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일 글쓰기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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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는 젠틀한 분이다. 말끔한 정장에 매너있는 말투에 커다란 차로 고시원에 있던 짐까지 잘 실어 주셨다. 그게 이곳에서 시작한 하숙생활의 첫 날이다. 긴장해서 몸둘 바를 몰랐던 식사 시간이 지나고, 겨우 내 방에 들어와 앉았다. 별다를 거 없이 밋밋한 아이보리색 헤드가 있는 침대. 그 곳에서는 정은이 보내는 메시지에 굳이 답장하지 않아도 되었다. 집에서 유일하게 전화가 터지지 않는 곳. 원래 창고로 썼어서 신호가 안들어오는 지도 몰랐다고 했다. 폰을 열면 막대기가 한 개 보이는데, 그 마저도 온전히 신호를 잡고 있지 않았다.
어쩌면 더 좋은 것 같다. 요즘 세상에 안 통하는 데가 어딨냐마는, 적당한 고요함이 좋았다. 그렇게 있다가 어느샌가 잠이 들었다.
꿈인지 현실인지 헷갈릴 정도로 몽롱했다. 긴장하고 피곤해서 그러려니 하다가 눈 앞에 나타난 그 사람의 얼굴을 보고 놀랐다. 정은이와 그토록 열광했던 엄청난 선배가 나를 내려다 보고 있다. 적당한 거리에서 보는 표정이 떨렸다.
-왜 이렇게 불편하게 자고 있어?
침대에 대충 걸터앉아 발은 바닥에 닿았지만, 무릎은 침대 밖이고 허리 위쪽만 천장을 향해있었다. 몇 시간을 잤는지 약간 뻐근하기 까지 했다.
-피곤했나보네.
선배가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자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긴장되고 설레는데 그걸 들키고 싶지 않은 양가적인 마음. 하필 불을 꺼둬서 더, 밖의 불빛때문에 잔상이 보였다.
-반가워. 같은 학교네. 1학년이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말하기엔 목소리가 이상하게 나올 것 같아서. 잠겼거나 쉰소리가 나거나, 별로 일것 같아서 침을 한 번 삼켰다.
-학교 갈 때 같이 가면 되겠네. 찬영이까지 셋이서.
정은과 나누었던 수많은 수다 중 8할을 치자했던 우리의 아이돌이 눈 앞에서 같이 학교를 가자고 했다. 내일 아침이면 함께 길을 걷고 맑은 햇살을 받으며 갈 것이다. 교복을 예쁘게 잘 걸어놓고 자야지. 가장 예쁜 양말을 신어야지. 신발에 때낀 건 없는지 봐야겠다.
문을 닫고 나간 후에, 문 너머에 이상형이 있다는 것에 새삼 긴장되었다. 심장이 빨리 뛰는 건 기분탓일까. 이 걸 당장 정은이에게 알려주지 못한다는 게 아쉬웠다. 학교 가자마자 풀어낼 이야기가 수백가지는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