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마어마한 생기가 필요할 땐

by Eloquence
산책을 좋아하는 이유는 생기를 머금을 수 있어서다.
그때 동네산책으로는 부족했던 걸 보면,
어마어마한 생기가 필요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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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이 하고 싶었다. 동네산책 말고 공원산책을 하고 싶었다. 오랜만에.

찾아보니 이 동네에는 큰 공원은 없지만, 중랑천이 있었다. 지도를 찾아본 후 연인찬스를 썼다.

나는 길치이지만, 그는 길눈이 매우 밝다. 어느 정도냐면 서울에 오랫동안 살고 있는 내가,

서울에 살지도 않고 살아본 적도 없는 그에게 전화를 걸어 서울 길을 물어보기도 했다.

다정한 그는 황당해하면서도 친절히 알려주었다.

다행히 길 찾기 어플의 기능이 날이 갈수록 좋아지면서 나의 황당한 행동은 자연스레 줄어들었다.

가끔 길 찾기 어플을 사용해도 어려운 길이거나 혼자 가기 괜찮은 길인지 가늠이 안 될 땐 연인찬스를 쓴다.

이번에는 전자와 후자 모두 해당하여 연인찬스를 쓴 것이다.

연인찬스로 그와 함께 가보니 중랑천으로 가는 길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여자 혼자 가기 괜찮은 길은 아니었다. 결국 동네산책이나 해야겠다며 포기했다.

그럼에도 그날 본 중랑천의 풍경이 자꾸만 눈에 아른거렸다.


다른 방법이 있지 않을까. 길 찾기 어플로 다시 길을 찾아봤다.

두 개의 어플을 동원해 찾아본 결과, 좀 돌아가더라도 큰길 위주로 갈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무작정 집을 나섰다. 그와 함께 답사한 길이 아니라서 괜찮을지 걱정도 되었지만, 무시했다.

공원산책까진 아니라도 하천 산책이라도 하고 싶은 욕구가 그 정도로 강했다.

더구나 벌레와 폭염이 기승을 부리는 여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가지도 못할 테니 마음이 조급했다.

큰길 위주의 방법이라 그런지, 여자 혼자 가기에 괜찮은 길이었다.

더구나 해가 지기 전이라서 밝은 데다 퇴근 시간대라 사람들도 많았다.


걱정은 뒤로 한 채 나서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렜다.

그 감정은 오래가지 못했다.


신호등도 없는데 건너야 하는 고가도로 밑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쌩쌩 달리는 차를 보며 두려움이 밀려왔다. 주위에 많던 사람들은 어느새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돌아갈까.'


원래 겁이 많은 성격이기도 하지만, 불안도가 높은 시기여서 다른 사람에겐 별 거 아닌 요소들이 내겐 크게 느껴졌다. 그때 20대 초중반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길치인데도 스마트폰으로 찾거나,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물어가며 낯선 여행지를 잘도 다녔다. 그때처럼 '여기까지 온 거, 그냥 가보자'라는 마음가짐으로 지금이라도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애써 눌렀다. 주저했던 길을 지나자 그와 함께 봤던 중랑천의 풍경이 보였다.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한 거다. (누군가는 별 것도 아닌 거 가지고 라며 비웃겠지.)

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와 함께 왔을 때 본 것처럼 여전히 여유가 넘치고 편안했다. 달라진 점도 있었다.

그땐 밤이었지만 혼자 갔을 땐 초저녁이라 밝은 풍경을 볼 수 있었다. 사람도 그때보다 더 많았다.

날씨가 흐려서 하늘은 맑지 않았지만, 그것대로 좋았다.

흐린 하늘 아래 여유가 넘치는 광경은 언발란스하면서도 조화로웠다. 신비롭게 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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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게 뻗은 물줄기와 산책로, 알록달록하고 귀여운 조형물, 벤치와 테이블이 가지런히 놓인 피크닉 존, 축구장, 지나가는 지하철, 여유로워 보이는 사람들....... 모두 드라마 같았다. 전체적인 풍경과 분위기가 평소 좋아하는 한강공원과 비슷했다.


'지금이라도 돌아갈까'라는 생각을 언제 했냐는 듯, '오길 잘했다'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뿌듯함 게이지가 쭈---욱 올라갔다.


산책로를 걸으며 하나, 하나 눈에 담았다. 그날따라 유독 시선이 머문 곳은 사람이었다.

