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은 안 마셨지만 마음이 부대낄때, 해장 라면

사십춘기 메뉴는 기분 따라

by 엘슈가

점심시간, 빌딩에서 우르르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 그 무리 중에는 "해장하러 갈까?"외치는 사람이 한 명쯤은 있기 마련이다. 학교를 졸업하고 회사에 취업하면서 해장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마다 궁금했다. 어떤 한자로 이루어져 있는지, 단어의 정확한 뜻은 무엇인지.


해장은 해정(解酲)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해정(解酲)은 풀 해(解), 숙취 정(酲)으로 이루어진 단어인데 이 단어가 발음하기 쉬운 '해장'으로 바뀌었다는 설이 있다. 이런 이름 때문인지 해장에 좋다는 음식을 먹으면 정말 해장이라도 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회사를 다닐 때는 술 마실 일도, 해장할 일도 많았다면 지금은 그렇지는 않다. 반드시 가야 하는 회식은 거의 없으니까. 함께 일하는 파트너 분들과의 친목은 맛있는 점심 한 끼면 충분했다. 다만 이건 더욱 필요해졌다.


마음의 해장


난생 처음 해보는 부동산 중개 보조 업무를 할 때였다. 그 집에 세 들어 살다가 떠날 사람과 그 집에 세로 들어갈 사람, 또는 그 집을 팔고 싶은 사람과 그 집을 사고 싶어 하는 사람 사이의 팽팽한 줄다리기는 말을 조심하게 만들었다. 상담이 끝나고 빈 커피잔, 메모지 등을 정리하다 보면 내가 늘 부족하다고 느꼈다.


그럴 때면 사무실 앞 한 분식집을 찾았다. 같이 먹자는 그의 말에는 "금방 먹고 올게"하고 혼자 나섰다. 밥 먹을 때만이라도 아무 말 안 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 시간을 보내면 차오르는 무엇이 있었다. 그 시간이 중개 보조원 업무에 꼭 필요했던 것이다.


사실, 그 집 해물 라면에 큰 기대가 있었던 건 아니다. 고백하자면 나는 라면을 여간해서는 먹지 않는다. 워낙 속이 약해서 소화가 안 되는 날이 많았고, 그런 이유로 면보다 밥을 찾았다. 면을 꼭 먹어야 한다면 잔치 국수를 먹곤 했다.


그런 내가 어느 날 해물 라면을 시킨 건 일종의 '반란'이었다. 그때의 기분이 지금도 생생하다.


멀건 국물로는 이 기분을 떨쳐낼 수 없어. 나는 빨간 국물 그리고 꼬불 꼬불한 면을 먹을 거야!




주문한 해물 라면이 나왔다. 국물이 빨갛다. 라면 수프만 넣은 게 아니라 고춧가루를 넣어서 칼칼한 국물이었다. 콩나물과 잘게 썬 파도 들어 있어서 시원한 그런 국물.


해물에 대한 설명을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을까? 구상이 필요하다. 사실 백반 한 끼 1만 원 시대에 5,500원짜리 해물 라면에 들어있는 해물에 큰 기대는 없었다. 지구 반대편 망망대해를 몇 번은 가로질러 왔을 듯한 수입산 벌크 사이즈 냉동 해물이 서너 개 안되게 들어있겠지 생각했다. 말이 해물 라면이지 해물은 한 두 개가 전부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S분식집 해물 라면은 이런 나의 편견을 철저하게 깨뜨렸다. 해물이 국산이 아닌 건 인정해야 한다. 국산 해물을 반줌 정도 넣은 해물 라면은 1만 원을 받아야 마땅할 테니까. 수입 해산물이 분명해도 퀄리티가 남달랐다. 홍합은 쫄깃하며 감칠맛이 났고, 칼집을 넣어 썬 한치는 연하고 꼬들꼬들했다. 등을 꼬고 있는 칵테일 새우는 탱글했으며 신선하지 않을 때 나는 이취도 없었다. 검지 손톱만 한 크기로 썰어져 있는 오징어 살은 결코 없어선 안될 조연이었다.


각각의 해물을 하나씩 맛볼 때쯤이면 꼬불꼬불한 라면 면발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리고 희한하게 그 느낌이 찾아왔다. 부대낌이 사라진 느낌, 마음의 해장 말이다.


"그것도 몰라요?"라는 눈빛으로 나를 보는 것 같은 손님도, 집 보기를 할 때 내가 왜 그 이야기를 빠뜨렸을까 싶은 자책도, 경험이 없기는 마찬가지인데 이미 능숙해진 남편에 비해 초라해 보이던 나도, S분식집 해물 라면 한 그릇을 비우고 나니 사라져 있었다. 마치 해장이라도 한 듯이.


익숙하지 않은 금리 계산도, 틀리기 쉬운 월세와 전세 전환법도 '그까짓 거 다시 해보면 되지'하고 없었던 의욕이 생겨났다.


만일 내가 이 한 끼조차 건강을 생각해서 빨간 국물 대신 멀건 설렁탕을 먹었다면 나는 결코 이 해방감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S분식집을 나오며 생각한다.


다음번에도 내 기분대로 메뉴를 선택할 거라고. 술은 안마셨지만 마음의 해장은 필요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