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땡관 Oct 17. 2022

망함은 쉽고, 되돌리긴 어렵고

 [이 사건의 사건 번호는 춘천지법 2007개회OOOO 사건입니다.]     


 2007년 가을이었다. 아버지가 전재산을 잃었다. 전 재산을 잃은 것도 모자라서 갚아야 할 빚만 3억 원이었다. 그것은 15년 전의 일이다. 나는 중학교 2학년이었다. 정확히 알지는 못하지만 아버지가 주식에 손을 댔는데 1년도 채 되지 않는 기간 동안 원금이 반 토박 났다고 했다. 하필 세계적으로 금융위기가 시작될 즈음이었고, 아버지는 원금이라도 회수해야 된다는 생각에 여러 곳에서 대출을 받아 그 돈을 다시 주식에 쏟아부었다. 영끌의 결과는 더 처참했다. 손실액만 5억 원 정도. 그 손실 중 3억 원 정도는 고스란히 대출금이었다.

 집이 망했다는 것을 직감했다. 어머니가 도시에 있는 고등학교 보내줄 돈이 없으니까 집 근처 고등학교를 다니든지 아니면 과학고등학교로 가라고 했다. 가난은 오히려 동기부여가 됐고 나는 과학고에 합격을 했다. 전교생이 의무적으로 기숙사 생활을 하고 한 달에 한 번 외출이 가능한 학교였다. 학원비가 들지 않아 좋았다. 고등학생인 자녀에게 들어가는 교육비가 0원이라니. 이것만으로도 엄청 효도한 거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과학고 입학하고 알게 된 사실이 있다. 과학고는 과학, 수학을 배우는 학교가 아니라 과학, 수학을 미리 배워서 가는 학교였다. 1월에 시작된 고등학교 1학년 수학, 과학이, 2월 말에 끝나있었다. 그리고 1학년 1학기가 시작되는 3월에는 고등학교 2학년 과정이 시작되었다. 고등학교 1학년 겨울방학에 학교는 소위 ‘수Ⅱ’라 불리는 과정을 나가고 있었고 2학년 여름방학이 끝날 즈음 ‘미적분학’이 끝났다. 나는 진도만큼 빠른 속도로 뒤처져갔다.


 문득 궁금해진다. 두 달 만에 고등학교 1년 치를 가르쳤다면 그건 과연 가르친 걸까 건너뛴 걸까. 물론 모든 책임은 고등학교 1학년 수학, 과학조차 미리 배워오지 않은 내게 있었다. 결국 나는 학업에 있어서도 학교폭력에 있어서도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계속 얻어맞았다. 왕따가 전학을 가면 새로운 왕따가 지목되는 폭력의 연속성과 방관하는 선생님들. 그것을 즐기는 괴물들이 폭력을 방관하는 동기들만큼이나 많았다. 입학할 때 61명이었던 학생은 학기가 바뀔 때마다 59명으로. 57명으로. 그리고 54명으로 줄어들었다. 동기들 10%가 학교를 떠나는 동안 나는 그냥 버텼다. 그때 나는 살아남는 것 그 자체가 목표였다. 이곳은 9할 이상의 학생이 2학년 때 조기졸업하는 과학고니까. 그리고 학원비가 들지 않으니까. 합격생 61명 중 시험 성적 19등으로 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동기들은 사회배려 대상자로 추가 합격한 61등이 내가 아니냐고 비웃었다. 수도권에서 살면서 강원도로 위장전입해서 합격한 피부가 까만 동기 한 명은 “쟤는 윗도리만 바뀌고 바지는 맨날 똑같은 거 입는다.”라며 나를 조롱했다. 식사시간마다 동기들은 왕따의 양 옆자리와 맞은편을 비우고 한 칸씩 떨어져 앉은 채 키득키득 웃으면서 밥을 먹었다. 그러면 왕따는 후배들이 식당에 도착해 보기 전에 허겁지겁 밥을 먹어치웠다. 후배들이 식당에 하나둘씩 들어올 때면 도망치듯 식당을 빠져나갔다.

 동기 여러 명이 전학 가는 데에 기여하고 또 실제로 폭행에 가담하기까지 한 학교폭력 가해자들은, 명문고답게 쉽고 심플하게 명문 대학교에 진학했다. 서른이 된 그들은 과연 자신들의 과거에 대해 부끄러운 감정을 가지고 있을까. 왕따를 견디다 못해 전학 가는 친구를 전학 전날까지 조롱하던 그들은 미안한 마음을 가져본 적이 있을까. 그들이 잘 지냈으면 좋겠다. 나도 그럴 것이다.


