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강사가 경험과 독서를 권장하는 아이러니
준비되지 않은 독자에게 텍스트 읽기는 기계적인 해독일 뿐
초중등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리딩 수업을 시작할 때 저는 주로 목차 확인부터 지시합니다. 각자 읽고 싶은 지문을 고르기 위함입니다. 이 시기 아이들은 이미 어느 정도 취향이 형성됐을 가능성이 크고, 이에 따라 관심사가 다르죠. 어떤 친구들은 예술 주제를, 다른 친구들은 천문학 주제를 고릅니다. 목차의 제목만 가지고 선택하기 어려운 경우는 단원별 페이지의 대표 이미지를 보라고 하죠. 이렇게 각자 선택한 지문들을 우선 순위로 두고 수업을 진행합니다. 무조건 1단원부터 순서대로 시작하는 것보다 교수 학습 효율과 효과가 컸던 개인적인 방법입니다.
물론 청소년기 아이들에게 학습의 선택권을 줌으로써 주도권과 자율성을 장려하고자 하는 이유도 있습니다. 어른이 낯설고 일방적인 지시에 거부감이 있는 학습자와의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하고자 함도 있죠.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교수 학습의 효율이 크기 때문입니다.
리딩을 정의해보자면 ‘텍스트를 읽고 이해하는 과정, 즉 글의 내용을 해독하고 의미를 파악(독해)하여 지식을 습득하는 활동’이라고 정리됩니다. 해독의 영역이 주어진 텍스트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상향식 처리(bottom up approach)라면, 독해는 독자의 배경지식에 근거해 예측하고 전략을 활용하는 하향식 처리(top down approach)입니다. 즉, 리딩은 주어지는 텍스트 만큼이나 독자의 역할이 매우 큰 기여를 하는 영역인 것이죠. 독자는 텍스트와 상호 작용하며 배경 지식, 경험, 언어 구조 등을 활용해 의미를 구축하는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초등학교에서 근무했을 때 경험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는데요. ‘My mom called me in the morning.’라는 문장을 다수의 학생들이 ‘우리 엄마가 아침에 나를 불렀다’고 이해한 반면, 몇몇 친구들은 ‘우리 엄마가 아침에 나에게 전화했다’로 이해한 친구들(한 명도 아니고요!)이 있었습니다. 가끔 부모님이 생업에 바빠 아이들의 기상과 등교 준비를 보지 못하고 일찍 출근하시는 경우가 있죠. 그래서 전화를 통해 차려놓은 아침은 먹었는지, 준비물을 잊지 않고 챙겨가는지 확인하시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위의 예시보다 맥락이 더욱 풍부하고 자세한 지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순신 장군의 활약에 대해 어떤 친구는 전쟁의 승리를 이끈 거북선의 구조에 대해 집중할 것이며, 다른 친구는 이순신 장군의 감정선에 집중할 겁니다. 뿐만 아니라 독해 유창성과 정확성에도 차이가 납니다. 기존에 관련된 역사적 배경지식이 있는 친구는, 그렇지 않은 친구보다 더욱 쉽고 빠르게, 정확히 지문을 읽을 가능성이 크죠.
그래서 성공적인 독해에는 언어적 지식만큼이나 내용적 지식, 즉 배경지식이 매우 큰 기여를 합니다. 중고등학생과 영어 실력이 유사한 초등학생이 유독 토플 리딩에서 어려움을 겪는 이유죠. (토플은 주로 대학이나 대학원 입학을 위한 시험으로 설계돼 학문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참고로 이런 경우 저는 토플 대신에 소설 원서 읽기를 제안합니다.
성공적인 독해에 배경지식은 매우 큰 기여를 합니다.
리딩 실력이 좀처럼 늘지 않을 때, 분명 언어적인 지식은 충분히 갖춘 것 같은데 지문 이해가 어렵거나 독후 문제 정답률이 낮을 때 저는 배경지식 점검을 권장합니다. 배경지식은 지문의 제목(타이틀)과 관련해 내가 알고 있는 개념을 꺼내고 서로 연결해보는 브레인스토밍 활동, 지문의 한글 번역본을 먼저 읽어보는 활동, 지문과 관련된 영상을 시청하거나 사진 자료를 보는 활동 등이 있죠. 일반적인 리딩 수업이 이런 배경지식 활성화 활동으로 시작합니다. 독자가 준비되지 않았다면 텍스트 읽기는 기계적인 해독에 그칠 것이기 때문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