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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이른 배송- 건강검진 때문에 고속 결혼

배송일이 변경되었습니다

by 엘슈가

"나랑 헤어지더라도 꼭 받아. 건강검진. 여기 예약표야"


우리가 그때 왜 다투었는지는 생각나지 않는다. 자잘한 다툼은 아니었다. 헤어질 수도 있겠다 싶은 결정적 이유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의 이 한마디가 나를 불러 세웠다.


튼튼한 체질은 아니었던 나는 결정적인 순간에 건강이 발목을 잡을 때가 많았다. 아무거나 잘 먹었어도 잘 소화하고 잘 자고 하는 건 나랑 다른 차원 이야기였다. 입시 공부를 할 때도 늘 컨디션을 조심해야 했다. 직장이 힘들었던 건 잦은 야근과 회식으로 몸이 힘들어서지 멘탈은 아니었다.


이제 정말 끝이라고 연락하지 말자고 여자는 남자에게 매몰차게 통보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에게서 온 문자 하나가 판도를 바꿨다. 몸이 약한 여자 친구를 위해 건강검진 이벤트를 준비했는데, 그걸 받지 못한 채 헤어지는 게 못내 걸려서 보낸 문자 하나가. 자신이 나온 대학 병원 검진은 양한방 검진이 특징인데 졸업생은 일정 부분 할인도 된다니 얼마나 좋냐며 순박하게 웃어주던 그 순간이.


나는 이런 마음을 가지는 남자라면 헤어지면 안 되겠다 생각했던 것 같다. 이런 마음이라면 한번은 돌이켜 봐야겠다고도 생각했던 것 같다. 그렇다. 나는 당시 그를 좋아했던 것 같다.




스물일곱에 그를 만났고 그해 결혼했다. 지금 생각하면 이른 나이지만 그때도 그랬다. 주위에서 왜 그렇게 빨리 가냐는 반응도 많았으니까. 이유를 대자면 딱히 떠오르는 건 없다. 그냥, 이 사람일 것 같았다. 그의 부모님을 처음 뵀을 때도 그냥, 가족 같았다. 그렇게 우리는 부부가 되었다.


이런 우리의 결혼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결혼 후에 비로소 서로를 알아갔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그만큼 우리는 신혼 때 많이 다투기도 했으니까.


그 시간을 지나와서인지 지금은 누구보다 그가 편하다. 그도 내가 편한 것 같다. 인맥왕에 대문자 E인 그가 이제 웬만해서는 저녁 약속을 잡지 않는다. 집이 제일 좋다고 묻지도 않는 말을 자주 한다. 정말 편해서인지 집에만 오면 잠도 잘 잔다. (이건 좋은 게 아닌가?)


돌이켜보면 결혼은 어쩌면 나에게 이른 배송이었는지 모르겠다. 대학 졸업 전 스카우트 되어서 한 번도 쉬어본 적 없이 줄 야근이 보장된 직장에서 펜슬 스커트나 셋업 바지 정장을 입고 출근해 온 나에게, 한 번쯤 세상을 넓게 보라고, 그래도 된다고 알려준 계기. 실제로 나는 결혼 후 딱 1년을 쉬고 커리어를 턴해서 원하는 직종의 회사 이직에 성공했었다.


가끔 생각한다. 나에게 당도한 배송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그 건강검진을 받지 않고, 배송을 물렸더라면 그와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자유의 시간을 더 누리다 결혼할 걸이라는 생각을 나도 안 한 건 아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와 나를 반반 닮은 린이를 이번 생애에 만날 수는 없었을 것이라는 것.


그렇다면 이 이른 배송을 받기를 잘했다. 아니 어쩌면 이건 내가 조절할 수 없는 영역 아닐까. 그렇다면 앞으로도 그저 하루하루 수를 놓듯 살아가야겠다. 그게 당시 스물일곱 나에게 당도한 이른 배송의 의미를 풀어가는 유일한 방법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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