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엘슈가 Dec 17. 2020

직접 담근술의 예상치 못한 용도


'이걸 어디다 놔야 하나? 부피도 꽤 크네...'


최근 몇 년간 이사할 일이 많았다. 이사를 하고 나면 예상보다 늘 일이 많았다. 이사 계획이 잡힐 때마다 머릿속에서 곡선의 자태를 뽐내는 그 인삼주가 마음에 걸렸다. 이사 갈 집으로 가는 차 안 뒷좌석에는 늘 인삼주가 뽁뽁이에 쌓인 채로 함께 타고 있었다.


전형적인 길쭉한 담금주 병에 담긴 그것은 친정아버지가 직접 담가주신 인삼주였다. 5~6년 전이었나? 아버지가 인삼 농사를 지으실 때였다. 유난히 실한 인삼이 나왔고 그걸 골라서 자식들에게 한 병씩 인삼주를 담가주셨다. 언니들은 좋아했고 막내인 나는 좋다고는 말씀드렸지만 마음속으로는 그렇게까지 반기는 마음은 아니었다. 젊은 우리였다. 우선은 인삼주를 좋아하지 않았고 두 번째로는 저걸 어디에 놓아야 하나 생각부터 들었다.


전통적인 호리병 스타일의 커다랗고 투명한 병에 담긴 인삼주를 어떤 집들은 인테리어 요소의 하나로 잘 보이는 곳에 두거나 거실 한쪽 투명한 그릇장에 넣어두기도 하지만 나는 아직 그러한 취향은 아니었다. 심플한 것을 워낙 좋아했고 인테리어도 그런 것을 추구했기에 인삼주가 놓여야 할 위치를 매번 정하지 못했다. 그것이 친정아버지가 손수 기른 6년 근 인삼으로 직접 담가준 인삼주라고 할지라도.


"여보, 그거, 그거 어디 갔지?"

"뭐 말하는 거야? 그거라니?"


결혼 생활 10년이 넘어가면서 남편이 '그거'라고 말해도 보통은 찰떡같이 알아듣는 편이었지만 그날의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지 몰랐다. 남편은 자초지종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우리 전무님 내가 전에도 말했었지? 정말 대단한 분이셔. 이번에 회사를 옮기시게 되었어. 뭘 선물해드릴까... 떠오르지가 않는 거야. 그런데 그거, 장인어른께서 직접 담가준 인삼주 있잖아. 그게 떠오르더라고. 그분이 언젠가 인삼주를 유독 좋아하신다고 말씀하신 게 기억나서. 그거면 좋아하실 것 같아. 그거 아직 잘 있지?"


전무님이라는 분은 평소에도 남편이 가끔 이야기한 분이었다. 자신이 많이 존경한다고. 그런데... 그분에게 저걸 드린다고?



"너 이게 얼마나 귀한 건 줄 아니? 이것 좀 봐라. 인삼이 얼마나 멋들어지게 생겼는지"

"와~ 아빠 진짜. 어쩜 이렇대요?"

아빠는 나를 보며 환하게 웃으셨다. 나도 그렇다고 말씀드렸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완전한 진심은 아니었을지 모른다. 젊은 우리 부부에게 인삼주를 주시면 우리가 당장 먹을 것도 아닌데 이걸 어디다 써야 할지 몰랐다. 당시에는 집도 좁아서 ‘당장 저 큰 담금주 병을 어디다 놓지’ 생각부터 들었던 것이다. 게다가 술이라면 좀 지긋지긋하기도 했다.


그렇게 아버지가 담가주신 인삼주를 차 트렁크에 싣고 집으로 가지고 왔다. 시댁에도 하나 드리라고 우리 것보다 더 크고 멋있게 생긴 인삼이 들어간 것 까지 그렇게 두 병을. 몇 년이 지나도 시댁 거실에 그 인삼주가 변함없이 놓여 있는 것을 보고  '어머님 아버님도 인삼주 안 좋아하시나...?' 하는 생각이 마음 한편에 들기도 했다.


