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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꿈이 뭐예요?’라고 물어보면 나는 대답 대신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를 짓곤 했다. 힘주어 말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글을 쓰는 사람으로 남고 싶었다. 그 마음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거기에 어머니가 있다. 동네 양장점에 아주머니들과 모여서 담소를 나누고 있는 어머니가.
어머니는 어디를 가든 집에 혼자 있을 나를 항상 데리고 다니셨다. 그래서인지 나는 나이에 비해 이런저런 주워들은 이야기가 많은 아이였고 친구들은 내 이야기는 뭐든 실감 나고 웃기다고 했다. 어머니는 내가 글짓기로 상을 받아올 때마다 과한 칭찬으로 기쁜 마음을 드러내셨다. 언니 오빠들은 그 점을 못마땅해했지만, 우리 중 작가가 나온다면 막내 너일 거라고, 그건 당연한 일이라고 자기들끼리 말하곤 했다.
그렇게 나의 꿈은 자연스레 <작가>가 되었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학생 때는 저녁까지 아르바이트가 이어졌고, 졸업 후에는 바로 취업해야 했다. 졸업 전 스카우트된 광고대행사부터 결혼 후 IT 회사 마케터, 퇴사 후 쇼핑몰 대표, 강사, 컨설턴트까지 지금껏 쉼 없이 일해왔다.
일하면서도 언젠가, 생계라는 현생의 숙제를 어느 정도 해놓은 시점이 오면 글 쓰는 일을 업으로 하는 사람이 되리라 마음먹었다. 이 목표를 말하고 다니지는 않았다. 카페를 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에 조용히 자신의 카페를 준비하는 사람은 ‘카페나 할까’라는 말을 하고 다니지 않는 것과 비슷한 마음일지도 모르겠다. 가볍게 여겨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조용히 품고 있는 마음 말이다.
마흔셋까지 큰 공백 없이 일할 수 있었던 건, 마흔을 넘기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시작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일이란 바로 직업인으로서 작가로 살아가는 것. 그런데 남편의 갑작스러운 퇴사와 부동산 개업으로 내 삶에 중개보조원 일이 불쑥 끼어들면서 그 일에서 확연히 멀어지는 것 같아 나는 한동안 마음이 착잡했다.
나는 발상을 뒤집기로 했다. 시도하기 어렵다고 시도를 안 할 것이 아니라, 시도하기 어려우므로 시도해 보면 어떨까로. 발상을 전환하니, 중개보조원 일과 작가의 일을 병행한다는 게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둘을 병행할 수 없을 것 같다는 그 한계는 내가 정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 생각에 본격적으로 맞불을 놓기로 했다.
일과의 중심에 집필 시간을 넣었다. 산책과 글쓰기를 한 세트로 구성했다. 여유 시간이 생기면 사람들과 만나는 대신 글을 썼다. 자극적인 것들로부터 떨어져 있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다 보면 선명해질 것 같았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쓰고 싶은 글은 무엇인지, 그것을 또렷이 느껴보고 싶었다. 작가로 흠뻑 살아보기에서 가장 먼저 시도한 일은 도파민에 절어있던 나를 외부 자극으로부터 정화하기였다.
남들은 모르는, 그 시간을 사수하려고 했던 건 채우기 위해서였다. 주중에는 컨설턴트와 중개보조원 일, 입시 중인 아이의 엄마와 남편의 업무 파트너로 바쁘게 보냈다면, 작가로서 나를 채울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야 나눌 영감이 생기니까. 내가 차오르지 않고는 결코 나눌 수 없다.
작가가 되어 몇 시간을 흠뻑 보내고 나면 일상이 더욱 소중하게 다가왔다. 나이 마흔셋은 성실한 시간을 보내야 이런 시간도 찾아온다는 것을 아는 나이였다. 작가가 되어 흠뻑 살아보기는 마흔셋에 찾은 소중한 여정이었다. 밖에서 찾은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 찾아서 좋았고 남이 좋다는 것을 무턱대고 따라한 게 아니라 내가 스스로 찾은 것이라서 더욱 좋았다.
다만 뇌에 여러 개의 방을 만드는 것이 필요했다. 중개보조원, 기업 컨설턴트, 아내, 엄마, 학부모, 그리고 작가와 라이팅 코치는 별개의 페르소나이기에 입어야 할 옷도 다 달랐다.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가끔 학부모의 방을 열어야 하는데 작가의 방을 잘못 열어 입시 상담하는 선생님이 어안이 벙벙하다는 듯 쳐다보는 경우가 있었다. 중개보조원 방을 열어야 하는데 작가의 방을 잘못 열어서 고객이 의아하다는 듯 한참을 쳐다본 적도 있었다. 각각의 방문을 여는데 서툴러도 나는 시도해 보기로 했다. 지금 시도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기에.
왜냐하면 나에게 작가라는 직업은 꿈의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마흔 넘어 작가를 직업으로 하고 싶다는 꿈은 나에게 무수히 많은 지난한 시간을 버틸 힘을 주었다. 그때 나는 중개보조원에만 머무르고 싶지 않았다. 글을 쓰는 사람으로 남기 어려울 수 있다는 생각이 나를 몸부림치게 했는지 모른다.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서 이 시간을 해석해 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어떤 생각이 머릿속을 쓰윽 스쳐간 건.
아, 배송일이 당겨졌구나. 나중에, 여유가 생기면 시작하려고 했던 로망이 갑작스러운 파도에 되려 일찍 시작할 수 있었구나. 직업인으로서 작가의 일을 일찍 시작할 수 있었던 건 배송일 변경이라고 밖에 달리 해석할 방법이 또 있을까? 그렇다면 나는 이 일을 감사한 마음으로 걸어가야겠구나. 밤하늘 오솔길 수놓듯이.
손님이 다 가고 난 조용한 시간. 타이핑을 치기 시작한다. 10분 정도 흘렀을까 싶었는데 한 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시작하기 전 따뜻하게 내려놓은 커피는 어느새 식어 있다. 돌이켜보면 지난 일 년간 내가 책상머리에 앉아서 가장 빈번하게 한 일은 글쓰기였다. 첨예한 이해관계가 오가는 부동산 사무실 책상에서 글이 잘 써지리라는 기대를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건 시도해 보기 전에는 모르는 일이었다. 이런 게 삶의 아이러니 아닐까.
부동산 책상머리에서 꽤 여러 편의 글을 쓰고 고치고를 반복했다. 퇴고를 거친 에세이 10여 편과 2편의 단편 소설 초고를 썼다. 이때 쓴 에세이로 종합 문예지 수필 분야에 등단했고 후속작을 쓰며 작가 업력을 키워갔다.
부동산 중개보조원 작가로 살아가기. 영업이 끝난 부동산 사무실에서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을 떠올리며 쓰고 또 썼다. 영감이 떠올랐을 때 노트가 안 보이면 사무실에 굴러다니는 일수 수첩을 잡아서라도 썼다. 그렇게 서울 모처의 10평이 안 되는 작은 부동산 사무실에서 작가의 업력을 키워갔다. 당겨진 배송에 감사하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