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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로 듣는 음악 Apr 22. 2020

[제랄드 무어] 피아노 반주의 예술

EMI 제랄드 무어 고별연주회 실황 음반

제랄드 무어 은퇴 고별연주회 실황과 헌정음반. Warner(구 EMI)





‘제 소리가 너무 컸나요?(Am I Too Loud?)’

 피아니스트의 자서전 제목으로는 참 이상한 글귀다.

그러나 제랄드 무어는 평범한 피아니스트가 아닌, 평생 한걸음 뒤에서 예술 가곡의 전문 반주자로서 고매한 외길을 걸어온 존재다. 그의 삶과 자부심을 담은 이 제목은 깊은 통찰과 귀감의 고백이다. 빛나지 않아 더욱 아름다운 반주자, 제랄드 무어의 마지막 고별 콘서트 실황앨범을 꺼내 본다.



독일 예술가곡의 거장,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는 특히 제럴드 무어와 길고도 긴밀한 파트너십을 가졌다.



오늘날에는 리히터나 아르헤리치, 정명훈 같은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들이 가곡 연주회의 반주자로 참여하는 경우가 매우 흔하다. 피아노 반주가 가곡의 예술적 완성도에 미치는 중요성을 누구나 인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과 수십 년 전만 해도 가곡에서 피아노 반주란 이름 없는 도우미에 지나지 않았다. 포스터나 레코드커버에서도 'with piano accompaniment'정도로 표기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영국 워트포드 출신의 피아니스트 제랄드 무어는 그런 현실을 잘 알면서도 전문 반주자의 인생을 살기로 결심한다. 자신의 음악 스승이 세상을 뜬 뒤 보답하는 차원에서 첼리스트인 그 아들의 반주를 맡게 된 것이 계기였다. 본래 성직자가 꿈이었던만큼 무어는 특유의 신실함으로 피아노 반주에 헌신하였고, 그 진심을 느낀 많은 독주자와 가수들이 점차 무어를 동반자로 찾게 된다.


가수들은 무어의 피아노 반주에 맞춰 노래하며 그동안 잊고 있었던 나머지 반쪽의 예술성을 발견했다. 심지어 특별히 섬세하고 깐깐한 몇몇 성악가들은 제랄드 무어의 피아노 반주가 아니면 가곡을 부르지 않기까지 했다. 역으로 제랄드 무어의 반주라면 그건 보장된 음악성을 약속하는 증표가 되었다.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 한스 호터, 엘리자베스 슈바르츠코프, 자넷 베이커와 같이 별처럼 빛나는 가수들이 남긴 역사적인 가곡 명반에는 반드시 제랄드 무어가 반주를 맡고 있다.





제랄드 무어의 피아노 반주는 편안하고 자연스러우며 둥글둥글하여 어느 한 성부도 가수를 압도하거나 상쇄하는 점이 없다. 작품에 대한 끊임없는 연구와 해석에서 비롯된 깊은 터치, 고동빛 진득한 사운드는 노래의 애수를 더욱 서글프게 한다. 목소리만으로는 모두 표현하기 어려운 작품의 내적인 면까지 이끌어내 예술 가곡의 진면목을 적극적으로 돋구어 냈다. 마치 고래를 위해 드넓은 대양을 마련하듯, 무어는 자신의 피아노 반주로 작품 내면의 깊고 넓은 예술의 바다를 이끌어내 성악가로 하여금 마음껏 헤엄칠 수 있도록 만든 셈이다. 외양 또한 넉넉한 영국신사다운 풍모가 가득하니 제랄드 무어와 무대를 같이 한 성악가들은 참으로 편안하고 든든하였을 것이다.







이 고별 음반은 제랄드 무어의 은퇴를 기념하기 위해 세계적인 명가수가 세 명이나 달려와 축하하는 무대를 담은 실황 음반이다.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 빅토리아 데 로스앙헬레스, 엘리자베스 슈바르츠코프. 웬만한 오페라 하우스에서도 한자리에 모으기 힘든 성악가들이지만 자신을 평생 든든하게 뒷받침해준 이 반주자가, 아니 예술의 동반자가 마지막 콘서트를 한다는 말에 기꺼이 달려왔으리라.


