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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슈가 Nov 16. 2020

처음으로 다방 커피 믹스를 내 돈 주고 산 날

광택이 좋은 촘촘한 고탄력 스타킹, 까인 흔적 없는 고급 구두, 브랜드가 겉으로 표 나는 것은 아니지만 한눈에 보아도 좋은 가죽으로 잘 만들어진 가방.


총총걸음으로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는데 버스는 유유히 정류장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아쉽지만 어쩌랴, 다음 버스를 기다리는 수밖에. 얼른 회사에 도착해서 커피 한잔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아, 회사 앞 카페 뎀셀브즈 커피를 한잔 사가도 좋을 것 같아. 아니면 아침 커피는 회사 탕비실에서 간단히 마시고 뎀셀브즈는 점심 커피로 남겨 놓을까? 기분 좋은 상상.


대학 졸업하자마자 들어간 회사, 10여 년간의 회사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출근 후 마시는 커피'였다. 대학 때는 학교 가는 길 편의점에서 사서 툭 따서 마시고 버리면 그만인 캔커피를 주로 마셨지만, 직장인이 되고 나서는 매일 다른 커피를 마실 수 있다는 즐거움이 있었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내 몫의 커피가 한개씩 생겨나는 기분좋은 착각마저 들기도 했다.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얼마 없는 막내 광고기획자에게 어떤 커피를 마실지 직접 고른다는 것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일 중의 하나였다.


"커피는 숙대리에게 물어보지 그래? 커피 전문가야~"

"아, 과장님 어떤 커피 드시고 싶으세요? 저 골목 저 카페는 사이폰 커피가 유명하고 그 뒤 그 카페는 점심시간에 미니 크루아상을 하나 주고 그 옆 카페는 달달한 카페모카가..."


사람들도 커피라면 나에게 물어보곤 했다. 실제로 당시 1,2위를 다투던 모 유업 회사의 RTD 커피(Ready to drink Coffee) 광고 기획을 맡기도 했었다. 경력 차이가 나도 많이 나는 베테랑 부장급 광고주와 막내 대리급 AE였지만 케미가 잘 맞아서 꽤 오래 진행했던 캠페인이었다.


당시 회사는 종로 삼일빌딩에 있었는데 삼일빌딩에서 광고주의 계동 사옥까지는 택시 타면 5분, 걸어가면 10여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가끔 날씨가 좋은 봄날이나 가을날이면 우드락에 붙인 시안을 들고 인사동을 가로질러 걸어가곤 했는데 그 길이 참 운치 있고 좋았다. 양복 재킷을 걸치면서 부장님이 '오늘은 걸어갈까?'는 말은 어떨땐 시적으로 들리기도 했다. 그런 날이면 ‘내 이 직업도 참 괜찮은 것 같아’ 생각도 들었다. 부장님의 그 제안은  걸으면서 전날 마신 거한 술을 깨기 위함이라는 것은 그때 대리급인 나는 알지 못했다.

    



'아 그게 어디 갔지? 분명히 여기 두었던 것 같은데...'

몇 년 전이었다. 아침부터 주방 찬장에 있는 것들을 다 꺼내놓고 무엇인가를 찾고 있었다. 어린 아가는 거실에, 자신만의 성에서 쌔근쌔근 잠들어 있었다. 아가가 깨기 전에 찾으면 딱 좋으련만 세상에 딱 좋은 것은 잘 없지 않은가? 그날도 그랬다. 여행길에서 사모은 듯한 온갖 기념품들, 언제 이런 선물을 받았나 싶은 포장도 풀지 않은 자잘한 선물들,  그때그때 필요해서 받았지만 먹다가 만 약봉지는 발견했어도 꼭 찾고 싶었던 커피믹스를 단 하나도 찾지 못했다.


거기서 포기할 내가 아니었다. 오전 11시를 넘어갈 무렵 아가가 잠에서 깨서 기분 좋게 엄마를 바라볼 때 나는 아기띠를 매고 근처 편의점으로 향하고 있었다. 어린 아가를 육아하는 엄마에게 한낮 커피 한잔은 얼마나 달콤한지. 보통은 아메리카노를 마시지만 가끔 정말 이 맥심 믹스커피가 미치도록 먹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때 믹스커피 한잔을 못 마신다는 것은 얼마나 비참한지... 문득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믹스커피 못 마셔서 비참하다니, 아니 그게 비참까지 할 일이야? 싶지만 사실이다.