그런 인삼주를, 남편이 존경하는 분에게 드리겠다고?


"내일 가져가게 인삼주, 그것 좀 잘 챙겨놔 줘" 남편이 보낸 메시지였다. 나도 잊지 않으려고 바로 인삼주를 꺼냈다. 싱크대 안쪽 어두운 곳에 넣어두었던 인삼주다. 몇 년이 지났어도 인삼은 쪼그라들지 않고 그 자태가 용맹해 보이기까지 했다. 나는 묵묵히 인삼주 병을 닦고 또 닦았다. 닦다 보니 인삼주에서 광이 나는 듯했다. 들고 가기 좋게 튼튼해 보이는 종이가방을 두 겹을 해서 한쪽에 준비해두었다. 선물용 종이가방은 나가서 사 온 것이었다. 그렇게 해놓으니 제법 선물 같아 보였다.



그렇게 아버지가 담가준 인삼주를 보낼 생각을 하니, 문득 인삼주에게 미안해졌다. 몇 년 동안 함께해서인지 정도 든 것 같다. 너를 몰라봤다고. 어디 가면 대우받고 지낼 너일 텐데 우리 집 인테리어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자리를 차지한다고, 이사 다닐 때 가지고 다니기 힘들다는 이유로, 싱크대 구석에 넣어둔 게 못내 미안했다.


어쩌면 인삼주에게 미안했던 것이 아니라 친정아버지께 미안했던 것 같다. 가장 실한 놈으로 골라서 담가주셨을 그 고마움은 모르고 투덜거린 것 같아서. 그렇게 살아온 것 같아서. 그렇게 당시에는 고마움을 모르고 살다가 지나고 나면 이렇게 한없이 죄송한 마음이 드나 싶었다. 자식이란 그런 것인가 싶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고마웠다, 남편에게. 나라면 끝까지 몰랐을 이 인삼주의 용도를 그렇게 좋은 쓰임으로 떠올려줘서. 값비싼 양주보다도 어떤 선물보다도 좋아하실 것 같다고 말하는 남편이 고마웠다. 딸은 모르는 아버지의 노고를 사위가 알아주는 것 같아서 그 점이 고마웠다.



다음 날 남편에게 그 임원분의 반응을 물어보았다. 다행히 너무 좋아하셨다고 했다. 유독 좋아하시는 술이 인삼주가 맞았다고 했다. 이렇게 귀한걸 어디서 났냐고 해서 '장인어른이 직접 담가주셨다'라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이거야말로 그 인삼주의 운명이 아닌가 싶었다. 나는 몰랐지만, 의외였지만 기가 막힌 용도. 이렇게 멋진 쓰임이 있으려고 인삼주가 나에게 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다시 인삼주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보내는 그날 사진이라도 찍어놓을걸. 그 생각을 못했다. 오랜 시간 동안 우리와 함께 했던 인삼주에게 고마웠다고 뒤늦은 인사를 건넨다. 시계를 보니 아직 아버지께서 주무실 시간이 아니다. 지금 아버지에게 전화를 드려야겠다. -끝-


* 저의 글은 에세이에서 출발하지만 판타지 요소를 가미한 글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언뜻 보면 평범해 보이는 일상도 한 부분을 깊게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면 나만의 이야기가 될 수 있겠지요. 일상에서 끌어올린 인상적인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귀한 시간을 내어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브런치에 연재하는 모든 콘텐츠(글, 사진 포함)의 저작권은 생산자(원작자)인 엘작가에게 있으며 무단 전재 및 재배포를 금합니다. 이를 어길 시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있음을 고지합니다. 저마다의 소중한 저작권 보호에 동참해주세요! Copyright2020.엘슈가.All rights reserved.


상단 이미지 정보: Photo by Thomas Park on Unsplash


매거진의 이전글 옆구리 터져버린 과자봉지의 추억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