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단함을 삼키는 기술, 잔치 없는 날의 잔치국수

사십춘기 메뉴는 기분따라

by 엘슈가

누구나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간판 하나쯤 있지 않을까?

길 건너 잔치국숫집 간판이 보인다.

점심은 이미 먹었다. 다음 미팅까지는 한 시간 이상 남았다.

배는 부르지만... 들어갈까?


거절당한 제안서를 품에 안고 처진 세모 어깨를 한 날, 발걸음이 멈춘 곳은 작은 잔치국수집 앞이었다.



나는 성인이 된 후보다 어릴 때, 정확히 말하면 초등학교 시절에 책을 많이 읽었다. 그때 나에게 들어온 세상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불평등, 부조리, 억울함. 그런 것들이 어린 나에게 도드라져 보였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주위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많이 듣는 아이였다.


"혜숙이는 애늙은이 같아"

"애가 조숙하네요"


결과를 생각할 때도 긍정적이기보다 부정적인 면을 먼저 생각했던 아이였다. 잘 되리라고 생각해서 안되느니 애초부터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잘되는 게 낫다고 여겼다. '어차피...' 그 시절 내가 달고 살던 부사어다.


그런 내가 대학생이 되면서 바뀌었다. 부모님 그늘을 떠나 자취를 시작했고 생활비를 벌어야 하는 생활은 더 팍팍해졌다. 어차피를 달고 살아봤자 달라질 게 하등 없음을 깨달았달까? 그럼 한번 반대로 살아보자 생각했다. 무엇이든 긍정적으로 생각해보자고. '아니면 말고~'는 따라 붙는 옵션이다.


수업이 끝나면 줄줄이 이어졌던 아르바이트에 가면서 한 끼 때우기 좋은 메뉴는 따로 있었다. 잔치국수. 뜨근한 국물은 맑아도 멸치의 감칠맛을 가득 품고 있었고, 고명으로 올려진 당근과 애호박은 달큰하고 부드러웠다. 소면은 또 어떤가. 잘 삶아진 소면은 예술 그 자체다. 게다가 가격은 얼마나 착한지. 학교 앞 분식 메뉴 중에서도 잔치국수는 늘 가장 저렴했다. 그러면서 빨리 나오는 메뉴였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잔치국수를 먹는데 픽-하고 실소가 나왔다. 그날은 고대했던 무언가에 떨어졌던 날로 기억한다.


'잔치날도 아닌데 잔치국수를 먹고 있네'


한편 이런 생각도 들었다.

'잔치할 일이 없으니까 잔치국수를 먹지. 잔치할 일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스무 살의, 아무 연고 없이 상경해서, 쟁쟁한 동기들 사이에서 기죽지 않고 씩씩하게 지내려고 했던, 갓 스무살이 된 시골 아이는 그렇게 고다한 매일을 이어갔던 것 같다. 생각해 보니 그래서 더 특별했다. 나에게 잔치국수는. 이 국수를 먹으면 혹시라도 잔치할 일이 생길 것만 같아서.



연일 치솟는 물가에 백반 1만 원 시대. 이제 주위를 둘러봐도 잔치국수 간판을 단 식당을 찾기가 쉽지 않다. 예전에는 흔한게 잔치국수집이었던 것 같은데, 이제는 찾아가서 먹어야 하는 메뉴가 된 걸까. 이해도 간다. 식당 주인도 만원도 안 하는 잔치 국수를 팔아서는 높은 임대료를 감당하기 어려울 테니까.


그래서 더 찾게 된다.

잔치국수 간판이 눈에 보이면.

잔치할 일이 없을수록 더욱.


오늘 점심은 뜨끈한 잔치국수 한 그릇을 꼭 먹어야겠다. 잘 삶아진 소면을 입안에 가득 넣고 우물거릴 때 행복감을 만끽해야지. 다행이다. 그 행복만큼은 다음으로 연기하지 않아도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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