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도 볼 수 없는 나를 닮은 그런 상점
대학 시절 학교 앞, 정확하게는 정문을 나와 쫙 펼쳐져 있는 대로 말고 정문을 나오자마자 오른쪽으로 꺾어 살짝 내려가면 나오는 골목골목에는 각기 다른 보세 가게들이 모여 있었다. 어떤 가게는 아나운서 시험이나 최소 조교 언니들이 사 입음직한, 또는 교생 실습 때 입으면 좋을 정장류를 주로 팔고 있었고 어떤 가게는 소개팅에 입기 딱 좋은 옷들을, 어떤 가게는 남자 친구가 갑자기 '바람이라도 쐬고 올까?' 할 때 어울릴 청 반바지와 스트라이프 티셔츠, 라탄 모자, 레인부츠가 코디되어 있었다.
그중 내가 애정 했던 가게는 따로 있었다. 가게는 크지 않았지만 막상 들어가 보면 옷이며 소품 하나하나가 마음에 들어 큰일이었다. 용돈으론 부족해서 과외를 해도 내 지갑은 늘 얇았으니까. 그 옷가게 옷들은 심플한데 어느 한구석 디테일이 있었고 평범한 듯 보여도 걸치면 테가 났다. 몇 번을 빨아도 그대로인 점이 마음에 들었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한참 뒤 회사 워크숍으로 갔었던 홍콩 소호거리에서 그 가게 분위기가 나는 가게를 찾을 수 있었다. 세련되면서 심플하고, 심플하면서도 개성 있는 옷들이 그 가게에 있었다.
신기한 것은 그 가게 사장님이었다. 센스로 보면 젊은 여사장님일 듯한데 의외로 젊은 남자분이었다. 잊히지 않는 건 그의 애티튜드였다. 그는 결코 급하지 않았다. 손님이 들어오면 한번 쓱 쳐다보고 할 일을 하곤 했다. 손님이 샵을 충분히 둘러보고 충분히 걸쳐볼 수 있는 시간을 주었다. 그러고는 딱 한마디를 했다. '그거 한 장 밖에 없어요. 더는 안 들어와요' 그러면, 나는 눈이 동그래져서 모처럼 과외비를 받아 지갑이 두둑해진 날도, 용돈 부쳐줄 날이 까마득해 지갑이 얇은 날도 들어갔다 하면 뭐라도 하나 사 가지고 나오는 것이었다.
학교 앞 대로 주변에는 으리으리 한 브랜드 샵들이 빠르게 생겨나고 없어지곤 했다. 메인 도로가 아닌 골목 모퉁이에 있었던 그 작은 가게는 다행히 졸업 전까지 없어지지 않았다.
10여 년 직장 생활 후 든 생각이 있었다. 10여 년간 직장에서 많은 것들을 경험해봤으니 10년은 다른 일, '내 일'을 해보자. 이 당차면서 헛된 포부를 가지게 되었던 날, 희한하게도 그 가게가 떠올랐다.
당시는 쇼핑몰이 지금처럼 이렇게까지 흔하지 않았다. 막 온라인 쇼핑몰 시장이 형성되고 하나둘 빠르게 생겨날 때였다. 다들 잘 팔리는 상품을 찾아 소싱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면 나는 내가 좋아하는 상품으로 내 스토어를 채울 생각에 들떠 있었다.
음식보다 커피를 좋아하고 옷보다 소품을 좋아했기에 메인 상품도 옷이 아닌 소품으로 정했다. 의류가 마진율이 좋고, 다들 옷을 많이 팔고, 많이 사던 때였다. 나는 그런 것들이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꼭 필요하지만 막상 사려면 마음에 드는 것을 찾기 어려운 그런 상품들. 뭘 하나를 사더라도 꼼꼼히 알아보고 여러 번 생각한 후에 꼭 필요한 상품들을 잘 사서 잘 쓰는, 그런 내가 쓸 상품. 꼭 나 같은 구매자가 살 상품. 내 기준은 그것이었다.
아이템 소싱을 위한 리서치를 할 때는 국내 트렌드, 해외 트렌드, 조금 과장해서 오뜨꾸띄르 까지 살펴보아야 직성이 풀렸다. 오프라인 거래처를 돌 때는 아예 날을 잡고 남대문 동대문 샅샅이 뒤졌다. 오전에 남대문을 돌고 오휴에 동대문으로 건너가면 그때 청계천에서 본 석양이 참 예뻤다. 거래처를 돌 때도 그냥 도는 법이 없었다. 오만 군데 인사를 하고 참견(?)을 하고 다녔으니까. 오라는 데는 없어도 갈 곳은 늘 많았다.
체력이 지금과 말도 안 되게 좋았다. 펄펄 날아다녔으니까. 다니면서 협상하고 전화로 발주하고 편의점 들러서 급한 건 배송 보내고 급한 물건은 오토바이 퀵으로 먼저 사무실에 보내는 것이 가능했다!
10여 년을 사무실에서 전략 짜고 프레젠테이션하고 눈치 보고 주눅 들고 잠깐 성취감에 들떴다가 다시 회의하고 보고하고를 반복해서였을까. 서른 중반이 되어 나온 사회는 ‘찐’이었다. 시장은 펄펄 살아있었다. 그래서였을까? 상품 소싱이 그땐 그렇게 재미있었다.
거래처 돌다 보면 그 물건이 그 물건이지 하는 생각이 들기 마련이다. 일종의 체념하고도 비슷하다. 그런데 비슷해 보이는 물건이라도 나에게는 어떤 한 끗 차이가 보였다. 다들 똑같다 그러는데 나에겐 그 두 물건이 확연히 달라 보였다. 그 차이점을 알아내는 것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내가 대학 때 그 작은 보세 가게 옷들이 다른 옷들과 다르다는 은밀한 비밀을 알아차리고 그 가게 물건을 사는 것이 곧 돈을 버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줄곧 그 가게만 다녔던 것처럼, 내 온라인 쇼핑몰을 찾아오는 나의 고객들도 그렇게 여겨줄 것 같은 생각에 혼자 부풀어 있었다.
상품의 디자인은 또 어땠나? 유행을 타는 디자인이 아닌 심플하면서 한 군데 정도 포인트가 있는 상품을 주로 다뤘다. 걔 중에는 좀 특이한 디자인도 일부러 넣었다. 보는 재미가 있어야 하니까. 경험상 이런 제품은 대부분 재고로 떠안을 확률이 높았다. 그럼 뭐 어떠랴? 내가 다 하던지 주변에 선물로 주면 되지! 이건 어디서 나온 배짱인지. 길가에서 많이 본 문구 '사장님이 미쳤어요'내지는 '사장님 마음대로'다. 성공하는 쇼핑몰로 가는 지름길이라기보다 누가 봐도 딱 망하기 좋은, 멋모르는 유통 업계 초심자의 마인드에 가까웠다.
한마디로 나는 잘되는 쇼핑몰 벤치마킹할 생각은 안 하고 내 방식대로 내 취향대로 운영해왔던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느냐고? 삶은 그래서 재미있다. 작은 내 온라인 상점은 나와 다른 사람들의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갔으니까...
그 이야기를 시작해보려고 한다. 이 작은 상점을 통해 무엇을 하고 싶었는지, 이 상점을 통해 만난 사람들은 누구였는지, 일반적인 방식대로 운영하지 않았던 이 괴짜 상점에서
그간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어째서 이 작은 상점은 9년째 사랑받아왔는지, 그래서 이 괴짜 상점은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