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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슈가 Nov 27. 2020

옆팀 부장님의 충격적 한마디

"오늘 늦는다고? 요즘 일이 많네... 그래 알았어 린이는 내가 보고 있을게. 조심해서 오구"

"응, 고마워 이따 봐"


대표이사 앞 프레젠테이션이 며칠 남지 않은 어느 평일 저녁이었다. 업무 시간 내 끝내려고 했지만 이런저런 레퍼런스와 도표까지 찾아 넣으려고 하니 얼개를 짤 때보다 시간이 더 걸렸다. 2012년은 막 '워라밸' '야근 없는 문화' 물결이 시작되던 때다. 스타트업으로 시작해서 IT 대기업에 들어선 회사도 제시간에 퇴근을 권장하는 분위기였다.


"숙과장, 퇴근 안 해? 나 먼저 간다"

글로벌 소프트웨어 IT 스페셜리스트 출신인 김차장은 주로 칼퇴근이었다. 산뜻하고 당당하게 퇴근하니 누가 뭐랄 사람이 없었다. 내 책상에는 옆 건물에 따로 마련된 회사 식당에서 테이크아웃 해온 김밥과 미소장국이 놓여 있었다. '쓸데없는 웹서핑 하지말고 오늘 꼭 끝내고 가야지' 생각한다. 문득 남편이 아이와 잘 놀아줄지, 애는 그림 그리라 하고 TV만 보고 있는 건 아닌지 살짝 걱정되었지만 지금은 발표 자료에 집중할 때였다.


"이것으로 발표를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수고했어요. 피드백은 김실장 통해서 전달하겠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합시다"


전날 하도 긴장을 해서인지 머리가 욱신욱신하는 듯했다. 그래도 발표 후 그 자리에서 철퇴를 맞지는 않았으니 다행이다. 한 번도 커머셜, 지면 광고를 하지 않은 회사에서 처음으로 광고를 집행한다고 그 캠페인을 나더러 맡아보라고 했을 때는 호락호락하게 통과될 일이 아니라고 짐작하고도 남았다. 홍보실이 아닌 브랜드전략실이 따로 있었지만 웬일인지 브랜드전략실 전실장은 회의내내 말이 없었다. 내가 적임자라는 말 밖에는.


보고를 마쳤으니 이제 지시사항이 내려올 때까지 기다리면 된다. 오전은 쉬엄쉬엄 보내고 점심때는 사라져야지. 좋아하는 카페에서 샌드위치에 라테나 먹으면서 눈을 좀 붙여야겠다. 자리에 왔을 때 전화가 울리고 있었다.


"린이 어머님이세요? 린이가 오늘 등원할 때부터 열이 나서요. 기침도 하고요. 오늘 좀 일찍 하원 해서 병원 가야 할 것 같아요"


"열이 많이 나나요? 네, 알겠습니다. 할머니가 곧 가실 거예요. 제가 다시 연락드릴게요"


전날 밤 겨울이 오려는 날씨에 창문을 닫는 것을 깜박하고 잠들어서일까, 아이 열이 심하지는 않을지 걱정이 되었다. 전화를 걸기까지, 무슨 말로 시작할지, 어떤 톤으로 할지 숨고르는 시간이 필요했지만 다행히 어머님과 연락이 바로 되었고 얼른 손주에게 가보신다고 했다. 휴. 한숨 놓았다.


점심엔 좀 쉴 수 있을까 싶었는데 마침 구두가 눈에 들어왔다. 구두 굽이 달아서 걸을 때마다 쇳소리가 나고 가만히 서 있기가 어려운 상태랄까. 나에게 평온한 카페에서 샌드위치랑 라테가 뭐야... 구두방에 구두 수선 맡기고 거기에 앉아서 신문이나 볼 점심시간이 될 것이었다. 테헤란로 한복판 2평? 남짓될까 싶은 구두방에서 보내는 점심도 나쁘지 않다. 들어가 앉아서 지나가는 사람들 구경하는 재미도 있으니까.


