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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슈가 Oct 21. 2020

잊지 못할 그해 헤링본자켓 고객님

9년여 연간 온라인 쇼핑몰을 운영해오면서 많다면 많은 사람을 만났다. 우스개 소리로 한창 블로그 공구로 바빴을 때는 '안녕하세요~'라는 인사말만 보아도 상대방이 무슨 이야기를 할지 알겠는 시절도 있었다. 그중 잊지 못할 고객을 한 명만 꼽으라면 나는 이 분을, 그 날의 사건을 꼽겠다.


몇 년 전 가을이었을 것이다. 오랜 블로그 이웃이자 내 작은 상점의 단골 고객이 있었다. 말도 차분하게 예쁘게 하시는 편으로 기억한다. 아이를 키우는 워킹맘으로 직장에 다니시는 분이었다. 한 달에 한두 번 신상품이 올라오면 바로 구매하지는 않았지만 일주일 또는 열흘 뒤에는 꼭 주문을 하곤 했다. 일과로 바빠서 그때그때 들여다보기는 어렵지만 기억해 두었다가 살펴본 뒤 주문하는 것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 방식은 어떻게 보면 내가 쇼핑하는 방식과 비슷했다. 나는 바쁘고 치일 때 쇼핑을 잘하지 않는다. 시간적으로 여유가 좀 있을 때 기분이 좋을 때 천천히 쇼핑을 한다. 필요한 것들을 모아두었다가 한꺼번에 주문하기도 한다. 그분이 꼭 그랬다. 


주문한 상품을 받고 사용하고 나서는 꼭 후기를 올려주었다. 작지만 포인트를 지급해드리기도 했지만 포인트를 받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성향'일 가능성이 컸다. 좋은 건 좋다고 아쉬운 건 아쉽다고 알리는 것을 추구하는 성향. 겨울로 향해가는 늦가을 어느 날이었다.


그 해는 헤링본 재킷이 유행을 했었다. 여러 브랜드와 보세에서 헤링본 재킷이 출시되었다. 대세 핏은 보이프렌드 핏이었다. 보이프렌드 핏은 라인이 들어가지 않고 약간 벙벙한, 여유 있는 핏을 말한다. 스커트나 데님 바지에 툭 걸치면 무심한 듯 어울리는 보이프렌드 핏이 나는 괜찮았는데, 이 핏이 생소한 고객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 고객이 헤링본 재킷을 구매하고 며칠이 지나고 사이트 게시판으로 문의가 들어왔다. 사이트 게시판은 그 형태만으로도 뭔가 더 딱딱하게 느껴진달까. 시간은 밤 9시쯤이었을 것이다. 여느 날처럼 퇴근 후 저녁을 먹고 주방 정리를 하고 있는데 핸드폰으로 연결해둔 판매자 센터 알림이 울렸다. 고객 문의 게시판에 장문의 글이 올라왔다. 공개 여부는 비밀 게시글이었다.


엘슈가님. 며칠 전에 재킷을 구매한 ***라고 합니다. 그런데, 재킷이 저에게 너무 안 어울려서요. 환불을 요청드리고 싶어서요. 웬만하면 입으려고 했는데 정말로 어울리지가 않네요.


보통은 쇼핑몰에서 환불은 일상다반사, 특이한 일이 아니다. 요청하면 절차대로 처리하면 되는 일이다. 그런데 이 상품의 경우 시즌 오프 세일 상품이었다. 불량의 경우 교환은 가능하나 환불은 어려움을 쇼핑 상세페이지에 미리 고지하고 한정수량 대폭 세일가로 판매했던 상품이었다. 그래서 환불에 어려움이 있었다. 


나는 그 내용을 한번 더 상기시켜주는 답변을 작성했다. 그러해서 환불이 어렵고 그래서 죄송하고 양해를 부탁드린다는 이야기를 덧붙였다.


10여분이 지났을까 다음으로 올라온 게시글이 의외였다. 그 고객은 자신이 찾아본 '소비자보호법'을 인용하며 환불해주지 않으면 정식으로 이의를 제기하겠다고 했다. 나도 쇼핑몰 운영자이기 전에 사람인지라 그 게시글을 보고 기분이 상했다. 그래서 똑같이 격양된 어조로 답변을 달고도 싶었다. 그렇지만 나는 태생이 쇼핑몰 운영자 아니던가. 소탐대실할 수 없었다. 최대한 내 감정을 억누르며 답변을 달았다.


***고객님 엘슈가입니다. 남겨주신 글 잘 보았습니다. 요청하신 환불, 해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참 이럴 땐 판매자라는 이유로 이렇게 대하시는 걸 보면 조금 서글퍼지네요. 제 입장과 마음도 조금 헤아려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환불은 내일 해드리겠습니다. 이번 일로 저와 인연을 끊지는 말아주세요. 감사합니다.


엘슈가님. 이 제품이 몇만 원이었다면 좋은 분 엘슈가님에게 이렇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아서라도 그냥 환불을 요청드리지 않았을 거예요. 그런데 10만 원이 넘는 상품이기에 제가 형편상 부담이 되어서 두근거리는 마음을 참고 말씀드렸던 거예요. 그런데 제가 평소 좋아하는 슈가님이 서글프다고 하니, 오랜 팬으로서 눈물이 나네요. 15만 원이 너무 큰, 제 경제적 상황이 좀 아쉬울 뿐이네요. 환불은 안 해주셔도 괜찮습니다. 쉬시는 밤 보내세요.


이 글을 읽는 순간 어째서 와락 눈물이 났을까. 이 상품 하나가 뭐라고 몇 년을 한동네 이웃처럼 알고 지낸 분이 소비자 보호법을 운운하고 나는 또 나대로 성이 났을까... 이 분은 자기가 필요할 때 태도가 돌변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본인의 성향과 달리 무리해서 강한 어조로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어색한 강한 글을 작성하게 된 것이었다.


심장이 두근대는 걸 참으며 어떤 심정으로 글을 남겼을지 헤아리지 못한 채, 되레 상처를 줬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고 진심으로 미안했다. 나는 그때 나에게 되물었다. 15만 원짜리 상품을 팔면 나에게 얼마가 남나? 그까짓 마진 없어도 산다. 그게 뭐라고 내가 내 오랜 이웃, 고객의 마음을 아프게 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내가 재고로 떠안더라도 조금 손해를 보고서라도 요청대로 해드릴 것을.


즉시 환불을 해드린 그날 이후로 깨달은 것이 있었다. 고객이 원하면 일단 해드릴 것. 해드리고 나서 전후 사정을 물을 것. 바쁜 시대에 오죽하면 불편하면 그러겠나 생각할 것. 소탐대실하지 않을 것.

 

그래서, 그분은 어찌 되었느냐고... 그 헤링본 환불 사건(?)이 있고 나서 우리에게도 소원했던 기간이 있었다. 하지만 몇 개월이 지나고 그분은 똑똑 내 블로그를 다시 두드렸다. 나도 반갑게 맞아주었다. 지금도 옆 동네 이웃처럼 가끔씩 소식을 주고받으며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우린 서로의 근황을 전하거나 가끔씩 기프티콘을 주고받는다. 그분은 신상품이 올라오면 일주일 또는 이주일 뒤쯤 신중하면서도 빠르게 주문 넣어주시는 분 중 하나다. 잊지 않고 진솔한 후기를 남겨주시는 분들 중의 하나다. 내가 지치고 힘들어도 내 작은 온라인 상점을 그만두지 못하는 이유를 떠올릴 때 생각나는 분 중 하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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