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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슈가 Dec 07. 2020

옆구리 터져버린 과자봉지의 추억

"들어오기만 해 봐라. 문도 안 열어 줄테니까"

"띠링 띠리링~~"


"오빠? 오빠 온 거야? 얼른 옷 갈아 입고 쉬어야지"


갓 신혼이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풋풋했던 5년 차~6년 차였을 것이다. 남편은 주말 동안 회사 워크숍에 다녀왔다. 몇 년간 지켜본 봐로는 워크숍이라는 게 별다른 게 없었다. 도착해서 숙소에 짐 풀고 회의하고 밤에 술. 그리고 다음날 아침엔 흔히 트래킹이나 등산이라고 불리는 과정이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보통은 밤늦게까지 이어진 술자리로 다음날 등산은 그저 일정 상의 일정일 뿐 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문제는 이 남자가 워크숍 첫날 술을 너무 많이 마신다는 것. 다음날 돌아와서까지 힘겨워하는 것을 보면 아내인 나는 속상했다. 매일 가는 사무실이 아니라 장소를 바꿔서 워크샵에 가는 것은 효율을 높이러 가는 거 아닌가? 근데 왜 거기서 무슨 술을 그렇게들 마신단 말인가? 남편은 매번 안 그럴게 하면서 늘 같은 패턴일까? 난 워크숍 안 가봤나? 자제하자면 충분히 자제할 수 있다! 그런데 남편은 그걸 안 하는 것이다! 결혼 15년 차. 지금은 눈도 깜빡 안 하지만 그때, 갓 삼십 대 초반에 나는 남편이 많이 서운하고 참 미웠었다. 후후...



전날 밤 고주망태가 되어 통화 같지 않은 30초 통화를 끝내고서 다음날 그가 돌아오기까지 아내의 깜찍한 반란(?)은 시작되었는데, 혼자서 '문을 안 열어줄 거야'라든지 '아는 척도 안 할 거야'라든지 '말 걸어봐라, 내가 대답을 하나'와 같은 것. 그런데 아이랑 놀다가 현관문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나면 용수철 튕겨나가듯 반갑게 맞이하고 마는 것이었다.


"오빠, 어제도 술 많이 마셨어? 자제 좀 하라니깐~ 몸 힘들다며~~~"

"응, 알았어"

"맨날 알았다고만 하구, 똑같잖아. 걱정이..."

"그만~~~알았다구~ 나도 노력하고 있다구. 나 잠깐 편의점 다녀올게"


남편은 듣기 힘겹다는 듯 대꾸하더니 자리를 피했다. 나도 이러긴 싫지만, 안 그랬으면 하는 마음에 자꾸만 이야기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지금은 역시나 '그러려니. 그럴 수 있어. 그러라고 해.' 방송인 양희은 님의 3종 세트를 몸소 실천하고 있지만!)



남편은 편의점에 탄산수를 사러 갔을 것이었다. 탄산수를 하나 사서, 아니 2+1이면 분명히 2개를 사서 3개를 들고 왔을 것이다. 아파트 벤치에 앉아 한 모금 두 모금 마시며 과음으로 멍해진 머리를 달래려고 시간을 보내다 들어올 것이었다. 나는 그가 가지고 온 짐 가방을 풀기 시작했다. 세탁할 옷들을 따로 모아놓고 전날 회의 자료로 보이는 출력물들도 따로 놓았다. 그런데, 가방 한켠에 까만 봉지가 보였다. '음, 이건 뭐지?'


작지 않았다. 꽤 큰 봉지였다. 무겁지도 않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까만 봉지라니... 뭘까? 까만 봉지는 매듭지어져 있지 않았다. 봉지에 내용물을 넣고 휘리릭 가방에 넣어온 듯했다. 봉지를 열어보는데 손이 좀 떨렸다. 워크숍 가방 구석에서 나온 까만 봉지라니... 까만 봉지에 싸인 것들은 대개 의뭉스러운 것들이 많지 않던가? 영화나 소설 같은 데서 보면 말이다.


