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따끈한 맥반석 계란을 까먹으며 느낀 것들

사십춘기 메뉴는 기분따라

by 엘슈가

"뭐? 갑자기 시간이 된다고? 나도 맞춰 볼게! 그럼 내일 봐!"


대학은 각기 다르지만 늘 붙어 다녔던 우리들. '네 자매'라는 이름의 채팅방. 해외에 있던 한 친구가 귀국해서 이제 완전체로 보자며 돌 지난 쌍둥이가 있는 친구네 집에 다 같이 가기로 진작 입을 모았지만 쉽게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출근하는 친구들이 있어 주말로 날을 잡아야 하는데, 모두의 시간이 맞는 주말을 잡기란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 갑자기 날이 잡혔다. 너도? 나도! 자잘한 일정이 있는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았지만 나는 일단 '가겠다'라고 답했다. 친구들을 만나는 일을 더는 미루고 싶지 않았기에. 그렇게 우리의 토요일 오후 모임이 결성되었다.


너무 편한 사이라 준비할게 뭐가 있을까 싶었지만 머릿속은 분주해진다. 무언가를 준비해 가고 싶었다. 한 친구는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것이기에. 커피에 곁들이기 좋은 빵을 사가기로 하고 빵 종류를 물색해 본다. 두 개는 달콤한 계열 빵, 한 개는 짭조름한 계열 빵. 그러고 뭐 또 가져갈 게 없나 살피는데 문득 눈에 들어온 게 있다. 요즘 우리 부부가 한 잔씩 즐기는 것. 와인. 바로 메시지를 보냈다.


"와인들 좋아해?"

"우린 별로"

"우리도 술 줄이는 중"

아 그렇구나. 와인은 탈락. 빵만 사가기엔 좀 약한데... 그러다 눈에 들어온 건 우리 집 아일랜드 식탁에 놓여 있는 구운 계란 두어개. 빠르게 밥통 안을 살핀다. 타이밍이 기가 막힌다. 이대로라면 토요일 아침을 먹으면 딱 밥이 다 소진된다. 그때 밥통에 계란을 구우면? 친구네에 따끈한 맥반석 계란을 가져갈 수 있다! 가만, 집에 계란이 지금 몇 개 남았지? 다섯 개뿐이네. 낼 아침에 빵 사는 길에 계란 한판을 사 와서 '찜'버튼을 누른 뒤 갈 준비를 하면 딱 맞겠다.




커리어를 광고대행사 기획 담당(AE)으로 시작했다. 기획 업무란 광고주와 제작팀 사이에서 아슬아슬 예술적으로 의견을 조율하는 업무가 많았다. 서류며, 노트북이며, 스토리보드며 늘 짐이 많았다. 퇴사 후 쇼핑몰을 창업했을 때도 늘 많은 짐을 바리바리 들고 다녔다. 그래서 어딜 갈 때는 뭘 잘 가지고 다니는 편이 아니었다. 예전의 나였다면 구운 계란을 직접 해가는 일은 아마 선택지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 나를, 친구 만나는 길에 계란 스무 알을 밥통에 찌는 사람으로 변하게 한건 무엇일까?


언제부터인가 사람 관계는 자로 잰 듯 반듯반듯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예전에는 정답이 있다 생각했다면 세상엔 정답이 없는 일이 더 많다는 걸 알게 되었다. 세상을 다 안다고 생각했다면, 내가 아는 건 극히 일부임을 깨닫게 되었다. 시간이 무한하다 믿었지만, 결코 그렇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마흔셋, 인생의 변곡점을 지나고 깨달은 것들이다.


예전의 나라면 밥통을 이용해서 90여분 동안 계란을 구운 뒤 보듬어서, 따끈하게 모임에 가져가는 일은 결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친구들이 이걸 좋아할지 확신도 없었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그냥 한다. 좀 비효율적이더라도. 비효율의 끝에 값진 '이것'이 남는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추억, 추억이 남더라. 돈으로 살 수 없고, 어느 날 갑자기 만들래야 만들 수 없는 우리 만의 ‘추억’이.


그날 친구들은 따끈한 구운 계란을 먹으며 찬사를 보냈다. 찜질방은 안 가도 계란 있으니 여기가 찜질방 아니냐며. 친구의 딸내미는 나에게 "계란 이모"라는 새로운 별명을 붙여줬다. 가져간 스무 개 중 다섯 개는 먹고 남은 건 친구들에게 싸줬다. 아침에 계란 먹으면 좋다고. 먹고들 출근해 보라는 당부를 빼놓지 않으며.


오랜 친구들이랑 수다 떨며 까먹는 따끈한 계란을 대체할 메뉴가 또 있을까? 먹으면 신기하게도 우리가 함께했던 이십 대의 날들을 소환하고, 헤어지기 싫어 향했던 찜질방의 훈기를 소환시키고, 언젠가 여행지에서 조식을 놓치고 편의점에서 사온 계란으로 아침을 대신했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맛.


이십 대 우리의 대화가 배꼽 잡는 웃음이 많았다면 이제 우리의 대화엔 잔소리가 늘었다. 출근하느라 아침 거르지 마라, 아이 이유식 먹이느라 끼니를 대강 넘어가지 마라, 앞으로 별일 없어도 계절마다 꼭 한 번씩은 보자는 말은 당부를 넘어서 우격다짐에 가깝다. 애정을 눌러담은 우격다짐.


구운 계란 하나로 우리의 추억 한 페이지가 쌓인다. 기획안 속의 완벽한 숫자보다, 밥통 속에서 투박하게 익어간 계란의 온기가 우리 삶을 더 단단하게 지탱해 준다는 사실을 마흔 넘어 서로를 통해 배운다.


젊을 때 우리의 추억이 아이스크림처럼 시원하고 달달했다면 마흔 넘어 생긴 추억은 뭉근하고 고소하다. 마치 밥통에서 다시 태어난 이 구운 계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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