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일상기록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엘사 Apr 16. 2019

27 사春기

100일 글쓰기 

(소설) 


3



초인종을 눌렀다. 한 번 눌렀을 때의 정적, 누구도 나오지 않았다. 막상 가보는 게 이토록 멀지 몰랐지만 이제 와서 후퇴하는 것도 별로인 것 같아 빳빳이 서 있었다. 혹시나 해서 다시 눌러보았다. 약간 부시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끼익, 문이 기운차게 소리를 낸다. 나보다 머리 하나는 작은 소년이 문을 열고 나왔다. 하얗고 말간 얼굴에 동그란 눈동자를 가진 소년. 체구도 작고, 어깨도 좁은 어린 아이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누구세요? 




생긴 건 한참 꼬마인데 꽤나 목소리 톤이 낮다. 잠이 덜 깬 눈으로 나의 모습을 위아래로 훑었다. 눈이 안 좋은 지 잔뜩 찌푸린 채로 투정을 부린다. 혼자 있는 것 같았다. 마치 낯선 사람을 잔뜩 경계하는 길고양이처럼. 




-아, 안녕하세요. 아버지 친구분 댁이라고 해서. 찾아왔어요. 혹시 부모님이 말씀해주시지 않았나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탁, 문이 닫혔다. 이해는 한다. 요새 워낙 세상이 험하고 불안하고 그러니까 저렇게 대할 수는 있지만, 내가 그렇게 위협적으로 보일만한 인상도 아닌데. 굳이 저렇게 냉정하게 닫아야하나. 교복입고 있고 빤히 어느학교 학생인거 아는 데도 그런 거면 저 꼬맹이가 유독 차가운 거 맞다. 


-잠깐 있어봐봐요. 

퉁명스럽지만 그래도 피드백이 있다. 한 걸음도 채 내딛지 못했지만, 그래도 뭐. 조금 추운 거 말고는 괜찮다. 체구가 작은 소년은 문을 잠그고 한참이 지난 후에야 다시 돌아왔다. 생각보다 공백이 길게 느껴졌다. 물리적인 시간은 짧았자미나 그 동안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멀뚱멀뚱 기다리기만 했기 때문에. 진한 갈색의 나무 문은 그 위에 조화로 잘 꾸며져 있어 여기가 얼마나 세심한 집인 지 드러냈다. 건물 외벽이 모던하게 구성되어있지만 어딘가 따뜻한 느낌을 유지해준다. 이런 집에서 하숙이라니. 꽤 잘 만들어진 현대건축물에서 산다는 건 좋은 일이다. 설레는 포인트가 하나 늘었다.

-아빠, 뭐야. 집에 이상한 거 왔어.

이 새끼가, 라는 말이 턱 아래까지 올라왔지만 참았다. 아주 밝은 회색으로 만들어진 교복치마를 꽉 쥐었다. 빳빳한 재질이라 괜찮을 것 같았다. 조금 구겨져도 앉아서 그랬던 거니까, 라고 핑계댈 수 있을 것 같았다. 나 역시도 한 집에 사내아이가 같이 있는 집에 하숙해도 괜찮은 것인지 부모님이 허락한 거 자체가 이상하긴 하지만 납득한 건데. 꼬맹이가 이어폰을 낀 채로, 눈을 내리깔면서 문을 열어줬다. 아마도 통화로 간단한 신상정보에 대해서 파악을 했겠지. 다만 나와 말을 섞기보다는 문만 슬쩍 열어주고 뒤쪽으로 빠졌다. 

-2층에 있는 방? 싫어. 형이 쓰는 데인데. 알았어. 거기 있으라고 할게. 

전화를 퉁명스럽게 끊더니 다시 내가 있는 쪽 가까이로 다가왔다. 보기보다 그렇게 작지는 않았다. 딱 내 어깨에 이마가 걸릴 정도. 자기 체구보다 큰 회색 까만 티를 입은 소년은 냉큼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따라와.

공중에 떠 있는 듯한 계단을 걸어올라가다 보면, 2층 공간이 보였다. 잘 쓰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방과, 누군가의 방. 

-여기가 네가 쓸 방이야. 이쪽은 형 방이니까, 가까이 가지 말고. 

딱 여기까지 말하고 소년은 먼저 내려가버렸다. 내게 주어진 방이 현저히 적었으나, 채광도 나쁘지 않고 꽤 괜찮았다. 다만, 걸리는 것은 옆방이 소년의 형이 쓰는 방이면, 불편한 게 한 두가지가 아닐것 같은데. 

-저기, 그럼 화장실은?

-거기 보이는 꽃달린 문인데. 그건 형이 쓰는 거니까 아래 내려와서 써. 

-너네 형도 있어? 

갑자기 소년의 안색이 바뀐다. 안 그래도 하얗던 아이가 표정을 싸악 바꾸니 더욱 무섭다. 묘하게 공포영화의 메타포가 있는 애다. 

-어디서 너래? 초면에. 

까칠한 꼬맹이. 겁에 질리면 부러 센 척 하여 적을 위협하는 소동물같다. 

-쪼끄만 게 반말부터 했잖아. 

많은 경우 이 또래 남자애들이 여자애들보다 작기도 한데, 얘는 확신이 들었다. 나보다 어리다. 

-윤선유. 숭문고 1학년. 아버지가 그러던데, 잘 데 없어서 우리집 오는 거라고 했어. 빌붙어 사는 사람한테 왜 내가 존대를 해야 돼? 

소득수준으로 계층을 가르고 무시하는 애들이 있다고 했다. 그런 식의 교육방식이 이런 개차반을 만들었나 싶을 정도로 애가 버릇이 없다. 상대방은 정체를 밝히기도 전에 나의 치부까지 파악한 것 같아 서럽다. 그렇다고 해서 집 잃고 가족 잃고 그런 기구한 신세는 아닌데. 변명을 하나하나 나열하자니 괜히 더 비참해질 것 같아서 말을 아꼈다. 

-곧 오신댔으니까. 기다리든지. 

소년은 1층에 있고 나는 그저 2층에서 가만히 있기로 했다. 작은 싱글 침대에 새로 덮어둔 이불 위에 털썩 앉았다. 더럽게 처량하네. 공간 안에 덩그러니 혼자 남겨진 기분. 실제로 그러하니 뭐 다른 감상이 끼어들 틈도 없다. 차라리 해가 져가는 지금 이 고즈넉함이 더 바람직하다. 햇살마저 좋았으면 오히려 더 서러울 뻔 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26 발레공연 이야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