*

 아버지가 개인회생을 신청한 것은 2007년 가을이었다. 법원의 통지서에는 채권번호와 채권자 목록이 빼곡하게 적혀있었다. 국민은행, 우리은행, 한국외환은행, 현대카드, 농협중앙회, 서울보증보험, 공무원연금관리공단 등. 그중에는 스탠다드차타드제일은행, 홍콩상하이은행과 같은 생소한 은행들도 있었다. 아시아나 유럽의 도시 이름이나 영어가 적힌 수많은 은행 리스트를 보면서 나는 아버지가 가족들 몰래 세계 여행을 다녀온 거라고 생각했다.

 아버지와 어머니, 동생까지 그렇게 4명이서 원룸에 살았던 적이 있다. 개인회생으로 아파트에서 쫓겨나다시피 한 직후였다. 다행히 삼촌이 땅을 빌려주었다. 어머니의 큰아버지는 그 땅 위에 2층짜리 단독주택을 지어주셨다. 그리고 그 집에서 우리 가족이 살게 해주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모르지만 큰할아버지가 6.25 전쟁 때부터 집 짓는 일을 계속했다고 했다. 우리 가족은 그렇게 1년 만에 5평 원룸에서 24평 투룸으로 이사를 했다. 평생을 전업주부로 살아온 어머니는 1층에 식당을 열고 다슬기 해장국을 팔기 시작했다. 월 200만 원도 안 되는 돈으로 5명이서 살아가기에는 많이 힘들었던 것 같다.

 법원 통지문에 적힌 16년 전 아버지의 월평균 수입을 보니 406만 원이다. 최저시급이 3,100원인 시대에 월급이 400이라니. 아직도 공무원이 최고인 줄 아는 아버지 마음이 조금은 이해가 간다. 법원 결정문에 따르면 법에 의한 최저생계비의 1.5배를 원금에서 제외한 나머지 전부를 60개월 동안 변제하면 모든 채무에 대한 책임을 면제한다고 적혀있었다. 5년 동안 최저생계비 제외한 월급 전부 국가에 갖다 바치면 빚을 모두 갚은 걸로 퉁쳐주겠다는 의미였다. 그렇게 할아버지를 포함한 우리 가족 5명은 월 200만 원으로 5년을 살아내는 고난도 미션을 수행하게 된다. 내 인생의 난이도가 높아지는 순간이었다.     


 대학교 기숙사에 처음 가본 날을 떠올려본다. 2월 말이었고 그날 눈이 많이 내렸다. 나는 중학교 3학년 때 구매한 회색 떡볶이 코트를 입은 채 캐리어를 끌고 가고 있었다. 대학교 기숙사에 입주하기 위해 서울행 버스를 탔다. 나 혼자 서울 지하철을 타는 일을 처음으로 경험한 순간. 우여곡절 끝에 흑석역에서 내렸던 것 같다. 마을버스를 타고 학교로 향하는데. 이상하게도 버스가 중앙대 후문 정류장에서 멈추지 않고 지나쳐갔다. 당황스러웠다.

 “기사님. 저 좀 내려주세요!”

 버스는 계속 달렸고 나는 다음 정거장에서 내릴 수 있었다. 알고 보니 버스에서 하차하려면 빨간 버튼을 눌러야 했다. 나는 그걸 몰랐고 하차 버튼을 누르는 사람이 없으니 기사님은 그냥 지나친 것이었다. 이화약국에서 내려 캐리어를 끌고 눈으로 덮인 언덕길을 올랐다. 싸구려 캐리어 바퀴에 눈이 뭉쳐져 잘 굴러가지 않았다. 나는 바퀴가 멈춘 캐리어를 질질 끌었다. 기숙사에 도착했을 때는 녹아내린 눈과 땀으로 머리카락이 전부 젖어있었다.

 기숙사비는 2인실 기준 6개월에 180만 원 정도였다. 19살의 내 입장에서는 꽤나 비싸게 느껴졌다. 부모님은 빚만 있을 뿐이었다. 삼촌이 1년 치 기숙사비를 빌려주었다는 얘기를 어머니로부터 전해 들었다. “삼촌한테 전화드려서 고맙다고 해.” 나는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삼촌에게 안부 연락을 드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나도 감사한데. 지금은 그 말을 전할 삼촌이 없다. 나는 그것이 퍽- 고통스럽다.     


 생활관생은 기숙사 식당 식권 구매가 의무였기에 240장의 식권값을 선결제해야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기숙사비가 180만 원에서 240만 원이 되는 순간. 나는 생활비가 부족할 때마다 2,500원짜리 식권을 장당 2천 원에 팔곤 했다. 식권 한 장이 한 끼 식사가 되고. 아주 가끔은 식권 2장을 팔아 스타벅스 커피 한 잔을 샀다. 이 모든 것이 서울에 적응해나가는 과정이라고.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전 11화 오해받은 하루와 이해받는 하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