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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늦은 배송- 우리 파스타 하나 더 시킬까?

배송일이 변경되었습니다

by 엘슈가

"그럴 시간이 없어요. 나중에요. 지금은 해야 할 게 있다고요"

한 두 번 더 청하다가 슬며시 문을 닫고 나온다. 나만 들리는 한숨이 쉬어졌다.


아니 자신이 목표한 대학을 눈으로 보는 일, 캠퍼스를 걸어보는 일, 그 앞에서 스파게티를 먹는 일 말고 다급한 게 뭐람. 너는 아직 고3도 아니고 고2도 아닌 고1이란 말이다.


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입을 다문다. 녀석도 알고 있는 내용이기에.


아이가 청소년이 되면, 아니 그 보다 정확하게는 입시를 준비하는 나이가 되면 나는 꼭 함께 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


"캠퍼스 투어"

요즘은 예전과 달리 대학교 자체적으로 준비된 프로그램도 많다는 걸 정보를 찾아보다가 알았다. 어린이 탐방이라는 이름으로 더 어린 연령을 대상으로 한 프로그램도 보였다.


나는 투박하더라도 아이랑 소소하게 나들이 삼아 다녀오고 싶었다. 고2, 고3이 되면 지금보다 바빠질 게 분명하기에 고1 때 다녀오자고 내 딴에는 여유 있게 일정을 잡았는데 그때마다 돌아온 답은 그럴 시간이 없다는 것. 수긍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서운했다. 주말의 서너 시간을 내기가 그렇게 어렵나? 목표를 시각화하는 중요한 시간인데. 혼자 중얼거렸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얘는 누굴 닮아서 이렇게 고집이 센 걸까 생각에 이르렀을 때였다. 눈앞에 한 장면이 차르르 펼쳐진 건.



"친척 분들 오시면 저 어디서 공부해요? 낼모레가 시험인데..."

"그래도 인사드리고 저녁도 같이 먹어야지"

"저 인사만 드리고 밥은 안 먹을래요. 다락방에서 시험 공부 해야 해요"


어디 드라마에 나오는 얘기가 아니었다. 고등학생도 아닌 중학교 때 내 모습이었다. 유년 시절 나에게 철은 일찍 배송되었나 보다. 또래보다 조숙했고, 앞날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이대로 살아도 되는 건지 답을 찾고 싶었다. 주변에 가르쳐 줄 사람이 없어 책을 끼고 살았다. 그래도 알 수 없는 게 인생이었다. 공부라도 하자 싶었다. 공부도 참 요란하게 한 모양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렇게 까지 할 일인가? 싶은데 그때의 나는 그랬다. 하나에 집중하면 다른 건 챙기지 못했다. 그런 면을 아이가 똑 닮은 거다.


그 장면을 떠올리며 마음을 접을 수 있었다. 엄마도 시골에서 서울로 대학 와서 여러 대학 학생들과 연합 활동도 하며 다양한 교정을 넘나들며 대학 생활을 했어. 여긴 파전이 맛있고, 여긴 도서관 시설이 최고야. 여긴 캠퍼스가 예쁘기로 유명한 거 너도 알지? 버스 427번을 타고 한숨 자면 한 번에 관악으로 넘어갔어. 다시 그 버스 타고 신촌으로 돌아왔어. 왕십리는 어떻고? 연합 동아리방이 있어서 토요일마다 갔잖아. 지금 성수동이랑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정감 가는 골목이었다고. 파전에 막걸리를 매주 먹어댔어. 조잘조잘 말해주고 싶었던 건 캠퍼스 투어를 가장한 엄마의 대학 생활 이야기였을까?


우리는 그 시간을 배송받지 못했다. 아이가 고2 되던 해에도 고3이 되던 해에도 청했지만 아이는 완강했다. 어느 순간 나도 마음을 비웠다. 안타깝게도 캠퍼스 투어는 나 혼자 갈 수 없는 것이기에 우리의 캠퍼스 투어는 불발이라 생각했다.


"엄마, 여기 분위기 너무 좋아요. 파스타도 너무 맛있어요"

"그래? 린이가 좋아해 주니 엄마도 좋네"

"엄마... 고마워요. 이렇게 시험 따라와 주시고 맛있는 거 사주 셔서요"

"... 그래"


이 대학 캠퍼스도 상전벽해라는 말이 어울렸다. 정문 앞에 대형 백화점과 영화관이 웅장하게 들어서 있었다. 그 뒤에는 주상복합 아파트가 즐비했다. 언제 이렇게 바뀐 걸까. 아이의 입시는 수능 후에도 주말마다 대학별 시험이 예정되어 있었고, 나는 그 시험에 동행하기로 했다. 그리고 발칙한 계획을 짰다. 시험이 끝난 아이를 웃겨 주리라. 그 대학가에서 가장 맛있는 점심을 사줘야지. 그리고 아이의 에너지가 허락된다면 스티커 사진도 찍자고 해야겠다!


그것이 입시를 앞두고 지난 3년간 다른 건 다 홀드 한 채 공부에만 매진해온 아이를 위해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해서였다. 그런데 아이가 스파게티를 푸짐하게 떠서 포크에 돌돌 말아 호로록호로록 먹으며 눈을 맞추며 정말 맛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이 장면이 행복이 아니라면 어떤 게 행복일까.


아, 늦은 배송이구나. 그때 나는 생각했다. 나의 로망인 린이와 캠퍼스 투어는 영원히 불발된 게 아니었다. 조금 늦게 배송된 것일 뿐이었다. 배송일이 변경되어 조금 늦게 받으면 어떠랴. 지금 이 아이의 눈이, 입이, 손이 말하고 있지 않은가. 그걸로 충분했다.


"스파게티 하나 더 시킬까? 엄만 더 먹을 수 있는데!"

"엄마, 이걸로 충분해요. 우린 이미 3개나 먹었다고요!“


그때 나는 스파게티를 하나 더 주문해서라도 행복이 배송된 그 시간을 늘리고 싶은 주책맞은 엄마일 뿐이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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