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 당시에는 자책하고 감정을 애써 억누르고 나의 예전 성격으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연인의 도움으로 다시 중심을 잡을 수 있었다.
자책하는 것도 멈추었다. (그래도 조금은 남아있다.)
대신 분노가 하루가 갈 수록 커져만 갔다. 그래놓고 연락 한 통 없고, 무책임하게 행동하는 동생이 미웠고
이번이 처음도 아니고, 매번 이런식인 동생에게 실망했다.
깨달은 것처럼 말하던 건 정말 말뿐이었구나.
또 말로 자신을 포장하는 동생에게 속았구나. 생각이 들었다.
그 날 이후, 불안도가 올라가서 집에서 잠을 자기 어려웠다.
또 경보기가 울리는 것 같고,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너무 불안해서 미칠 것 같았다. 동시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냥 하루종일 잠만 자고 싶었고, 몸이 축 늘어지는 것 같았다. 침대에서 나오기 싫었다.
그러면서도 집에서 있기엔 불안해서 억지로 겨우 몸을 일으켜 집에서 나왔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러다 다시 호텔이나 찜질방에서 잠을 자며 밖에서 떠돌아다니던 그 시절로 돌아갈 것 같아 더 두려웠다.
이사와 경제적인 문제로 중단했었던 상담을 다시 받아보기로 했다.
비록 한 번의 상담이었지만, 일단 급한 불은 끌 수 있었다.
어떻게든 집에서 잠을 자보려고 했다.
그 과정에서 아빠한테 동생과의 일을 이야기했고,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꾸역꾸역 다시 일어나 마음을 추스리려고 노력하며 지내고 있던 중,
왈칵, 분노와 원망이 밖으로 쏟아졌다.
아빠는 기다리라고만 하는데, 난 도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고 왜 맨날 나만 기다려야 할까.
숨 쉬기 힘들어하고, 답답해하고, 갑자기 가슴이 두-근. 하는 느낌이 들 때가 많아졌다.
연인과 함께 있어도 안정적이지 못하고,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그런데 아빠는 동생한테 뭐라고 했더니 동생은 양쪽 말도 안 들어보고 그런다고 하면서 끊었다고 전화도 안 받고 하지도 않는다고 나에게 하소연하셨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혹시 동생의 그 한마디에 넘어가신 건가 싶었지만 아닐거라고 고개를 저었다. 오죽 답답했으면 그러실까. 생각했다.
그 뒤로 기분 탓인지 유독 틱틱대는 아빠의 말투가 신경 쓰여
말투가 틱틱거리는 것 같다고 무슨 일 있냐고 물어봤다가
아니라고, 넌 조금만 그래도 틱틱댄다 그러고 사람이 그럴 때도 있는 거라고 다그치셨다.
서운했다. 동생이 그런 말 할때는 나한테 내가 진짜 그렇게 말해? 라고 물어보면서 신경 쓰셨으면서
내가 말하는 건 왜 죄다 부정적으로 받아들일까.
아빠야말로 부정적이고 예민하게 받아들이면서 왜 나한테만 부정적이고 예민하다고 할까.
결국 아빠한테 내가 얼마나 힘든지도 모르고 방치하는 것 같다고 뭐라 했다.
그랬다가 아빠의 화, 성질, 모든 분풀이를 온 몸으로 받았다.
다른 건 홧김에 그럴 수 있어도 그 날의 이야기를 다 들은 아빠가 그 말을 나에게 하신 건 이해할 수 없었다. 아빠는 "이래서 00가 양 쪽 입장 들어봐야한다고 한거야!"라고 하셨다.
동생한테 무슨 말을 더 들은 것도 아니고, 나한테 그 날의 이야기를 들은 게 전부면서
어떻게 동생의 그 한 마디로 나한테 그럴 수 있을까.
설마설마 했는데, 정말 그 한마디에 넘어간거였다는 걸 확인이 되는 순간이었다.
내 말은 그저 너만 그렇게 생각하는 거라고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서
동생의 말은 늘 그렇게 잊지도 않고 잘만 듣고, 공감도 잘 해주고, 이해해주는 아빠한테 배신감이 들었다.
원래 차별하는 부모님이신건 알지만, 그래도 믿었던 마음이 무너졌다.
그러면서 아빠는 언제까지 어릴 때 상처를 들먹일거냐면서 뚝하면 그런다고 하셨다.
아빠는 어릴 때 받은 상처 아직도 같은 이야기를 몇백번을 넘게 하시면서
딸의 상처를 보듬어주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게 그렇게 힘들었나.
