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11시 알알이 터지는 인생의 참맛 <명란>

사십춘기 메뉴는 기분따라

by 엘슈가

띵동~

하필 문자 알림이 온건 밤 11시였다. 택배 문 앞에 두고 갈 테니 찾아가라는 택배 기사님의 문자다. 때론 지인의 어떤 메시지보다도 힘이 되는 게 택배 도착 메시지라지만, 시간이 밤 11시 잘 준비할 시간이라는 게 문제였다. 막 잘 준비를 하던 참이었다.


가만, 내가 뭘 시켰더라? 여러 개의 쇼핑몰을 이용하는 나름 '프로 장보기족'인 나는 배송 온 품목이 무엇인지 떠올려본다. 하지만 이 건은 스티로폼 포장인 걸 보니 단박에 알겠다. 냉동식품이다. 최근에 냉동식품을 뭘 시켰더라? 단번에 떠올렸다. 이번 주문은 꽤 고심한 끝에 한 주문이었으니까.


간장 게장, 꽃게찜, 대게찜, 석화찜, 가리비찜... 이게 무슨 리스트이냐고? 낚시가 취미인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한 달에 두어 번 바닷가 낚시를 다닌 베테랑이었고 나는 자라는 동안 갖가지 해산물을 원 없이 먹고 자랐다.


결혼해서도 그 입맛 어디 가랴. 나의 수산물 사랑은 여전했지만 문제는 남편과 아이가 나만큼 좋아하지는 않는다는 것. 지금의 남편은 신혼 초보다 먹는 해산물이 늘긴 했지만 여전히 나에 비하면 '비기너' 수준이다. 그런데 해산물이라는 메뉴가 어떠한가? 같이 먹어야 제맛인 메뉴가 많다. 특히 꽃게찜, 대게찜, 석화찜, 가리비찜과 같은 것들은 혼자 먹으면 도통 흥이 나지 않는다. 반면 총알 오징어 통찜, 반건조 오징어, 백명란은 조금씩 꺼내서 혼자 먹기에도 꽤 괜찮은 메뉴들이다.


가족들이 좋아하지 않으니 한동안 이것들을 주문할 생각조차 못했다. 해산물 덕후라는 본분을 잊고 살았달까. 그런데 긴 외근을 마치고 돌아온 어느 날 자동차 시동을 끄면서 오늘은 손하나 까닥하기 싫다는 생각이 간절했을 때였다. 마침 남편도 저녁을 먹고 온다고 했다. 저녁 메뉴로 떠오른 게 '오징어 통찜'이었다. 차에서 내림과 동시에 배달앱으로 주문했다. 은박지 이불을 덮어 따뜻한 오징어 통찜이 내 손에 들어온 건 얼마 걸리지 않아서였다. 그날 나는 식탁에서 이걸 맛보았다.


'먹고 싶은 것이 떠올랐을 때 먹는 즐거움'




그날 이후로 나는 해산물에 대한 나의 사랑을 더는 감추지 않기로 했다. 대신 조금씩 소분해 두었다가 먹고 싶을 때 먹는 합리적인 방법을 택했다. 바로 그 백명란이 밤 11시에 집으로 배송된 것이다!


"어떡하지? 일찍 자고 내일 아침에 먹을까?"

"아니야. 그건 백명란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열어보기만 하자"


두 번째 마음이 이겼다.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 아직 자정은 아니니 새벽은 아니라고 위안을 하며 명란통을 열었다. 그곳에 핑크색의 통통한 명란이 다소곳이 누워 있었다. 마침 밥통에는 따뜻한 밥이 있었다. 만일 밥이 없었더라면 나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지 않았을 것이다. 그건 확실했다. 명란은 반드시 따뜻한 쌀밥과 먹어야 하는 메뉴니까. 명란을 구웠는데 마침 밥이 없다면 햇반이라도 사 와야 하는 것이다.


밥공기로 치면 3분의 1쯤 되는 밥에 명란 한 개를 얹는다. 그러다 이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을 명란 위에 덮어 버린다. 밥의 온기가 명란에 스며들기를 바라며. 입을 벌린다. 짭조름한 명란을 입에 넣고 가만히 씹어본다. 러시아 망망대해 그 어디쯤에서 잡혀 한국에서 정성껏 가공된 명태의 그 알을. 식구들은 자고 있을 시간에 우물우물 혼잣말을 되뇌며.


"좀 어때. 이게 사는 맛인걸. 너무 늦은 시간이지만, 매일 이러는 건 아니니까."


타인의 입맛에 맞추느라 조금씩 옅어졌던 내 취향이, 짭조름한 명란 한 점에 다시 선명해지는 기분이었다.

규칙적인 식습관도 좋지만 가끔 이런 일탈도 하며 살아가고 싶다. 남에게 맞출 일이 많은 일상에서 가끔 이런 내 취향 하나쯤 온전히 지키며 살아갈 것이다. 나를 아껴줄 때 비로소 타인에게 나눠줄 사랑도 채워지는 법일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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