"4000원입니다. 손님?"

"네? 네 여기요."


세상에 20개 들이 믹스커피 한통이 4천 원이나 했었나? 30대 후반이 되도록 그걸 몰랐다니 새삼 회사에서 툭 찢어서 종이컵에 타놓았다가 잊어버리기도 하고, 그러다 식어버리면 버리기도 하고 가끔 기획서 위에 엎질러서 난감하기도 했던 지난날의 무수히 많은 믹스커피가 떠올라 미안한 마음마저 들었다. 왼손엔 믹스커피 한통, 오른손엔 아이 장난감. 그렇게 들고 휙휙 걸어 집으로 돌아왔다.


"탁!"

커피포트에 물이 끓어 자동으로 스위치가 올라오는 소리는 얼마나 생동감 있는지. 가끔 그 소리 때문에 살아있다고 느낄 때가 있다. 내가 어느 날 미니멀리스트가 되어 다른 건 다 처분한다 해도 저 커피포트는 처분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 하게 되는 것이다.


커피믹스의 알맞게 예쁜 브라운 색깔이 보이도록 아이보리 커피 잔에 믹스커피를 털어 넣고 뜨거운 물을 부었다. 커피믹스는 물온도가 80도에서 90도 사이에 탈때 가장 맛있다고 한다. 이건 커피 업계 광고주에게 들은 사실이었다. 조금 식힌 물을 따르고 티스푼으로 휘휘 저어 내용물이 섞이게 한 다음 따뜻할때 한 모금 꼴깍 마실 때의 기분이란... 육아와 집안일, 그리고 늘 언제나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나는 이대로 괜찮은가? 무슨 일이 나에게 맞을까?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와 같은 심오한 걱정들은 어느새 사라지곤 하는 것이다. 이것이 믹스커피가 가지고 있는 마력이랄까.



나는 그날 처음으로 맥심 믹스커피를 내 돈을 주고 사보았다. 그 전에는 얼마인지도 몰랐던. 대학생 때는 잘 먹지 않았던 믹스커피. 길을 지나다가 본 동네에 막 새로 생긴 은행에는 믹스커피가 비치되어 있을 때가 있었다. 그럴 때는 스리슬쩍 들어가 통장이라도 만드는 양 대기 의자에 앉아있었다가 슬그머니 믹스커피 한잔을 타마시고, 손목시계를 보면서 눈이 똥그래져서 수업 시간이 다가와 오늘은 안 되겠다는 양 일어난다. 그러면 아무도 나에게 뭐라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다닐 때에는 늘 어디에나 맥심 믹스커피가 있었다. 핫플레이스 좋은 건물에 인테리어도 좋았던 우리 회사에도 클라이언트 회사 어디에도. 광고주와의 식사로 찾은 고급 한정식 집에서나 우리 부서 회식으로 가던 파주 장어집에도 어디에나 충분한 커피믹스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깨끗한 물에 담가놓은 티스푼까지.


그러나 10여 년의 회사생활을 끝내고 내 일을 해보겠다고. 그 시점이 왔다고 회사를 그만두고 난 후에는 내 일상 어디에도 공짜로 제공되는 커피믹스는 없었다. 그 또한 내 결정에 따라온 결과였다. 그렇다고 커피믹스를 안 마시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나는 내 돈을 주고 커피믹스를 사 먹게 되었다. 처음으로 내 돈으로 커피믹스를 산 나는 느끼게 되었다. 나는 독립했다고. 매일 출근 해야만 하는 매여있는 삶으로부터. 월급을 포함해 하릴없이 달콤한 부수적으로 제공되는 그 모든 편의들로부터. 그로 인한 자유도 책임도 불편마저도 오롯이 내 몫이었다. 그날 내 돈을 주고 산 나의 첫 믹스커피는 유난히 맛있었다. 마지막 한방울까지. -끝-


* 함께 읽으면 좋은 , 엘슈가의 브런치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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