌 여성 내면의 아름다움에 주목한 것도 특징이다. 여성적 가치와 그것이 지닌 본연의 힘에 대해 자연스럽게 생각하게끔 만들어 준다.
자유를 선택한 두 여자
<델마와 루이스>(1991)는 두 여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로드무비이다. 가정주부인 델마와 레스토랑 종업원인 루이스는 권태로운 일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주말 낚시 여행을 떠나기로 한다. 작은 술집에서 해방감을 맛보는 것도 잠시, 델마가 술집 주차장에서 성폭행을 당할 위험에 처한다. 이를 막던 루이스가 그 남자를 총으로 쏴 죽이는 사건이 발생하고 만다. 이후로 이들은 경찰을 피해 달아나는 대장정을 시작한다.
탈주의 여정을 통해 델마는 드라마틱하게 성장해간다. 처음 여행을 떠날 당시, 소극적이었던 델마는 점차 도전적인 성격으로 변해갔다. 가부장적인 남편 아래서 기죽어 살던 델마는 건달 사기꾼을 만나 전재산을 잃었다. 이후, 주유소 편의점에서 강도질에 가담하면서부터 적극적인 여성으로 탈바꿈하기 시작한다.
두 여성이 만난 길 위의 남성들은 대체로 부정적인 모습으로 등장했다. 성적인 농담으로 희롱하던 유조선 운전사에게 루이스는 묻는다. “누군가 당신의 어머니, 동생, 부인에게 그런다면 좋겠는가?” 대답을 찾지 못한 운전사가 욕을 해댔고, 요구한 사과를 받지 못 한 이들은 총을 쏴 유조차의 탱크를 폭파시킨다.
두 여인의 탈출은 목적지인 멕시코에 이르지 못하고, 그랜드 캐년의 벼랑에서 마무리되었다. 산에서 캠핑과 낚시를 즐기겠다던 그들의 소박한 꿈은 막다른 길에 이르렀지만, 두 사람의 앞길을 막지는 못 했다. 투항을 종용하는 경찰들을 뒤로하고, 델마와 루이스는 서로의 손을 맞잡은 채, 하늘을 난다.
새로운 삶을 찾아 함께 도주한 두 여자
<몬스터>(2003)는 에일린 워노스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이다. 그는 1989년부터 1990년 사이에 6명의 남성을 살해했고, 최초의 여성 연쇄살인범으로 기록되었다. 12년 동안 복역을 하다가 2002년 사형을 당했다. 주연을 맡은 샤를리즈 테론은 아카데미, 골든글로브, 베를린영화제 등에서 여우주연상을 휩쓸었다. 배역을 위해 몸무게를 14kg 늘리고, 틀니를 끼는 등 외모적으로 파격 변신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에일린의 어릴 적 회고로 영화가 시작된다. 스타가 되고 싶었던 꿈 많던 소녀는 성폭행과 아동학대를 받게 되었다. 동생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성매매까지 하게 되었으나 버림을 받는다. 절망에 빠져 있던 어느 날 바에서 셀비라는 소녀를 만나 밤새 술자리를 하고 잠자리까지 신세 지게 된다. 이후로도 둘은 계속 만나며 급격하게 친해졌다. 돈을 마련하기 위해 몸을 팔던 어느 날, 에일린은 변태적이고 폭력적인 남자를 만나게 되었고, 우발적으로 살인까지 저지른다. 에일린은 새로운 일을 찾아 나서지만 변변찮은 배경을 지닌 그가 직장을 구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다시 거리로 나서게 된다.
에일린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 몸을 팔게 되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안 동생들에 의해 쫓겨나 고향을 등지게 된다. 셀비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고,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몸을 팔다가 살인에 빠져들게 되었다. 하지만 결국 그 사랑마저도 지키기 못 했다. 그의 입장에서는 늘 사랑과 희생을 해왔지만, 결국은 파국으로 빠져들고 만다. 무엇이 어디서부터 그를 괴물(몬스터)로 만들어 버린 것일까?
셀비는 에일린에게 새로운 시작을 선사해 준 사람이었다. 에일린에게 애정을 주며 다가왔지만, 그 사랑을 지켜주지는 못 했다. 사랑의 관계는 주고받는 것인데, 그는 끊임없는 관심과 보살핌을 필요로 하는 존재였다. 영화의 카피는 "사랑을 지키기 위해 살인을 멈출 수 없었다!"라고 말한다. 사랑에 굶주린 에일린은 셀비와의 해피엔딩을 위해 사력을 다하지만, 그 끝은 절망을 향해 달려간다. 두 사람의 관계가 보다 동등하게 자리 잡았더라면, 서로를 위해 서로가 힘을 보탰다면 그 끝은 좀 더 달라지지 않았을까?
여성 영화는 어디로
최근 두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들이 주목을 받고 있다. 예를 들자면 <가장 따뜻한 색, 블루>(2013)와 <캐롤>(2015) 같은 작품들. 입소문을 타며 지속적으로 마니아를 끌어들이고 있다. 국내에서는 박찬욱 감독이 영화 <아가씨>(2016)를 통해 두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 세운 바 있다. 칸영화제에서는 '메일 게이즈'(male gaze·남성의 시선)라는 평을 듣기도 했다. 남성적 시각에서 동성애 베드신을 그렸다는 것이다.
얼마 전 <걸캅스>(2018)가 개봉했다. 전설의 여형사였으나 민원실로 발령 난 미영과 참지 못 하여 열정적이고 정의감 넘치는 사고뭉치 형사 지혜가 주인공이다. 둘은 민원실에 신고를 접수하러 온 여성의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를 목격한다. 48시간 뒤면 업로드될 것이라 예고된 디지털 성범죄 사건의 피해자임을 곧 알게 되었다. 두 사람은 힘을 모아 비공식적인 합동수사를 시작한다. 또 다른 여성들의 지원을 바탕으로 성공적인 마무리에 이른다.
수사를 함께 하는 동료이지만, 두 사람의 실제 관계는 시누이와 올케 사이. 무능한 남편이자 오빠를 두고, 두 사람이 잠시 으르렁거리기는 하지만 그건 감초 같은 장면일 뿐 본질적인 스토리라인은 아니다. 그러고 보면 한국 드라마의 가장 주요한 배경이 시월드임이 분명한데, 이상하게도 영화에서는 잘 다루지 않았던 것 같다. 한국 영화의 주요 인물들이 남성이고, 그들이 모든 사건의 중심이다 보니 그 흔한 고부간의 갈등 같은 요소들조차 쉽게 담기지 않았던 것. 영화계가 여성들에게 얼마나 기울어진 운동장인지 실감하게 된다.
영화의 흥행과 함께 새롭게 주목받은 것이 있으니 '영혼 보내기'. 관객이 직접 극장에 가지 못 하더라도 표를 구매해 주는 것이다. 이를 통해 좌석점유율이 높아지고, 극장에서 더 오래 상영될 수 있다. 지난해 <미쓰백>(2018)에서 부터 시작된 이 운동은 여성이 주인공인 영화는 돈이 되지 않는다는 통념에 정면으로 반박하는 방편이 되었다. 관객이 반응한다는 인식이 확대되면 여성 문제를 다룬 영화들이 향후 투자받기에 유리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