"어 숙과장도 구두 고치러 왔어? 옆에 좀 앉을게~"

옆 부서 그러니까 대외협력 부서의 부장님이다. 평균보다 약간 더 큰 키, 호리호리한 체격, 서글서글한 인상, 그 너머로 언뜻언뜻 보이는 예리한 눈빛. 하지만 덕장이라 불릴 만큼 말에 덕이 묻어 있었다. 그가 아랫사람을 나무랄때도 모진 말을 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다. 열린 상무실 들으라는 듯 ‘잘할거지? 지난달 실적도 좋았잖아!’를 강조하곤 했다. 항상 끝은 ‘밥먹으러 가자’였다. 위로 아래로 두루 친하며 적이 없는 편이다. 아랫사람들이 격 없이 술 사달라고 하는 몇 안 되는 관리자 중의 하나였다.


"부장님도 구두 고치러 오셨어요? 점심은요?"

"고치고 먹어야지. 숙과장, 점심 같이 할래?"

"네~ 좋죠"


왜 관리자들은 식사 할 때 말없이 식사만 하는 것일까. 그리고 한식, 그 중에서도 국밥을 그리 좋아하는 것일까? 먹는 동안 별다른 말이 없었다. 김부장과의 식사는 빠르게 끝났다. 커피도 고를 것 없이 바로 옆 카페에서 테이크아웃을 해서 다시 회사로 들어가는 참이었다.


"숙과장은 특기가 뭐야?"

"네?"


"옆에서 보면 숙과장만 늘 남아있더라. 김차장은 맨날 칼퇴근이고. 숙과장 아이도 어리지 않아? 게다가. 집이 용인이지? 삼성동까지 출퇴근하려면 꽤 걸릴걸~"

"그쵸 1시간 20분은 잡아야 해요, 근데 뭐 더 멀리서 오시는 분들도 계시고... 그런데 부장님, 제 특기가 뭐냐니요?"


"아, 아니 옆에서 이렇~게 보면 숙과장만 매일 바쁘잖아. 다른 사람은 자기 꺼, 자기 일만 하는 것 같은데 숙과장은 남들 일도 다 떠맡아하는 것 같아서. 회사생활, 적당히 열심히 하는 게 중요하지, 너무 갈아 넣지 마~ 그런다고 알아주는 사람 없어! 그리고, 특기가 하나 있어야 해. 그 사람만 할 수 있는 일. 숙과 장만할 수 있는, 대체 불가한 일이 뭔지 생각해봐. 회사는 사실 그 포장이야”

"아..."


마지막 문장은 유독 더 조용히 말했으나 단호하기까지 했다. 그러고 보니 우리 부서에서 종종 야근하고 있는 것은 나 뿐이었다. 다같이 남아있는다고 달라질 게 있겠냐만은 전체등이 꺼진 사무실에 혼자 남아있을 때는 '누가 알아주겠어?'싶은 마음도 들었다.


그런데, 그날 김부장으로부터 들은 말은 좀 충격적이었다. 건너 옆팀이어도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털털한 김부장이 알고 있다면 다른 사람들도 다 알고 있는 것이다. 내 코가 석자인데 오지랖으로 다른 사람 일까지 떠맡곤 한다는 것도. 어느 정도 했으면 끊고 퇴근해도 될 것을 그러지 못해 야근한다는 것도. 마케팅기획, 광고기획, 카피라이팅, CSR...두루 경험해봤고 대체로 잘해왔지만 뾰족한 '한방'이 없어 보인다는 것까지.


김 부장의 한마디를 들은 그날 이후로 나의 회사생활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회계 부서의 김대리와 종종 점심을 먹고 회사 카페 라운지에서 커피를 마셨다. 회사를 운영하려면, 더 정확하게는 스몰 비즈니스를 하려면 알아야 할 ERP니, 부가가치세니, 개인 연말정산이니 기초적인 세무 지식을 알게 되었다. 관련한 책과 유료 과정을 추천받기도 했다.


그해 나의 퇴사는 어쩌면 김부장의 한마디가 쏘아 올린 작지 않은 공이었다. -끝-


* 퇴사  이후의 이야기, 엘슈가의 브런치북

https://brunch.co.kr/brunchbook/ore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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