까만 봉지에 들어있던 것은 과자봉지였다. 흔히 '노래방 새우깡'이라고 불리는 커다란 과자봉지. 아예 봉지에 '노래방 새우깡', '노래방 감자깡'이라고 적혀 있었다. 대용량 과자를 이렇게 만들어 파는구나 생각 들었다. 노래방을 자주 가지 않아서인지 실물로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나 마찬가지였다. 구깃구깃한 커다란 과자봉지를 보고 있자니 픽 웃음이 나왔다. 대용량 과자에 붙인 '노래방 000'이라는 네이밍이 재밌기도 했지만, 내가 웃은 이유는 따로 있었다.



"먹다 남은 과자들은 좀 버려, 여보"

"무슨 소리야? 과자들이 양이 많잖아~ 반만 먹고 버리면 어떡해? 이렇게 꽁꽁 묶어놓으면 다음에 먹을 수 있는걸. 어차피 우리 한번 먹을 때 많이 먹는 것도 아니잖아"

"과자... 모 얼마나 한다고..."


남편과 나는 참 많이 달랐다. 내가 대단하게 절약을 잘하는 편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었지만 내가 하는 행동들에 대해서 신혼초 남편에게 많은 설명을 해줘야 했다. 남편은 가끔 수긍하는 것들도 있었지만 대체로 '그런 것도 있어? 그렇게까지 해야 해?'라고 눈을 똥그랗게 뜨고 나를 보곤 했다.


그런데, 이 과자들은 무엇이란 말인가? 전날 밤 남편은 워크숍 장소인 횡성 근처 고깃집에서 식사 겸 1차를 했을 것이다. 숙소에 돌아와 숙소 안에 있는 맥주집에서 2차를 했을 것이다.(이때 우린 통화를 했다, 아주 짧은 통화를!)그리고도 아쉬워 콘도 지하 편의점에서 과자니 술이니 등등을 사 와 방에서 과자를 앞에 두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이어갔을 것이다.


그러다가 잠이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침. 짐을 챙기는데 저 대용량 과자들이 눈에 들어왔을 것이다. 아내가 평소에 먹다남은 과자를 꽁꽁 싸매 두곤 했던 것을 기억하고 아무도 챙기지 않는 저 과자봉지를 휘휘 챙겨서 가방에 넣었을 것이다. 그리고 정작 그는 잊어버렸을지도 모른다.


Photo by Ryan Quintal on Unsplash


그렇게 횡성에서 우리집까지 따라온 먹다남은 과자 봉지들을 마주하고 있자니 픽 웃음이 나왔다. 남편, 자기도 자기랑 다른 나와 사느라고 노력하고 있었구나. 저렇게 많이 남은 과자를 그냥 버리고 올 수 없었나 보구나. 저걸 가져오면 아내가 칭찬해줄 거라 생각한 그 마음이 귀엽고 한편 소중하기도 해서 그것들을 한참을 바라봤다.


분명히 지퍼백으로 여닫는 부분이 있는데도 옆구리를 푹 뜯어버린, 이미 눅눅해질 대로 눅눅해져 먹을 수 없게 되어버린 과자들이었다. 두 개의 과자봉지는 맞춰가려고 노력 중이지만 아직 완전하지 않은 결혼 5년 차, 우리 둘을 닮아 있었다. -끝-


* 함께 보면 좋은 글, 엘슈가의 브런치북

https://brunch.co.kr/brunchbook/ore100


* 저의 글은 에세이에서 출발하지만 판타지 요소를 가미한 글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언뜻 보면 평범해 보이는 일상도 한 부분을 깊게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면 나만의 이야기가 될 수 있겠지요. 일상에서 끌어올린 인상적인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귀한 시간을 내어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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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단 이미지 정보: Photo by Yulia Khlebnikova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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