그럼 나는 안 힘들어서 평생을 들어드리고 위로하고 공감해드렸을까.
아무리 홧김이어도 동생편을 들고, 나의 상처를 건드리면 안 되는 거였다. 그것도 그 상처를 준 사람이.
그것도 부모가. 한 두번도 아니고, 내가 힘든 시기인 걸 알면서.
그 통화 후, 어지럽기 시작했고 감기도 아닌데 열이 났다.
내 마음은 다 아물지 않았는데 계속 사과하는 아빠의 모습에 흔들려서 나도 다시 다가가보려고 하는데
그 과정에서 또 아빠는 나한테 성질을 냈고, 상처 주는 말들을 쏟아냈다.
내가 엄마랑 있었던 일도 아빠가 다 알고, 아빠도 엄마가 그럼 안 된다고 하셨으면서
왜 아빠도 똑같이 그러냐고 하니
아빠는 "그랬는데 당해보니까 아니야" 라고 말하셨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반박만 하고, 도저히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내가 울분을 토하는데도 여전했다.
그러면서 나한테 대화가 안 된다고 하시고, 본인의 행동을 나한테 떠넘겼다.
도저히 말이 안 통해서 아빠가 하는 행동과 말을 똑같이 하면 나보다도 몇 배 더 화내면서
어떻게 본인의 행동이나 말이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걸 모르시는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정말 억울했고, 셋이서 나를 공격하는 느낌이 들었고, 외로웠고 소외감이 들었다.
사람들이랑 있어서 끊어야 된다는 아빠의 말에 전화를 끊었다.
다시 허망함과 공허함이 들었다. 그리고 무기력함, 무력감, 분노, 좌절감, 절망감 등등 온 감정들이 느껴졌다.
나 때문에 우리 가족이 힘들어하는구나.
내가 정말 이상한가보다.
내가 그렇게 예민하고, 부정적이어서 가족들을 못살게 구는구나.
그렇다면 내가 없어지면 가족들이 편해지겠지.
라는 마음과
내가 없어져야 알까.
라는 마음이 공존했다.
연인에게 마지막 메시지를 보냈다.
가족에게는 보낼 가치도 없다고 생각해서 보내지 않았다.
침실에서 나와 주방으로 향했다. 그 와중에 현관에 붙은 묵주가 보였다.
하부장에 있는 칼을 꺼내 손목 위에 가져다 댔다.
이러면 나도 똑같이 이기적인 사람이 되는 거야.
이거야말로 가족들을 힘들게 하는거야.
아무리 그래도 이런식으로 알아주길 바라고 응징하는 건 비겁해.
남자친구는 무슨 죄야.
........ 이거 엄청 아프겠다.
칼을 내려 놓고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겨우 진정하고, 부랴부랴 연인이 걱정되어 침실로 달려가 핸드폰을 찾았다.
그 후, 다시 용기내어 아빠랑 풀어보려고 했다.
하지만 아빠는 김장한 거 넣어놔야 된다며 나와 이야기를 하는둥 마는둥 부산스럽게 통화했다.
내가 그거에 대해 뭐라하니, 하면서 듣고 있다고 말씀하시는데 순간 욱했다.
아니, 그동안 내 눈을 잘 보지 않고 대화하고 (본인 이야기 할 때는 제외)
핸드폰을 하면서 대화하고, 밥 먹을 때도 언제 어디서든 핸드폰만 들여다보고
잔소리하면 듣는거라면서 귀에 가져다 대고 그러면서 대화하지 않는 아빠의 모습.
식당에 가도 옆에 앉은 사람들에게 관심 갖고, 그 사람들의 대화에 집중하고
나와 엄마하고 있을 땐 대화하지 않는 모습.
동생하고 있을 때는 대화에 집중하는 모습.
남들에게는 말도 잘 걸고 눈 보며 대화를 잘 하던 모습.
그동안의 서운했던 모습들이 떠올랐다.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아빠는 여전하구나. 아빠는 이런 중요한 순간에도 이러시는구나.
다 포기하고 싶었다. 1%의 빛? 부질없다.
아빠한테 "나 알아서 잘 살테니까, 엄마랑 동생이랑 아빠랑 셋이서 잘 맞는데 잘 사세요." 라고 말했다.
화가 난 건지, 충격을 받으신건지 따로 연락은 없었다.
이제 가족들에 대한 인내, 애정, 사랑, 이해 다 사라졌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아빠가 걱정됐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