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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슈가 Oct 24. 2020

남이 먹다 버린 커피까지 탐했던 이유

어디까지 해봤어요?

오 남매 중에 막내로 자란 나는 어렸을 때부터 꾀도 잘 부리고 게으를 때는 한없이 게으르기도 했지만 '할 때는 하는'성격이었다. 왜냐? 할 때 하지 않으면 두배는 고생한다는 심오한 사실을 남들보다 조금 빨리 알아차렸달까-


그러한 성향은 일을 할 때도 그대로 드러났다. 온라인 쇼핑몰을 운영하다 보면 비수기와 성수기라는 것이 있는데 비수기 때는 놀멘 놀멘 하면서도 시즌이 시작될 무렵이면 세상 일 다 맡아하는 사람처럼 며칠밤을 새며 작업에 몰두하곤 했다.


쇼핑몰을 운영하면서 내가 주력했던 것은 내 sns 플랫폼에 일상을 올리는 것이었다. 주인장의 일상을 보여주며 공감대와 신뢰를 이끌어내는 것이 '비슷비슷한 물건들'중에 '내 상품'을 픽하게 하는 이유가 되어준다고 생각했다. 사실 꼭 그러한 목적이 아니더라도 나는 운영 자체, 소통 자체를 즐겼던 것 같다.


어느 날이었다. 동네 엄마들과 오래간만에 예술의 전당에서 전시를 보고 예술의 전당 안에 새로 생긴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기로 했다. 아이가 초등학교 1~2학년 때였을까? 등교시키고 돌아서면 금방 마칠 시간이기 때문에 엄마들의 모임은 9-10시면 시작된다. 오래간만에 방문한 낮의 예술의 전당은 기분전환 하기에 충분했다. 새로 생겼다는 카페는 당시 핫했던 로스터리 베이커리 카페 '테라로사'였다. 사람이 많아서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지만 다른 데에 갈 순 없었다! 그날따라 커피는 또 왜 그리 맛있고 빵은 하나같이 왜 그리도 맛있던지...


올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가 우리 삶에 깊숙이 침투한 이후로 느낀 것이 있다. 행복은 별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여자들이, 엄마들이 삼삼오오 즐기던 커피타임을 못하는 것이 얼마나 삶의 질을 떨어뜨리는지에 대한 뉴스 기사도 본 듯하다. 만나서 뭐 대단한 걸 하고 대단한 걸 도모하는 것은 아니지만 '가을이네. 단풍놀이는 가니?" "내년이면 우리 한 살씩 더 먹네" "나이는 나만 먹나? 얼마나 공평해?" "참 애들 수학학원은 상담했어? 영어는?" 하면서 커피 한잔 빵 하나 먹고 마시는, 대화가 잠시 끊겨도 어색하지 않은 사람들과의 그 시간이 우리 삶의 질을 높여준다는 것을 2020년 깨달았다.


커피를 다 마시고 자리를 정리하고 핸드백을 들고일어날 때였다. 지금 일어나면 아이가 올 시간에 늦지 않는 딱 좋은 시간이었다. 그때 내 머릿속을 스친 생각이 있었다. '커피 사진 찍을 걸!, 나 바본가 봐'


집을 나설 때는 오랜만에 스트라이프 티셔츠와 레깅스에서 벗어나 슬랙스에 니트 가디건을 입고 가볍게 화장도 했는데, 동네 엄마들과 수다를 떠느라 따뜻한 커피에서 올라오는 김이 표현될 사진도, 다른 베이커리 카페보다 배는 비싸고 배는 큰 여기 빵 사진도 하나도 못 건진 것이다! 요즘 포스팅 거리도 없어서 한동안 일상 포스팅도 뜸했는데 오늘의 이 나들이를 올리면 딱이었는데...


"린엄마 안 나가고 뭐해?" "자기들 먼저 출발해~ 린이는 오늘 방과 후라 여기서 일 좀 더 보고 출발할게" 무슨 일을 남아서 한다는 것이냐고 묻듯 눈이 똥그래진 동네 엄마들은 서둘러 카페를 빠져나갔다. 나는 우리가 앉았던 자리에 다시 앉았다. 다행히 사람들은 많지 않은 시간대였다.


바에는 아직 우리가 가져다 놓은 트레이가 그대로 있었다. 나는 서둘러 그 트레이를 도로 가져왔다. 그리고 빵 2개와 아메리카노를 한잔 주문했다. 빵은 집에 가져가서 식구들과 먹을 수 있지만 음료를 가져가는 것은 오버였다. 다행히 한잔 정도는 더 마실 수 있으니 커피는 주문했다.


그리고 테이블에 놓인 따뜻한 김이 올라오는 커피와 먹음직스러운 빵 사진을 찍었다. 멋스럽게 해 놓은 카페 곳곳도 찍었다. 그리고 동네 엄마들이 방금 다 마셔버린(?) 빈 커피잔도 찍었다. 사진을 찍는 순서와 필요한 컷들은 머릿속에 있었다. 광고 회사 카피라이터로 일할 때 알게 된 '콘티'라는 툴은 이후로도 꽤 유용하게 쓰는 툴이 되었다. 실제로 제품 및 착용샷 촬영을 할 때 콘티를 그리며 준비한다. 그렇게 시각화를 한 기획을 가지고 촬영을 하면 그렇게 하지 않을 때에 비해 시간과 노력을 절반 정도로 줄일 수 있다.


왜, 왜 그렇게까지 했느냐고요? 가끔 촬영을 도와주는 친구와 함께 하는 시간들도 있지만 대개는 혼자 움직일 때가 많았다. 일상 속 쉬는 모먼트를 공유하고 싶어서 커피 사진을 올리고 싶어도 한잔 일 때가 많았다. 포스팅을 하려면 가끔 왁자지껄한 분위기를 전달 할 때도 있는데 그날이 딱이었던 것이다! 나는 그 기회를 살리지 못하고... 하지만 그대로 흘려보내기엔 아쉬웠다. 바쁜 초등맘이 언제 또 평일에 예술의 전당 음악분수 앞을 거닐고 언제 또 호사스럽게(?) 테라로사 카페에서 동네 엄마들과 커피를 즐길 것이란 말이냐!



나도 처음부터 이렇게 낯이 두껍지는 않았다. 알고 보면 나도 소심하고 내향적인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할때 몰아서 하는 성향, 일을 할때 제대로 하는 성향, 열심히 일하는 것은 죄가 아니다 주의, 내가 내 ‘일’을 사랑해야 사람들도 내 ‘일’을 사랑해준다는 믿음. 그리고 내 철학과도 같은 '아님 말고!'의 정신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


남들이 다 마신 커피잔을 가져와서 사진을 찍고 도로 가져다 놓을 수 있는 결단력과 용기, 내가 온라인에 작은 상점을 운영하면서 부수적으로 얻게 된 능력이랄까? 고백하건데 저도 처음부터 이렇게 낯이 두꺼운 편은 아니었습니다만...-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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