피크닉존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수다 떠는 사람,

다리에 모래주머니를 차고 열심히 운동하는 사람,

자전거 타는 사람,

축구하는 사람,

달리기 하는 중년 그리고 외국인,

자식 이야기를 하며 걷는 중년부부,

손 잡고 산책하는 연인

벤치에 나란히 앉아 대화하는 연인..........

각자의 방식으로 중랑천을 온전히 향유하고 있었다.

현재 그리고 옆에 있는 사람, 중랑천의 분위기에 집중하며 즐길 줄 아는 사람들과 중랑천의 분위기는 찰떡처럼 어우러졌다.


갑자기 울컥했다.

그동안 주저하느라 이제야 온 것에 대한 후회, 미운 정 고운 정 다 든 서울생활이 얼마 안 남았다는 아쉬움,

불안에 잠식되어 빛나는 젊은 시절 그리고 그 시절에 서울에서의 일상을 아쉽게 흘려보냈다는 것에 대한 후회가 밀려왔다.


또, 였다.

20대의 내가 그 자체로 반짝임을 모르고 누리지 못한 채 빛나는 시절을 허무하게 보낸 걸 30대가 되고 알았다. 30대도 늦지 않았고, 여전히 빛나는 젊은 시절이니 온전히 즐기자고 다짐했었는데 또 같은 실수를 했다. 후회, 아쉬움, 속상함, 슬픔의 감정이 뒤엉켜 목이 메었다.


금방이라도 울듯한 얼굴을 한 채 발은 바삐 움직였다. 이상한 눈초리를 받고 싶지 않아 울음의 머리를 애써 눌렀다. 다행히 떨어질 것 같은 눈물은 몸 구석구석에 스며들었다.


30분쯤 걸었을 때, 거위를 만났다. 중랑천에 거위가 있다는 건 인터넷 서칭과 곳곳에 걸린 현수막을 통해 알고는 있었지만, 첫 방문부터 거위를 만날 줄은 몰랐다. 손을 뻗으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거위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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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조형물 아니야?'


마음의 소리가 거위에게 들렸던 걸까. 보란 듯이 거위가 갸우뚱댔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거위를 본 게 처음이라 하마터면 소리 지를 뻔했다.


태연한 표정과 늠름한 자태로 길 중간에 떡하니 앉아있었다.

똑같은 자세로 거위 두 마리가 나란히 앉아있었다. 사람이 지나다녀도 거위 두 마리는 그 자리 그대로 있었다. 신기함에 스마트폰을 들어 카메라를 켰다. 어떤 아주머니도 내 옆에 서서 거위를 사진 찍었다.

그럼에도 개의치 않는 듯한 거위 두 마리. 쿨함마저 느껴지는 저 자태.

'기록으로 남기게 아까처럼 움직여 봐'라는 내 바람에 부응하듯 머리를 까닥거려 주는 센스.

완전 셀럽이네!

셀럽의 면모를 갖춘 거위들과 작별인사를 하고 발길을 돌렸다.


중랑천 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내 얼굴에는 미소가 피어올랐다.

눈물로 촉촉했던 눈빛은 생기를 머금어 촉촉해졌다.

평소 산책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무작정 나선 산책로에서 본 풍경과 온몸으로 느낀 에너지 덕에 감동을 느꼈다.


산책을 좋아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 있지만, 그중 하나는 생기를 머금을 수 있다는 거다.

특히 공원이나 하천 산책로에서는 여유로운 분위기의 풍경을 볼 수 있으며,

그 분위기를 즐기고 있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온전히 즐기는 만큼 사람들은 장소가 주는 여유로운 에너지를 흡수하여 자기 것으로 만든다.

따라서 장소뿐만 아니라 그곳에 속한 사람에게서도 여유가 느껴진다.

그런 곳에서 산책을 하면, 나도 그 속에 속한다는 묘한 기쁨을 느낀다.


한강공원을 좋아하는 이유도 이것 때문이겠지.


꼭 그런 곳이 아니어도 어디든, 산책을 하는 것만으로도 생기를 얻을 수 있다.

괜스레 설레서 기분 좋은 두근거림을 느끼기도 한다.

익숙한 주변 풍경이 산책할 때만큼은 새롭게 느껴진다.

그래서 왜 산책이 우울증 완화, 심장 건강에 좋다고 하는지 알 듯하다.


일상은 여전히 똑같고, 문제는 그대로여도 산책중과 산책 후 그 순간만큼은 생기로 가득하다.

내가 그때 동네산책이 아닌, 공원이나 하천 산책에 집착했던 건 아마 어마어마한 생기가 필요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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