마지막 고별 무대지만 이 연주에는 한 치의 섭섭함이나 아쉬움이 없다. 진심으로 의지하고 친애하는 음악 친구들의 축하 아래 시종일관 풍성하고 넉넉하다. 노신사의 마지막 순간답게 유머와 위트가 가득하며 당당함과 자신감을 잃지 않는다. 모차르트와 슈베르트의 가곡은 마지막 연주답게 한층 더 자유로운 터치를 가감하여 외려 더한 활력을 돋구고 있으며, 찰떡 같은 궁합의 가수들은 완벽한 호흡으로 노래를 이어 간다. 두 여가수가 부르는 ‘고양이 듀엣’은 이 음반의 백미다. 자존심 높은 두 가수가 동료의 은퇴 무대를 기념하는 짓궂은 장난의 절정이랄까, 고양이의 목소리를 빌려 교태와 시샘을 한껏 내뿜는 유머러스한 듀엣에 관객들은 폭소를 터뜨리는데 제랄드 무어는 이 순간을 진심으로 즐기는 듯 더욱 야릇한 반주로 화답한다.


진정 감동적인 것은 이 실황의 마지막 곡이 제랄드 무어의 유일한 독주곡이라는 사실이다.

억센 영국식 억양으로 인사를 건네며 슈베르트의 ‘음악에 부쳐(An die Musik)’를 담담하게 연주한다. ‘그대 아름다운 예술이여, 나는 그대에게 감사를 드립니다’라는 가사가 있는 원곡이지만, 제랄드 무어는 평생 처음인 자신만의 피아노 독주로 선보인다. 홀에는 피아노 소리뿐이지만 어느 명가수의 노래 못지 않은 선율과 울림으로 다가온다. 마지막까지 넘치는 겸손함으로 자신의 예술을 완성한 이 피아니스트의 고별 무대는 이처럼 진솔하다.


2020.04.22.







P.S. 제럴드 무어는 고별 인사로 어떤 말을 했을까?


제럴드 무어 고별연주회의 마지막 인사. 음반에는 이 인삿말까지 녹음되어 있다.


모두 자리에 좀 앉아 주시죠, 신사 숙녀 여러분. 오늘 저는 반주자로서 겸손한 태도를 갖추지 못했습니다.(웃음). 사실 저는 지금까지 항상, ‘내 반주 소리가 너무 크지 않았나?’ 하는 질문을 계속 해왔었습니다(웃음). 하지만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이렇게 위대한 세 명의 성악가들이, 같은 프로그램, 같은 무대, 같은 시간에, 동시에 공연을 한다는 것은 대단히 자랑스러운 일입니다(박수). 사실 이 세 분이 이 시간에 같은 대륙에 있다는 것 자체가 경이로운 일입니다(웃음). 오늘 저녁, 이분들이 저에 대한 애정으로 이곳에서 공연한다는 것을 알기에, 저는 더욱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박수). 사실 오늘 무대에 서지는 않았지만, 무대 뒤에는 네 번째 인물이 있습니다. 이분은 지난 40년간 저와 같이 일해온 사람입니다. 오늘 이 공연을 기획했으며, 이 공연의 프로그램도 그가 준비했습니다. 그분은 바로 ‘월터 레그’입니다(박수). 그리고 이제 저는 여러분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이 무대 위에서 제가 지난 수십 년간 경험한 여러분들의 호의가, 절정에 이른 것이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한 여러분이 항상 저에게 보내주신 관대함에도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하지만 여러분에게 한 가지 더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오늘 아마 수백 분들이 ‘엘리자베트’를 만나기 위해 무대 뒤로 오려 할 것이고, 또 수백 분들이 ‘빅토리아’를 만나러 오려 할 것입니다. 그리고 ‘디트리히’를 만나보고 싶어 오시는 분들도 수백 명… 그리고 아마 몇 분쯤은(웃음) 저의 뒤통수라도 보려고 무대 뒤로 오려 하시겠죠. 하지만 오늘만큼은 아티스트의 대기실로 찾아오지 말 것을 부탁드립니다. 만일 오신다면, 오늘 저녁, 우리에게 아름다운 목소리로 큰 기쁨을 선사한 훌륭한 성악가들이, 밤늦게까지 여기에 남아 있어야 하는 것은 물론, 집으로 돌아가는 마지막 버스를 놓치게 될 것입니다(웃음). 그렇기에 오늘 ‘엘리자베트 슈바르츠코프’, ‘빅토리아 데 로스 앙헬레스’,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 ‘월터 레그’. 이 네 분을 대신하여, 제가 이렇듯 훌륭한 저녁을 함께해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이제 여러분께 이별 인사를 드리며, 감사한 마음을 이렇게 표현하고자 합니다(피아노 앞으로 걸어가는 구둣발 소리…. 그리고 들려오는 음악 소리) . 


-이상민 <혼자서는 연주회를 열 수 없던 피아니스트> 칼럼 중 인용.



P.S 2. 제럴드 무어의 마지막 연주, 그리고 유일한 독주인 Schubert <An die Musik> '음악에 부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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