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천원으로 끓인 확실한 행복 뭉근한 배춧국

사십춘기 메뉴는 기분 따라

by 엘슈가

전직 일본 아사히 신문 기자이자《퇴사하겠습니다》로 널리 알려진 작가 이나가키 에미코는 퇴사 후 대폭 줄어든 월급으로 살림을 대폭 정리했다고 한다.


일반적인 미니멀 라이프 수준을 넘어서서 밥솥, 전자레인지에 이어 냉장고까지 없앴단다. 음식물 보관을 못하게 되자 그녀는 단 세 가지로 만든 단출한 식사를 했다고 한다. 그 세 가지란 쌀, 된장, 절임 채소.


그러자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고 한다. 매일 '뭐 먹지' 복잡한 고민은 없어지고 반복되는 평범한 식사에도 맛을 느끼는 미각의 촉수가 살아난 것이다.


그녀는 <퇴사하겠습니다>에서 퇴사 후 삶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물질로부터의 자유,
욕망으로부터의 자유,
그리고 월급으로부터의 자유를 지향한다.

상쾌한 인생을 꿈꾼다.



그의 책을 읽으며 내가 떠올린 건 물질, 욕망, 월급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었다. 그보다 먼저 떠올린 게 있었다. 나는 그 상황이 되면 '어떤 세 가지'를 남길까. 즉 매일 세 가지의 식재료만 먹을 수 있다면 무엇을 남길 것이냐의 질문에 대한 답은 의외로 심플했다.


밥, 배추, 된장

우선 밥은 있어야겠으니 자세한 설명은 패스. 그럼 배추와 된장은 왜? 이 질문을 통해서 알았다. 나는 된장 살살 풀어넣고 배추 뎅강뎅강 썰어 끓인 투박한 겨울의 배추 된장국을 정말 좋아한다는 것을.


신경 쓸 일이 생겨 소화가 안 될 때도, 중요한 일을 앞두고 긴장되어 입맛이 없을 때도 늘 떠오르는 건 따끈한 배추 된장국. 언제 먹어도 부드럽게 소화 잘 되고 아삭하니 씹는 맛이 있는데 한 없이 부드러운 그런 국. 말갛게 끓여도 진하게 끓여도 하나만 있으면 밥 한 그릇은 뚝딱인 국. 그런 배추 된장국은 나에게 전천후 소울 푸드다.


정작 배추의 장점은 따로 있다. 사계절 내내 구하기 까다로운 재료가 아니다. 살림하는 사람은 알 것이다. 채솟값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웬만한 채소는 고기보다 비쌀 때도 있다. 그런 사악한 물가 그래프 앞에서 배추는 착하디 착한 식재료다. 알배기 배추 한 포기로 세 식구 일주일은 거뜬히 먹을 국이 나오니까.


배보다 배꼽이 큰 부수적인 재료도 필요 없다. 배추와 물 된장만으로도 국이 끓여진다. 어떤 날은 좀 슴슴하게, 어떤 날은 좀 짭짤하게, 물만 조절하면 되니까 이런 쉬운 요리가 또 어디 있을까?


화려한 간을 좋아했던 남편은 이런 나의 입맛을 두고 신혼 초 종종 '또 배춧국이야?'라는 반응이었다. 그런 그도 십수 년간 나에게 입맛 가스라이팅을 당해서인지 연일 배춧국을 놓아도 별말 없이 아주 잘 먹는다.



배추 된장국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체온이 따듯해지고, 배가 적당히 불렀을 때의 평화로운 느낌이 든다. 이쯤 되면 배추 된장국은 나에게 기분이 좋을 때나 나쁠 때 언제든 만나도 좋을 소울메이트다.


이 겨울 어디서든 구하기 쉽고, 가격도 착한 알배기 배추 사다가 뭉근히 끓인 배추 된장국 어떨지, 독자님들에게 추천해 본다. 배추의 재발견이 될지도 모르니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